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8
상당히 먼 곳으로부터 어떤 존재가 곧장 다가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건 뭐지? 뭐가 오는데 이런 존재감이 느껴져?’
고개를 갸웃거릴 때 후렌지아가 묻는다.
“마탑주님, 외람되게 하나 여쭈어도 되겠는지요?”
“말씀하십시오.”
“위그드라실의 잎의 맹약 때문에 젊은 엘프가 일생을 고통스럽게 산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네? 그게 무슨……. 혹시 하일라 토들레아가 제게 이것을 주어 남은 생이 고난의 연속이라는 뜻입니까?”
“……!”
후렌지아가 대꾸 대신 고개를 끄덕인다. 현수는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위그드라실의 잎을 내밀었다.
“그렇다면 돌려주십시오. 저 때문에 그럴 순 없지요.”
“그건 안 됩니다.”
“네? 왜죠?”
없어서 곤란하다 하여 돌려준다는데 강하게 고개를 좌우로 젓자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았다.
“그걸 돌려주신다 함은 스스로 목숨을 끓으라는 것과 같습니다. 아니, 돌려줌만 못하지요.”
“허어!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하일라 토들레아님이 괜찮아지는 겁니까?”
후렌지아는 이 대목에서 현수의 인간성을 파악했다. 하여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맹약이 헛되지 않도록 배려해 주시면 됩니다. 그저 그렇게만 해주시면 우리 하일라가 일생을 고통스럽지 않게 살게 될 겁니다. 그래주시겠습니까?”
“그, 그러죠.”
현수는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그러자 후렌지아의 표정이 급격히 밝아진다.
“역시 마탑주님은 다르시군요. 일족을 대표하여 다시금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하일라가 좋은 짝을 찾은 것 같습니다.”
“네? 그게 무슨……?”
“엘프 여아가 초경을 하는 날 위그드라실은 잎사귀 하나를 떨궈줍니다. 그건 일생을 같이할 반려에게…….”
위그드라실의 잎이 어떤 뜻이 있는지를 듣게 된 현수는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 안 됩니다. 저는 이미 아내가 셋이나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아! 불쌍한 하일라……. 이제 겨우 스무 해 남짓을 살았을 뿐인데 앞으로 천 년을……. 할 수 없지요. 그게 그 아이의 운명인 것을. 잠시라도 심려 끼쳐 죄송합니다.”
후렌지아가 고개를 숙여 예를 취하곤 한 발짝 물러선다.
“아리아니님의 축복을 받은 분이시니 지금은 이 숲을 훼손하지만 더 많은 식물이 생장하도록 하시겠지요.”
갑자기 웬 상황인가 싶어 대꾸 없이 바라만 보았다.
“저희는 저쪽에 머물고 있습니다. 마탑주님의 능력이라면 결계 속의 우리를 능히 찾으실 거라 믿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지극한 영광이었습니다.”
“가시게요?”
“네. 지금은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위대하신 분께서 거의 당도하신 듯하니까요. 나중에 한 번 더 찾아뵙지요.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납니다. 부디 안녕히…….”
정중히 고개 숙인 후렌지아는 곧바로 몸을 돌려 숲으로 들어갔다. 금방 숲과 동화되어 보이지 않는다.
“카멜레온도 아닌데 정말 대단하군. 그나저나 위대한 존재라면 누구지? 라세안인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마나의 힘으로 라세안을 불렀다.
[라세안! 라세안! 어디에 있는가? 라세안!]
뭔가 더 뜻을 전하려는데 일진광풍이 부는가 싶더니 금발머리를 찰랑거리며 30대 초반 사내가 다가온다.
“흐음, 인간치고는 대단하군.”
“…누구십니까?”
“옥시온케리안! 바세른의 주인이지.”
“……!”
라이세뮤리안이 경고했던 드래곤 로드인 듯하다.
“인간들이 시끄럽게 떠들면서 내 앞마당을 다 헤쳐 놓고 있더군. 내 허락도 없이 말이야.”
생긴 것으로만 따지면 왕년의 로버트 레드포드14) 찜쪄먹게 잘생겼다. 하나 표정은 부드럽지 못하다.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한 때문일 것이다.
‘뭐야? 드래곤 로드랑 한판 붙어야 하는 거야? 흐음, 라세안보다는 조금 센 거 같은데 될까? 까짓것, 한번 해보지. 그랜드 마스터에 10서클 마스터이니 지진 않을 거야.’
