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743화 (742/1,307)

# 743

누가 봐도 종자 개량은 성공이다.

“그럼 제 소원을 말해도 되나요?”

“그럼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기꺼이 들어드리겠습니다. 말씀만 하세요.”

현수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진짜 남아일언중천금인 거죠?”

“물론입니다. 말씀만 하시면 들어드릴게요.”

“그럼 좋아요.”

말을 시작하며 성녀는 자세를 바꾼다. 현수와 시선을 정면으로 맞추기 위함이다.

“저 하인스님의 세 번째 부인이 되고 싶어요. 이게 제 소원이에요.”

“네? 뭐라고요?”

“부인이 두 분이라면서요. 열하나가 아니고. 그럼 열두 번째는 아니잖아요. 성군이 되어주세요.”

“그건……!”

현수는 잠시 망설였다. 이때 신전에서 들었던 여신의 음성이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너는 내가 간택한 내 딸의 배우자!

선택받은 인간이여!

누릴 수 있는 모든 복락을 누리며 살지니 내 딸을 잘 보살펴 내 뜻이 세상에 널리 퍼지도록 하라.

나의 뜻에 따를 때 네 세상에도 나의 힘이 미치리라.

카이로시아와 로잘린에게 부인을 더 이상 얻지 않겠다고 약속한 적은 없다. 처음엔 백작으로 알고 있었으니 관습상 다섯 명까지는 용인하려 했을 것이다.

현수 본인은 이곳 아르센에 아무런 연고도 없다. 스승이라 할 수 있는 멀린은 이미 작고한 지 오래이다.

이곳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고 씨를 뿌려 자손을 번창하게 하겠다는 생각은 없다.

그저 사랑하는 여인들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너무 많으면 그렇기에 더 이상의 인연은 만들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성녀가 그걸 깨기를 요구하는 중이다.

게다가 가이아 여신이 대놓고 지목했다. 인간으로서 어찌 신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제가 싫으… 신 거예요? 얼굴이 못나서 그런가요, 아니면 제가 부족한 게 많아서 그래요? 네?”

성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또 거절당할 것이란 마음이 들어서일 것이다.

“…아뇨. 그럴 리가요? 좋아요. 그럴게요. 좋아요. 내 여자가 되어주세요.”

“아아아!”

성녀가 나직한 감탄사를 토한다.

염원하던 바가 이루어지는 순간이니 웃어야 하건만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린다.

“그런데 이렇게 울보면 취소할지도 몰라요.”

“흐흑! 흐흐흑! 고마워요. 고마워요. 흐흐흑!”

성녀의 교구가 품에 안겨온다.

어찌 안아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흐흑! 흐흐흐흑! 무서웠어요. 또 거절당할까 봐. 저 이상하죠? 왜 자꾸 하인스님이 좋아지는지 모르겠어요. 좋아해요. 미치도록. 하인스님이 없으면 못살 거 같아요.”

“……!”

현수는 대꾸 대신 부드럽게 토닥여 주었다.

‘여기서도 셋이네. 내 팔잔가?’

현수의 어머니는 가톨릭 신자이다. 그렇기에 점 같은 걸 보지 않는다. 현수도 한때는 성당엘 다녔다.

그러다 대학에 입학하고 난 뒤론 학비를 버느라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다.

학창 시절, 학교 앞 카페에서 알바를 했다.

그때 카페 사장이 이벤트를 벌인 적이 있다. 어디선가 용한 점쟁이 하나를 데리고 온 것이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여자들은 점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 하여 이벤트는 성황리에 끝났다.

점쟁이는 약속했던 보수를 받고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현수의 이름과 사주를 물었다.

사주란 생년, 생월, 생일, 생시를 뜻하는 말이다.

이를 받아 풀어보고는 ‘초년 운은 곤고하나 풀려 나갈 것이며, 재복이 넘쳐 평생 만금을 희롱한다’고 하였다.

또 ‘중년엔 영화가 깃드는데 구변이 출중하여 도처에서 생재하리라’고 했다.

말발이 좋아 여기저기에서 돈을 번다는 뜻이다.

장사를 업을 삼으면 양적이 부럽지 않다고도 했다. 사업을 하면 떼돈 번다는 소리다.

그런데 천역성(天驛星)에 들었다고 한다. 쉽게 표현하자면 역마살이 들었다는 것과 비슷한 말이다.

하여 출입이 빈번하지만 상업에 유리하다 하였다.

어찌 보면 요즘 바삐 움직이는 게 이것 때문인 듯하다.

