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9
그랬다가는 폭동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덕에 이실리프 자치령으로 끌려온 드리튼 백작 영지의 영지민 거의 전부가 무사히 국경을 넘었다.
그동안 어찌 국경을 넘어 탈출하나 애만 태웠는데 절호의 찬스가 온 것이다.
문제는 백작의 기사와 병사 가족들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의 수효는 약 삼만 명이다.
여기에 평민과 농노, 상인 등이 다수 끼어 있다. 이들의 숫자 역시 삼만여 명에 달한다.
졸지에 엄청난 인원의 이동이 시작된 셈이다.
미리 언급해 두었는지라 헨탈 영지의 영주인 누마 백작은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했다.
아울러 이실리프 자치령까지 탈 없이 갈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할 병사까지 붙여주었다. 하여 현재 이동 중에 있다.
어쨌거나 라세안은 몬스터들을 몰아 흑마법사와 이들에 의해 영향 받은 기사 및 병사들을 곤경에 처하게 했다.
다른 한쪽에선 제니스가 같은 일을 하고 있다.
사방에서 몬스터들이 튀어나온다. 국가의 근간인 백성들은 서둘러 다른 나라로 넘어가고 있다.
이러다 껍데기만 남게 생겼다. 브론테 왕국의 최대 위기가 조성된 것이다.
13장 쟤는 빼고!
모든 이야기를 듣고는 라세안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그거 참 잘했네. 계속해서 몰아쳐.”
“그래. 참, 선물이 있는데 줄까?”
“선물? 무슨 선물?”
“인간들이 좋아하는 거지. 잠깐만. 아공간 오픈!”
라세안은 아공간에 담긴 각종 몬스터의 사체를 꺼내기 시작했다. 죽자마자 넣었는지 부패된 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양이 엄청나다. 작은 산 정도 된다.
“놈들이 전투를 하면 나는 챙겼지. 이거 내다 팔면 돈이 꽤 될 거야. 이실리프 자치령을 위한 내 선물이네.”
“라세안, 이 친구가 정말……! 고맙네. 고마워.”
현수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고마워했다. 드래곤이 인간을 위해 이처럼 마음을 쓰는데 어찌 안 그렇겠는가!
“그나저나 제니스는 어디에 있나?”
“흑마법사 녀석들 혼내주는 재미에 푹 빠져 있네.”
“아, 그럼 브론테 왕국 근처에 있는 건가?”
“그래. 요즘은 제자 키우는 재미와 흑마법사 사냥하는 재미에 빠져서 살고 있지.”
현수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니스가 제자를 키워? 뭐야? 드래곤에게도 도제제도16) 비슷한 게 있나?”
“도제제도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제니스의 제자는 인간이야. 자네도 잘 아는.”
라세안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다.
“제니스의 제자를 내가 안다고? 누구지?”
전혀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 하여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아주 잘 알지. 아무튼 요즘 일취월장하고 있네. 제니스가 아주 잘 가르치거든. 역시 골드 일족다워.”
드래곤 중 마법의 위력이 가장 강력한 쪽은 블랙 일족이다. 주로 공격 마법을 익히기 때문이다.
골드 일족은 광범위한 마법을 익히면서도 여타 일족들을 압도한다. 마법에 대한 이해도가 탁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골드 드래곤에게 마법을 전수 받는 것은 모든 마법사들이 바라 마지않는 일이다.
“누구야, 대체?”
“그건 말해줄 수 없네. 그쪽에서 신신당부했거든. 그나저나 날 왜 불렀나?”
“조금 전에 드래곤 로드를 만났네.”
“옥시온케리안을?”
성질 급한 레드 일족만 아니었다면 라세안이 드래곤 로드였을지도 모른다. 전대 로드가 둘 중 하나를 후계자로 고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기에 로드에 대한 존경심이 조금도 없는 듯하다.
하긴 라세안만큼 개성 강한 드래곤도 드물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로드를 칭할 때에도 ‘님’ 자를 붙이지 않는다.
옥시온케리안과 거의 대등하다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 자네가 말한 대로 여기가 자기 영역이라면서 나가달라는 뜻을 표하더군.”
“그래서 어찌했나? 주변이 멀쩡한 걸 보면 한판 붙은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일단 생각할 시간은 주겠다는군. 근데 나는 여길 나갈 생각이 없어. 그래서 로드와 한판 붙어볼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자네 의견은 어떤가?”
“뭐? 로드와 붙어? 자네 제정신인가?”
