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5
포인테스 영지를 방문했던 날 케이트는 자신의 거처를 깨끗하게 청소케 하고 목욕재계를 마쳤다.
매지션 로드에게 몸을 바칠 생각을 품었던 것이다.
비록 하룻밤에 끝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일생의 광영이라 생각했다. 결혼 따위는 생각지도 않았기에 순결을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목욕을 마치고 나왔을 때, 아르가니 후작의 거처에선 대규모 마나 유동 현상이 빚어졌다. 현수가 준 힌트 덕에 6서클에서 7서클로 올라선 것이다.
“최초의 깨달음을 얻었던 것은 내가 마나라는 물속에 있다는 생각을 한 직후였네. 이토록 널려 있으니 마나를 굳이 몸에 담으려 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 알아들었나?”
지난 수십 년간 깨달음을 얻기를 고대하고 또 고대하던 조부이다. 그것이 이루어진 것이다.
기쁨에 넘친 케이트는 사방을 돌아다니며 현수를 찾았다. 보기만 하면 덥석 안아줄 생각이었다. 너무도 기쁜 나머지 매지션 로드에 대한 불경이라는 건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그런데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놓친 고기가 커 보이는 법이다.
그날 이후 케이트는 마음속에 현수를 품었다.
그리곤 위대한 매지션 로드와 자신 사이에서 태어났을지도 모를 아기를 생각했다.
나이가 얼마나 많은지는 모른다.
적어도 조부인 아르가니 후작보다는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생각을 한 이유는 겉보기엔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3장 중재를 부탁해!
아르가니 후작은 7서클 대마법사가 되었다.
그가 가장 먼저 익힌 건 텔레포트 마법이다.
한순간에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는 이 마법을 익히길 가장 원한 때문이다.
처음엔 물건을 이동시켰다. 집무실에서 정원으로, 정원에서 마구간으로 옮겨보았다. 실수가 잦아 중간에 물건이 사라지거나 파괴된 채 나타나곤 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고심하고 또 고심한 끝에 마법을 완성시켰다. 다음엔 살아 있는 생물을 이동시켰다.
처음엔 토끼였다. 다음은 개다. 그리곤 더 큰 말을 이동시켜 보았다. 한 번도 실수하지 않고 성공했다.
텔레포트 마법을 완벽하게 마스터한 것이다.
이때 케이트가 본인을 수도로 보내달라는 청을 했다. 도보로 가면 보름 이상 걸리는 길이다.
가는 동안 수많은 산적과 몬스터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럼에 텔레포트 마법으로 이동하면 순식간에 원하는 장소까지 이동할 수 있으니 그런 청을 한 것이다.
아르가니 후작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곤 수도의 좌표를 찾았다. 대륙좌표일람의 사본이 있었던 것이다.
확인된 좌표를 설정하곤 곧바로 텔레포트 마법을 구현시켰다. 아르가니 후작은 눈앞에서 손녀가 사라지는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멀고 먼 여정을 단숨에 갈 수 있게 했으니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이때 좌표집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아르가니의 입에서 당혹성이 터져 나왔다.
좌표 입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때문이다.
현수가 그러했듯 한 줄 아래의 것을 입력한 것이다. 황급히 손녀를 어디로 보낸 것인지를 확인해 보았다.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바세른 산맥 한가운데이다.
이 좌표는 대륙좌표일람을 만든 마법사가 몬스터들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곳이다.
이곳에서 쉬던 중 드레이크를 만났던 것이다.
당시의 마법사는 7서클이었음에도 암수 한 쌍 드레이크를 만나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하여 몹시 위험한 곳으로 표기해 두었다. 실수로도 이곳엔 가면 안 된다는 표시를 해두었다.
그런데 그곳으로 사랑하는 손녀를 보내 버린 것이다.
아르가니는 잘못 본 눈을 뽑아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손녀는 이미 사라졌다.
어쨌든 손녀의 뒤를 따라 이동하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많은 마나가 사용되었는지라 그럴 수 없었다.
꼬박 이틀 동안 마나를 모은 아르가니 후작은 케이트가 갔던 곳으로 텔레포트했다.