10장 신성력 어디서 난 거죠?

그때 말하길 ‘부부 간에 이별 수가 있으나 후에 반드시 상봉한다’ 하였다. 그러고 보니 요즘 수시로 이별하는 중이다.

본인들은 모르지만 아르센 대륙에 있는 동안은 생이별 기간이나 마찬가지이다.

마지막으로 점쟁이는 ‘의식(衣食)이 풍족해지고 만사가 여의하도다’라고 말하면서 ‘중첩하겠다’는 말도 했다. 중첩(重妾)이란 여러 여인을 거느린다는 뜻이다.

이 밖에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런데 그것들은 기억나지 않는다. 심심풀이로 들은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점쟁이의 말이 틀린 데가 하나도 없다.

‘중첩한다 했지? 아무래도 이게 내 팔자인가 보다. 휴우! 할 수 없지. 장가 못 간 노총각들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어쩌겠어. 이게 내 팔잔데.’

현수가 이런 생각을 할 때 성녀의 말이 이어졌다.

“살면서 날 버리지 말아요.”

“안 버려요. 걱정 말아요. 이제부턴 스테이시 아르웬은 내 여자니까 내가 챙길 거예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나저나 오래 굶었어요. 내가 음식을 좀 만들게요.”

“네, 고마워요.”

“아공간 오픈!”

성녀의 침실은 20피트짜리 컨테이너 하나를 꺼내놓고도 남을 만큼 넓고 높다. 그렇기에 취사용을 꺼냈다.

그리곤 빠른 솜씨로 죽을 끓였다. 송이버섯과 불고기를 넣은 김현수표 특제 죽이다.

“자, 다 되었습니다. 뜨거우니까 호호 불면서 먹어요.”

“…고마워요. 근데 하인스님은 안 먹어요?”

“성녀님 다 먹으면 나도 먹을게요.”

“…저… 앞으론 스테이시라고 불러주시면 안 돼요? 그리고 제게 말도 놓구요. 이제 곧 성군이 되시는데…….”

“…그래, 그럴게. 자, 스테이시, 이거 먹어봐. 내가 특별히 만든 맛난 죽이야. 라이셔 제국엔 없는 맛이라고. 자, 아!”

한 숟가락 뜬 죽에 대고 입김을 불어 식혔다.

그리곤 성녀의 입으로 가져가니 배고픈 제비새끼가 주둥이를 벌이듯 한다.

내심 웃겼지만 애써 참으며 죽을 먹였다.

“이제 배가 좀 불러?”

“네, 잘 먹었어요. 근데 이거 정말 맛있어요.”

“나 따라가면 매일 먹을 수 있을 텐데.”

“이실리프 자치령이요?”

진심이냐는 표정이다.

“이곳과 그곳을 필요할 때마다 오갈 수 있도록 텔레포트 마법진을 설치하면 돼.”

“……!”

“성녀로서의 일을 할 땐 여기 있고 내 아내 역할을 하고 싶은 땐 그쪽에 있으면 돼.”

“쳇! 그러다 내가 오로지 아내 역할만 하겠다고 하면 어쩌려고요?”

“그럼 거기다 신전을 지으면 되잖아. 가이아 여신님도 허락하실 거야.”

“어머! 그러고 보니…….”

성녀가 현수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미약하게나마 빛이 뿜어지는 것을 느낀 것이다.

“이건… 신성력인데. 하인스님은 아직 나랑 합방한 것도 아니고 신관도 아닌데 어떻게 이럴 수 있죠?”

“아까 신전에 갔었는데…….”

잠시 설명이 이어졌다.

“어머! 그럼 신탁이 내려온 거잖아요. 하인스님에게는 여신의 가호가 내린 거고요.”

“그렇게 되는 거야?”

“네. 신탁도 처음이고, 여신께서 누군가에게 가호를 내리신 것도 처음이에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가이아 여신은 라이셔 제국이 건국되기 전부터 존재했다.

그때에도 성녀가 있었는데 여러 번 신탁을 내렸다.

그리고 성세 확장을 위한 이적의 일종으로 누군가에게 가호를 내린 적도 있다. 이건 딱 한 번이다.

“그래서 신성력이란 게 생긴 건가 본데, 이건 대체 어떻게 쓰는 거야?”

“제가 종자들 축복하는 거 보셨죠? 그렇게 쓰시면 되요.”

“그럼 내가 직접 축복할 수 있다는 거지?”

“네. 신성력이 저보다는 적지만 그래도 상당하니까 혼자서도 충분해요.”

