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3
슬쩍 바라보다 시선이 마주쳤다. 눈빛이 반짝인다. 몹시 흥미로운 물건을 만난 아이의 눈빛이다.
그 속에 사랑하는 기운이 가득 담겨 있다. 한 번쯤 안아줘야 할 대목이라는 뜻이다.
“잠깐 이리 와봐.”
“네.”
이번에도 찍소리 않고 다가선다.
와락―!
“아아아……!”
성녀가 헝겊 인형처럼 딸려와 품속에 안겼다.
“고마워. 날 선택해 줘서.”
“아아, 사랑해요.”
성녀의 몸에서 힘이 쑥 빠짐이 느껴진다.
이쯤 되면 마음대로 하라는 뜻이다. 사람의 시선이 없는 마을 외곽이고 지천이 숲이다. 아무 데나 들어가면 된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현수는 성녀의 등을 부드럽게 다독였다.
‘대체 내게 무슨 복이 있어서……. 아무튼 너무 좋다.’
너무도 사랑스럽고 아름다우며 고결한 여인이 품속에 안긴 채 가늘게 호흡을 이어가고 있다.
입맞춤이라도 기대하는 듯하다.
“우리 결혼은 신전에서 하자.”
“네, 좋아요.”
현수는 성녀를 조금 더 세게 보듬어 안아주었다. 성녀는 가늘게 숨을 이어가며 할딱였다.
* * *
“시간이 조금 걸릴지 모르네. 그동안 여기 작업은 자네들에게 맡기네.”
“네, 걱정 말고 다녀오십시오.”
드리튼 백작, 리히스턴 자작, 토리나 백작, 스타이발 후작, 토마스 등이 깊숙이 허리를 숙인다.
방금 전, 이곳이 드래곤 로드의 영역이라는 이야길 들었다. 그리고 그와 접촉이 있었음도 말했다.
우두머리들은 대경실색했다.
드래곤은 자신의 영역이 침범당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어느 왕국은 드래곤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하루아침에 멸망당했다.
수도에다 대고 무지막지한 브레스를 갈긴 결과 국왕을 비롯한 모든 귀족이 숯이 된 때문이다.
현수의 스승인 멀린에 의해 죽은 광룡이 벌인 짓이다.
그런데 이야길 들어보니 불협화음이 생긴 게 일반 드래곤이 아니다. 드래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것으로 인식되어 있는 드래곤 로드이다.
당연히 벌벌 떨었다.
소드 마스터인 토마스도 마찬가지이다.
지금껏 벌여놓은 게 아깝기는 하지만 모두가 죽을 수 있으니 한시바삐 철수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에 현수는 드래곤 로드의 쌍둥이를 알고 있으니 일단 중재 요청을 해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제니스를 찾아 떠나려는 것이다.
“스테이시, 코린에 데려다 줄게.”
“네, 뜻대로 하세요.”
잠시라도 떨어지는 게 아쉽다. 하지만 성녀는 코린에 가서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첫째는 교황과 황제에게 결혼 통보를 하는 것이다.
성녀의 결혼은 신전에서 주관한다. 집전은 교황이 하고, 황제와 황후, 공주와 황자들은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
대지의 여신이 라이셔 제국의 주신이기 때문이다.
교황이나 황제라도 성녀의 결혼에 대해 가타부타 끼어들 수 없다. 순수하게 성녀의 뜻에 따르는 것이 법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혼을 통보 받으면 예식 준비는 온전히 교황과 황실의 몫이 된다.
성녀가 두 번째로 할 일은 가이아 여신으로부터 일생을 계시 받는 것이다. 불행한 결혼 생활이 되지 않도록 미리 굴곡을 통보 받는다. 언제 어느 때 어떤 중차대한 일이 일어날지 알면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녀들은 무난한 결혼 생활을 영위했다.
세 번째 할 일은 목욕재계와 식을 올릴 때까지 마음가짐을 준비하는 것이다. 일생에 한 번뿐인 결혼이니 정갈한 몸과 마음으로 결혼에 임해야 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성녀가 아니라 신자들의 몫이다.
성녀의 결혼식엔 특별한 효과가 있다.
교황이 혼인이 이루어졌음을 선포하는 순간 예식에 참석한 모든 이에게 여신의 축복이 임하게 된다.
이때만은 가이아 여신의 신성력이 치유 능력을 갖게 된다. 그래서 웬만한 질병은 단숨에 낫는다.