머릿속으론 온갖 경우의 수를 떠올리고 있다.
라세안과 대결할 때와 달라진 건 두 가지이다.
그랜드 마스터로 바뀌었다는 것과 10서클 마스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겨뤄볼 만하다.
게다가 보우 마스터 최상급이기도 하니 거리가 떨어지면 마법이 중첩된 화살을 쓸 생각이다.
그것으로도 부족하면 라세안에게 상처를 줬던 중기관총 K―6를 다시 꺼내 드는 방법도 있다.
이것도 안 되면 러시아 공격 헬기 KA―52 Alligator Hokum B에 장착되는 AT―16가 있다.
이건 공격 헬기에 장착되는 고성능의 HEAT 탄두를 장착한 대전차미사일이다.
유도 방식이 레이저 빔 라이딩 방식이라 목표에 맞을 때까지 조준용 레이저빔을 조준해 고정시켜야 하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사거리가 10㎞나 되며, 일반 장갑강철판 기준 900㎜를 뚫을 관통력을 가졌다.
약 90㎝ 두께의 철판을 뚫을 수 있으니 앱솔루트 배리어로도 안전을 장담하기 어려울 것이다.
‘뭐, 해볼 만은 하겠네.’
현수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이실리프 자치령을 다른 곳으로 옮길 마음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지구에서의 관념 때문이다.
지구에선 인간이 모든 동물에 우선한다. 현수에게 있어 드래곤은 고등 파충류에 불과하다. 물론 폴리모프 마법으로 모습을 바꿔 인간처럼 보일 땐 이런 마음이 많이 옅어진다.
그래도 아르센 대륙의 모든 존재처럼 드래곤에 대한 경외감 같은 걸 가지지 않는다.
조금 똑똑한 공룡일 뿐이기 때문이다.
집 짓고 살아보려는데 공룡이 공격하려 한다면 지구에선 어떻게 하겠는가!
소총으로 잡기 어려우면 탱크나 대포 등을 동원하여 퇴치할 것이다. 그렇기에 자리를 옮길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다.
“왜 대답이 없지? 여긴 내 영역이네.”
옥시온케리안은 어서 대답하라는 표정이다.
라세안이 말하길 눈앞의 존재는 석 달쯤 전 본인에게 패했던 제니스와 쌍둥이다.
로드이니 뭐가 달라도 다르긴 할 것이다. 그리고 이웃과 트러블이 있으면 곤란하다. 하여 싸울 때 싸우더라도 일단 대화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한창 일하고 있는 드워프 등에게 해코지를 하면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니스가 중재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단 이곳이 로드의 영역이라는 걸 몰랐습니다. 저는 테리안 왕국으로부터 이곳을 할양 받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어찌하겠다는 것인가?”
“이미 들인 돈도 많고 하니 눈감아주셨으면 합니다. 좋은 이웃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좋은 이웃? 인간이 감히 내게 이웃 운운하는가?”
옥시온케리안의 음성이 조금 더 냉랭해진다. 하찮은 존재가 자신과 동격인 듯 말한 때문이다.
“라세안, 아니, 라이세뮤리안에게 듣자 하니 제니스와 쌍둥이시라더군요.”
“라이세뮤리안과 제니스? 설마 라이세뮤리안 옥타누스 카로길라아지바랄과 제니스케리안 인터누스 지노타루이마덴을 뜻하는 말인가?”
옥시온케리안의 눈이 급격히 커진다. 인간은 드래곤의 풀네임을 알지 못한다. 들어볼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제니스의 풀 네임을 모르지만 라이세뮤리안 옥타누스 카로길라아지바랄은 내 친구의 이름 맞습니다.”
“친구? 인간인 너와 라이세뮤리안이 친구라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표정이다.
인간이 드래곤과 가깝게 지낸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주 오래전 스스로 인간에게 다가간 몇몇 드래곤이 너그럽게도 그렇게 해도 된다고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제국을 건국했거나 위대한 영웅이었다. 그러고 보니 눈앞의 인간 또한 대단한 기운을 내뿜고 있다.
‘읏! 인간이 어떻게 이런……?’
옥시온케리안은 현수가 일부러 드러내는 기세에 움찔했다.
일만 년 가까이 세월을 보낸 에이션트급 드래곤에게서나 느껴질 만한 대단한 카리스마였기 때문이다.
‘읏! 그러고 보니… 이건……! 인간이 어떻게……?’