“종자의 양이 늘면 스테이시가 도와줄 거지?”

“그럼요. 얼마든지요. 전 이제부터 당신 여자예요.”

“…그래, 내 여자! 이제 우린 가족이야.”

“네, 당신의 가족이 되어 너무나 행복해요.”

스르르 품에 안겨왔기에 어쩔 수 없이 안아주었다. 본인의 그늘에 안주하기로 마음먹은 여섯 번째 여인이기 때문이다.

* * *

성녀가 현수의 품에 안기는 순간, 다른 곳에선 여인 하나가 급박한 위기에 처해 있다.

“누, 누구냐?”

“크흐흐흐! 깨었나? 호오! 듣던 대로 쓸 만하군.”

온통 검은색 어쌔신 복을 걸친 사내의 입에서 음흉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이곳은 미판테 왕국의 변방인 테세린에 위치한 이레나 상단 지부장 숙소이다.

어쌔신의 손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날카롭게 벼려진 소형 프람베르그(Flamberge)가 쥐어져 있다. 칼날이 물결치듯 구불구불하여 찔리면 엄청난 통증을 느끼게 하는 물건이다.

“너, 너는 누구냐?”

카이로시아의 음성은 몹시 당황한 듯 떨리고 있다.

“크흐흐! 내가 누구냐고? 너를 천국으로 보내줄 어른이시지. 크흐흐흐!”

말을 하며 한 발짝 다가선다.

“바, 밖에 누구 없어요?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

카이로시아가 큰 소리로 외쳤건만 어쌔신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있다.

“그렇게 소리치면 누가 도와주러 올까? 크크크크!”

“뭐, 뭐예요? 대체 왜 이래요? 누가 보냈어요? 왜 나한테 왔어요? 말해봐요! 누구예요?”

상당히 많은 물음을 한꺼번에 던졌다.

하지만 사내는 대꾸해 줄 가치가 없다는 듯 카이로시아의 몸매를 감상하는 중이다.

오늘은 현수가 준 슬립 가운데 망사로 된 분홍색 섹시슬립을 걸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하루 종일 격무에 시달리다 너무 피곤하여 다른 날보다 일찍 쉬려 했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혼곤히 잠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런데 누군가 이불을 확 제쳤다. 화들짝 놀라서 깨어나니 시커먼 야행복을 걸친 어쌔신이 음흉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크흐흐!”

“왜, 왜 이래요?”

카이로시아는 허겁지겁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내 등에 벽이 닿는다.

유사시를 대비한 비상 탈출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불행히도 그것의 입구를 어쌔신이 점하고 있다.

출입구로 나가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평범한 여인이 어찌 어쌔신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겠는가!

그랬다가는 프람베르그같이 생긴 단도에 찔릴 것이다.

보기만 해도 엄청 아프게 생겼다. 그렇기에 벌벌 떨기만 할 뿐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크흐흐! 천국에 가기 전에 다른 천국도 구경하고 가야 하지 않겠어? 아직 시집도 못 갔다며. 크흐흐흐!”

어쌔신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옷을 벗는다.

카이로시아는 현재 얇은 슬립 안에 팬티와 브래지어뿐이다. 거의 다 벗은 것이나 다름없기에 야행복을 벗은 것이다.

어쌔신이 이토록 여유 만만한 이유는 이레나 상단 본부의 모든 이가 깊은 잠에 취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수문위병 발루네까지 쓰러져 자는 중이다.

저녁 식사에 넣은 수면제가 이런 결과를 빚어냈다.

어쨌거나 상의가 벗겨지자 사내의 근육질 몸이 드러난다.

무슨 짓을 하려는지 충분히 짐작된다.

카이로시아는 이러다 꼼짝없이 일 당한다 싶어 겁이 났지만 있는 힘을 다해 고함을 질렀다.

“밖에 아무도 없어요!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

몇 번을 있는 힘껏 소리쳤지만 감감무소식이다. 모두들 곯아떨어진 때문이다.

오늘 이레나 상단 사람들이 먹은 음식에는 ‘오거의 꿈’이라는 수면제가 들어 있었다.

다른 나라에선 ‘인큐버스12)의 눈물’이라고 한다.

인간보다 훨씬 덩치 큰 오거조차 한 방울만 먹으면 쓰러져 잘 정도로 강력한 수면 효과가 있는 것이다.

하여 이레나 상단 사람들은 내일 오후에나 깨어날 것이다. 이런 사항을 알고 있으니 어쌔신이 느긋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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