“왜? 그럼 안 되나?”
“모든 드래곤과 적이 되는데?”
“적이 된다고?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현수의 태연한 표정에 라세안이 펄쩍 뛴다.
“헐! 이것 봐, 친구. 로드는 모든 드래곤을 대표하는 존재야. 그런 로드와 적대관계가 되면 일족 전부가 나서서 징치해야 하는 게 맹약이지.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나도 자네를 공격해야 한다구.”
라세안의 표정이 아주 심각해졌다. 모든 드래곤과 현수가 맞붙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일 때문이다.
혹시라도 핵 배낭이라도 터뜨리면 일족의 씨 몰살이 예상된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그렇기에 저도 모르게 진저리를 치고 있다.
“흐음! 그런 맹약이 있었나? 몰랐네. 그럼 어떻게 하지?”
“제, 제니스에게 중재를 부탁해 보게.”
라세안은 심히 당황했는지 말까지 더듬는다.
“제니스? 로드와 쌍둥이라고 했지? 근데 내 부탁을 들어줄까? 내게 그렇게 당했는데.”
“말해봐. 밑져야 본전이잖아. 만일 말을 안 들으면 다시 한 번 조져. 힘으로 제압해서 말을 듣게 하라고.”
“뭐어? 아무 죄도 없는 제니스를 두들겨 패서 말을 듣게 하라고?”
“그래. 그렇게 해서라도 중재하게 해. 그게 최선이야.”
“흐으음, 알았어. 그럼 내가 제니스를 만나러 가야겠군.”
라세안이 얼른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이번엔 자네가 부탁하는 입장이니 오라 가라 할 수 없지. 같이 가세. 내가 데려다 줌세.”
“아직은 아냐. 여기 일이 아직 정리가 안 되었어. 온 지 얼마 안 되었거든. 조금이라도 수습해 놓고 그러고 갈게. 자네 먼저 가 있어. 내가 연락할게.”
“그, 그래. 꼭 연락해. 알았지?”
“오케이! 도와줘서 고마워.”
“응? 으응, 그, 그래! 그럼 나 먼저 가서 제니스를 살살 달래고 있을게. 얼른 연락해.”
“그래, 먼저 가!”
라세안이 가고 난 뒤 한참을 턱을 괸 채 상념에 잠겨 있다. 옥시온케리안과의 분쟁을 어찌 해결할지 생각한 것이다.
제니스가 중재해 주면 큰 탈 없이 일이 끝나지만 아닐 경우 무지막지한 대결을 해야 한다.
그때 어찌할 것인가를 고심한 것이다.
“전격적으로 옥시온케리안을 제거하고 라세안을 로드로 옹립해? 끄응! 답답해서 안 한다 하겠군. 어떻게 하지?”
인간이 드래곤 로드를 갈아치울 생각을 하고 있다. 아르센 대륙이 생성된 이후 전무후무한 일이다.
문제는 그게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옥시온케리안을 찾아가 공격을 가하면 제거는 가능하다. 20m짜리 검강과 10서클 마법, 여기에 지구의 무기까지 가세하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그런데 선불 맞은 멧돼지라는 말이 있다.
단숨에 제압하여 사체를 아공간에 담아버리면 라세안을 제외한 다른 드래곤들은 모를 것이다.
문제는 그러지 못할 경우이다. 상처만 입히는 정도로 끝나 버리면 이실리프 자치령의 건설에 큰 차질이 생긴다.
옥시온케리안은 현수와의 대결을 피하려 할 것이다.
대신 공사 중인 드워프, 또는 브론테 왕국과 라이셔 제국에서 데려온 만오천 명의 인간을 몰살시키려 할 것이다.
그런데 허구한 날 이실리프 자치령을 지키고 서 있을 수는 없다. 지구에도 오가야 하기 때문이다.
본인이 없을 때 이런 만행을 저지르면 막을 방법이 없다. 따라서 대결보다는 대화가 먼저이다.
“끄으응! 하필이면 왜 여기에……. 바세른 산맥 엄청 넓은데. 좀 더 깊숙한 곳으로 레어를 옮기면 될 일을. 쩝!”
지극히 인간다운 생각이다. 다시 말해 이기적이다.
“아무튼 여기 일부터 얼른 수습해야지. 그전에 먼저 토마스와 그 일행을 데려와야 하고, 리히스턴 자작도 데려와야 하는군. 일단 토마스 먼저. 텔레포트!”
현수의 신형이 스르르 사라졌다.