이번에 느낀 기운은 막강한 신성력이다.
신관이 아님에도 이만한 신성력을 가진 존재는 여신의 가호를 받았을 때뿐이다.
여신의 가호15)란 ‘신이 특별히 주시하는 귀한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원래는 드래곤이나 몬스터로부터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신이 베푼 안배이다.
만일 여신의 가호를 받은 존재를 해하게 되면 용서가 없는 보복을 당하게 된다.
멸종당한 몬스터 중 일부는 모든 종족이 하루아침에 땅속에 묻히는 횡액을 당했다.
신성력은 부수적인 것일 뿐이다.
한낱 미물도 아닌 드래곤, 그것도 로드이기에 옥시온케리안은 가이아 여신의 가호에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때 또 다른 기운을 느끼게 되었다.
‘헐! 이건 숲의 요정인 아리아니의 축복이잖아.’
옥시온케리안은 고모뻘 되는 켈레모라니 라수스 에이페 컨페드리안 브지에텐토가리니안을 떠올렸다.
같은 골드 일족으로 참으로 정결한 삶을 살았던 존재이다. 마지막으로 만난 건 거의 1,500년 전이다.
고모에겐 시녀 겸 말동무인 아리아니라는 숲의 요정이 있었다. 모든 정령의 기운을 가진 희귀한 존재이다.
아무리 황량한 벌판이라도 몇 년의 세월만 주면 울창한 숲으로 변모시킬 능력을 가졌다.
아리아니는 단 한 번도 인간에게 축복을 내린 적이 없다. 인간은 늘 숲을 파괴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현수에게서 아리아니의 향기가 느껴진다. 물론 극도로 예민한 감각을 가졌기에 알 수 있는 것이다.
“혹시… 켈레모라니 라수스 에이페 컨페드리안 브지에텐토가리니안님을 뵈었는가?”
“뵈었지요. 하지만 이미 마나의 품으로 가신 뒤였습니다. 드래곤 하트는 그냥 있더군요. 지금도 잘 있을 겁니다.”
“……!”
인간은 몹시 탐욕스럽다. 그런데 엄청난 마나를 품고 있는 드래곤 하트를 그냥 놔두고 온 것처럼 말한다.
“그런데 켈레모라니님을 어떻게……? 아! 같은 골드 일족이시구나.”
“인간, 오늘은 이만 가지. 하지만 내 영역에서 소란 떠는 건 용납할 수 없네. 시간을 줄 테니 입장을 정리하게.”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말을 하려는 찰나 옥시온케리안이 먼저 입을 연다.
“텔레포트!”
“……!”
허공에서 그냥 팍 하고 사라진다. 과연 용언 마법이다.
지구의 속담 중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이 있다.
Where there is a will, there is a way!
의지만 있으면 못 이룰 것이 없다는 뜻이다. 용언 마법이 이와 같아 마음만 먹으면 마법이 이루어지는 모양이다.
“흐음, 드래곤의 마법도 얼른 마스터해야겠군.”
조만간 한 번 붙을 확률이 있기에 나직이 중얼거린 말이다. 이때 급격한 마나 유동 현상이 발생된다.
파앗!
“응? 라세안인가?”
“핫핫! 그래, 날세. 날 불렀어?”
“어! 그, 그래. 근데 요즘 뭐해?”
“뭐하긴, 자네가 말한 대로 몬스터들을 브론테 왕국 쪽으로 열심히 몰고 있지. 그놈들 중에 흑마법사들이 많더군.”
“그래, 흑마법사!”
“고 녀석들 사냥하는 재미가 쏠쏠해.”
진짜 사냥을 즐기는 듯한 표정이다. 현수의 말에 따라 온갖 몬스터들을 브론테 왕국 쪽으로 보냈다.
곧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런데 모양새가 이상하다. 흑마법이 난무했던 것이다.
라세안은 ‘호오! 이것 봐라’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마족이나 소환해 대는 흑마법사들은 밥맛없기 때문이다.
흑마법사들은 필사적으로 몬스터들을 막았다.
하지만 숫자가 너무 많았다. 그 결과 브론테 왕국은 절반가량 몬스터들에게 잠식당해 있다.
당연히 수많은 난민이 발생되었다.
이들은 안전한 곳을 찾아 이동하는 중이다. 전 같으면 이러한 움직임을 엄격하게 제한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그럴 수 없다.
놔두면 모두 몬스터의 먹이가 되는 상황인지라 국경 너머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막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