당연히 전국 각지에서 온갖 병자가 몰려온다.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여 결혼식 전후 닷새는 통행증이 없어도 이동할 수 있다. 환자들이 마음 편히 이동하도록 배려해 주는 것이며, 결혼을 축하하는 의미인 것이다.
마지막은 혼례식 날 입을 의복을 만들어야 한다.
타인의 손을 빌리지 않고 직접 천을 짜서 그것으로 드레스를 만든다.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할 때마다 성군과의 행복한 미래를 염원하면서 해야 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잠시 헤어져 있자는 말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텔레포트!”
샤르르르르릉―!
현수와 성녀의 신형이 사라졌다.
남겨진 사람들은 눈을 비빈다. 눈앞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이다.
“자, 이제 일하러 가십시다.”
“네, 그래야지요. 마스터께서 오시기 전에 최대한 많은 일이 이루어지도록 잘해보십시다.”
“물론입니다. 자, 그럼 저 먼저 갑니다.”
말을 마친 토리나 백작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아카데미 현장인 파빌리온으로 가는 것이다.
리히스턴 자작은 도서관이 될 타지마할로 향했다.
스타이발 후작은 한옥과 바실리를 맡았고, 토마스는 루드비히를 맡았다.
이들에겐 조력자들이 배속되어 있다. 그들과 잘 협조하면 차질없이 공사는 진행될 것이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면 데리러 올게.”
“네, 언제까지고 자기만을 기다릴게요.”
살짝 턱을 치켜든 성녀가 배시시 미소 짓는다.
“그럼 간다. 참, 종자 개량은 계속해서 신경 써줘.”
“그건 걱정 말고 잘 다녀오세요.”
쪽―!
현수의 입술이 성녀의 이마에 잠시 머물렀다.
“이건 잘 기다리라는 뜻이야.”
“……!”
몹시 부끄러운지 금방 얼굴이 붉어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의 입술이 달싹인다.
“텔레포트!”
샤르르르르릉―!
“아아……!”
성녀는 붉어진 뺨을 두 손으로 감싸며 나직한 신음을 토했다. 처음으로 한 애정 표시에 감탄한 것이다.
같은 시각, 현수의 신형은 바세른 산맥 깊숙한 곳에 나타났다.
“흐음, 여긴가?”
숲은 거의 쑥대밭 상태이다. 수많은 몬스터가 휩쓸고 지나간 흔적이다.
이 정도면 트롤이나 오거, 또는 미노타우르스나 드레이크같이 덩치 큰 몬스터가 여럿 있다는 뜻이다.
“근데 어디에 있지? 조용하네.”
몬스터들이 흑마법사들을 상대하고 있다면 소란스런 소리가 들릴 터인데 너무도 고요하다.
“플라이!”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단숨에 20m쯤 치솟아 오른다.
어찌 보면 영화에 나오는 슈퍼맨 같은 모습이다.
그런데 울창한 숲의 끄트머리만 보일 뿐이다. 나무의 키가 큰 까닭이다.
“조금 더 높이!”
의지를 갖자 또 솟아오른다. 이번엔 40m 높이쯤 된다.
“이런! 더 올라가야겠군.”
뜻을 품으니 몸이 저절로 반응하는 듯 스르르 떠오른다. 이번 높이는 대략 100m이다.
“흐음, 저쪽으로 갔군.”
몬스터들이 휩쓸고 지나간 흔적이 너무도 역력하기에 어디로 갔는지 확연히 드러난다.
방향을 확인하곤 곧바로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20여 분쯤 지났을 무렵이다.
크르르렁! 크렁! 캬아아! 크와앙! 캬르르르!
“다크 화이어! 다크 윈드 커터! 다크 프레어!”
쐐에엑―! 휘이이잉! 푸화하하학―!
눈대중으로 살펴보니 대략 20,000여 몬스터가 흑마법사 무리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다.
흑색 로브를 걸친 자들의 수효는 2,000 정도 되고, 그들의 지휘를 받는 스켈레톤, 좀비, 구울의 숫자는 40,000 정도 된다.
이 밖에 기사 200과 일반 병사 20,000여 명이 더 있다.
전장이 제법 넓기에 이리저리 시선을 돌렸다. 제니스를 찾으려는 의도이다. 그러던 중 눈에 뜨이는 인물이 있다.
“응? 저 여인은……!”