“아, 마스터! 어서 오십시오.”
주점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곧바로 토마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탁자에 자리 잡은 때문이다.
“아, 안녕하십니까? 목이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카이엔 제국의 수도의 분뇨를 담당하는 똥치기 대장인 미친 오우거 란돌프이다. 그의 곁에는 아우인 레이먼이 있고, 현수와 팔씨름을 했던 하만 등이 있다.
“그래, 잘들 있었지? 내가 공사가 다망해서 좀 늦었네.”
“아, 아닙니다. 저흰 괜찮습니다.”
전장의 학살자 토마스가 얼른 손사래를 친다. 말을 이렇게 했지만 이곳에서 한 달 이상 기다리기만 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현재 앉아 있는 자리를 차지한 채 입구만 바라보았다.
언제 저 문이 열리고 그랜드 마스터이자 매지션 로드인 이실리프 마탑주의 얼굴이 보이나 노심초사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시비도 많이 붙었다. 물론 토마스가 전장의 학살자라 불리는 용병이라는 걸 모르는 자들이 덤볐다.
결과는 100전 100패이다. 무료한 기다림을 달래준 유일한 일들이었다. 어쨌거나 기약도 없고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기다리기만 하는 일은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다.
하여 토마스 등의 얼굴이 조금 늙어 보인다.
“미안하네. 이제야 시간이 나서……. 이실리프 자치령으로 가려 하는데 지금 괜찮은가?”
“물론입니다.”
모두들 준비된 짐을 짊어진다. 한 달이 넘도록 바닥에 놓여 있던 것이라 먼지가 우수수 떨어진다.
“좋아, 가지.”
현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때 란돌프가 잠시 주저하더니 입을 연다.
“저어, 마스터!”
“왜?”
“아우들을 조금 더 데려가도 되는지요? 똥이나 치우면서 사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건설적인 일을 해보고 싶다는 녀석들이 많아서요.”
“…좋아, 같이 가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란돌프가 계속 굽실거리는 사이에 주점에 앉아 있던 모든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설마……!”
“네, 제 아우들입니다. 친형제는 아니지만 절 따르니…….”
“흐음, 가족은 없나? 홀아비들은 아닐 거 아닌가?”
이실리프 자치령은 현재 심한 성비 불균형 상태이다. 사내들만 우글거리고 여자들은 몇 없다.
치마만 두르면 미추에 관계없이 환장할 지경인 것이다. 여기에 사내들을 추가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가, 가족들도 데려가 주실 수 있는 겁니까?”
“지금부터 세 시간을 주지.”
“가, 감사합니다. 그, 그럼……!”
들고 있던 짐을 내려놓고 모두들 우르르 몰려 나간다. 남은 건 토마스뿐이다.
“토마스 자넨? 깊은 산속이라 여자를 만나기 힘든 곳이네. 여기 꽤 오래 있었으니 마음에 둔 여인이 있을 법한데 안 데리고 갈 건가?”
“…알겠습니다. 세 시간 후에 뵙죠.”
토마스마저 나가자 주점은 텅 비었다.
“온 김에 스타이발 후작이나 봐야겠군.”
“어서 오십시오, 로드!”
영광의 마탑주 요한슨 드 스타이발 후작의 허리가 깊숙이 숙여진다.
“잘 있었는가?”
“로드의 염려 덕분에 무탈합니다.”
“진전은……?”
“텔레포트 마법은 팔 할가량…….”
스타이발 후작은 자신 없는 표정이다.
“흐음! 자네의 마법서를 가져와 보게.”
“네, 로드!”
스타이발 후작이 가져온 것은 고색창연하다 못해 만지기만 하면 부스러질 정도로 낡은 마법서였다.
표지에는 『저자 : 엘리온 드 스타이발』이라 쓰여 있는데 희미하게 보일 지경이다.
“흐음! 많이 낡았군. 오래 돼서 그런가? 리이스태블리쉬먼트(Reestablishment)! 레스터레이션(Restoration)!”
재정립 마법과 복원 마법을 구현시키니 낡디낡은 마법서가 거의 새 책처럼 멀쩡해진다.
“허어!”
세월에 따라 책도 늙는다. 그런데 노인이 청년으로 변모하듯 바뀌니 탄성이 저절로 나온 모양이다.
현수는 태연한 표정으로 멀쩡해진 마법서를 뒤적였다.
“흐음! 효율이 좀 떨어지는군. 이 부분은 설명이 너무 많이 생략되었고……. 아공간 오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