현수는 자신이 잘못 본 것은 아닌가 하며 눈을 비빈다.
기억이 확실하다면 몬스터들 뒤쪽 허공에서 열심히 주문을 외우고 있는 여인은 미판테 왕국의 아르가니 에이런 판 포인테스 후작의 손녀 케이트 에이런 판 포인테스이다.
그런데 그녀는 이곳에 있을 인물이 아니다. 포인테스 영지는 이곳으로부터 상당히 멀다. 여기까지 오려면 그야말로 산 넘고 물 건너 들판 지나치기를 수십 번 반복해야 한다.
그러는 동안 수많은 몬스터와 조우하게 된다. 또한 산적도 심심치 않게 만났을 것이다.
케이트는 겨우 3서클 마법사이기에 이런 난관을 모두 극복하고 이곳까지 올 수 없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케이트이다.
“뭐야, 이 상황은? 제니스가 폴리모프한 모습이 우연히 케이트와 똑같은 건가?”
현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눈빛을 빛낸다. 케이트에게서 드래곤만의 느낌이 전혀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그럼 설마 진짜 케이트? 근데 여기 왜 있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수많은 몬스터의 공격이 이어졌다. 스켈레톤과 구울, 좀비가 있는 쪽은 거의 대등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고, 이미 죽은 몸인지라 죽는 게 두렵다는 생각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팔이 떨어져 나가도, 다리가 잘려 나가도 몬스터들에게 다가가 병장기를 휘두른다.
당연히 몬스터들도 감당하기 힘들다.
반면 병사와 기사들이 있는 쪽은 형편없이 밀린다. 이쪽은 고통과 공포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전장의 뒤쪽에서 죽은 자들에게 마법을 구현시키는 흑마법사들을 보게 되었다. 시신의 숫자는 대략 10,000여 구이고, 흑마법사는 1,000여 명이다.
시체 곁에서 스태프를 든 팔을 벌린 채 뭐라 중얼거리는 모습이다. 잠시 후, 시체의 눈이 떠진다. 혈안이다.
실핏줄이 다 터진 듯하다. 땅을 짚더니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몸을 일으킨다.
그런데 행동이 약간 굼떠 보인다. 좀비가 된 것이다.
“저런 빌어먹을!”
죽은 자의 영면까지 방해하며 자신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 서슴없이 사술을 쓰는 흑마법사를 본 현수는 대노했다.
“아공간 오픈!”
아공간을 열고는 전장을 향해 달려갔다. 눈에 뜨이는 족족 그 속에 담기 시작했다.
오거, 트롤, 드레이크, 미노타우르스, 오크, 놀, 리자드맨 등등 온갖 종류의 몬스터가 산 채로 아공간 속에 빨려든다.
그렇게 몬스터들의 배후로부터 접근한 현수는 흑마법사 무리와 스텔레톤, 구울, 좀비 등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지체없이 소리쳤다.
“헬 파이어! 헬 파이어! 헬 파이어!”
콰르르르! 화르르르르르르륵―!
거대한 화염이 가장 먼저 흑마법사들을 덮친다. 곧이어 좀비와 구울 또한 시뻘건 화염세례를 받기 시작했다.
이것만으론 부족하다 여겼기에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파이어 퍼니쉬먼트(Fire Punishment)!”
생애 최초로 9서클 마법을 구현시켰다.
이것은 광범위한 화염의 징벌이다.
마법이 구현되자 땅이 갈라지면서 시뻘건 용암이 솟구쳐 오른다. 그와 동시에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 하늘에선 불비가 쏟아진다.
콰아아아! 화르르르르! 화르르르! 화르륵! 화르르르!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악의 무리이기에 모조리 불태우려는 의도에서 시전된 마법이다.
“아악! 뜨, 뜨거워! 사람 살려!”
“플라이! 아악! 이건 또 뭐야? 캐애액!”
“헉! 이, 이건……! 앗! 뜨거! 아아악!”
여기저기서 당혹성과 비명이 터져 나온다. 흑마법사들이 있던 곳이다.
스켈레튼과 좀비, 구울이 있던 곳은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다. 소리를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뜨거운 불길 속에서도 몬스터들에게 다가가려는 몸짓만 있을 뿐이다.
뼈다귀마저 불타오르자 모든 움직임이 멈춘다. 불과는 상극인 몬스터들은 물러선 채 어찌 된 영문인지를 살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