도착 즉시 주변을 샅샅이 뒤진 아르가니 후작은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손녀의 겉옷이 발견된 것이다. 갈기갈기 찢겨 있었으며, 말라붙은 피가 묻어 있었다.
몬스터의 먹이가 되어버린 듯하다. 후작은 사흘간 머물면서 수색했다. 혹시라도 살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대규모 몬스터 집단을 발견했다.
오거 150마리, 트롤 127마리, 드레이크 16마리, 미노타우르스 34마리, 오크 2,000여 마리, 고블린 8,000여 마리 등이 우글거리고 있다.
이들을 발견한 직후 깊은 한숨을 쉬고 텔레포트했다. 7서클 마법사이지만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포인테스 성으로 되돌아간 후작은 식음을 전폐하고 자리에 누웠다. 본인의 실수로 사랑하는 손녀를 잃은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잘못된 좌표 입력으로 숲에 당도한 케이트는 처음엔 몹시 당황해했다.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것이다.
갑자기 몸에서 열이 난다. 하여 겉옷을 벗었다. 그리곤 도착 장소가 어딘지 가늠하려 돌아다녔다.
그러다 피곤하여 잠시 나무에 등을 기댄 채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움직일 때 겉옷을 두고 갔다.
케이트가 숲 속으로 사라지고 난 뒤 늑대 몇 마리가 나타났다. 녀석들은 케이트의 옷에서 나는 냄새를 맡았다.
그리곤 머리를 들어 케이트가 사라진 방향으로 이동하려 했다. 그 순간 커다란 몽둥이가 떨어져 내렸다. 늑대의 뒤를 따른 오거가 후려갈긴 것이다.
퍼억! 캐앵!
단 한 방이다. 척추가 부러진 녀석이 즉사하자 곁에 있던 늑대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
늑대 다섯 마리가 상대할 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배가 고팠던 오거는 늑대를 집어 들고 숲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우적우적 씹어 삼켰다.
그날 이후 이곳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르가니 후작이 본 것은 늑대의 피였던 것이다.
아무튼 숲 속에서 길을 잃고 배회하던 케이트는 몬스터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처했다. 그때 제니스에 의해 구함을 받았다. 그리곤 자질을 인정받아 제자가 된 것이다.
오늘 이곳에 케이트가 있는 이유는 몬스터 몰이를 하기 위함이다. 제니스의 소변이 담긴 플라스크를 들고 하늘에 떠 있으면서 이들을 조종했던 것이다.
플라이 마법은 제니스가 만들어준 아티팩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쨌거나 케이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서 대답해 달라는 표정이다.
“그러는 케이트는 여기에 웬일이야?”
“저요? 전 스승님이 몬스터들을 몰라고 해서…….”
케이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현수의 뇌리를 스친 상념 때문이다.
“그럼 제니스가 케이트의 스승인 거야?”
“네에? 어, 어떻게……? 혹시 저희 스승님을 아세요? 그, 근데 위대한 존재라는 것도 아시는 거예요?”
현수가 제니스의 이름을 너무 함부로 불렀다는 느낌을 받은 때문에 우려되어 한 말이다.
그렇기에 말을 하면서도 사방을 둘러본다. 혹시라도 스승이 근처에 있다면 경을 칠 일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럼 알지. 여긴 제니스를 만나기 위해 온 거야.”
“그, 그럼 라이세뮤리안님도 아세요?”
“당연히 알지. 포인테스 영지에 같이 갔었잖아.”
“아! 그럼 그때…….”
케이트는 제니스에게 구함을 받은 직후 라세안을 보았다. 그때는 폴리모프한 상태가 아니라 본체였다.
말 안 듣는 드레이크들을 위협하기 위함이다.
그렇기에 라이세뮤리안이 현수와 같이 왔던 인물인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그때 같이 갔던 친구지. 그나저나 제니스는 어디에 있어?”
“저어, 마탑주님!”
“왜?”
“마탑주님께서 라이세뮤리안님과 친하신 건 알지만 제 스승님을 그렇게 함부로 부르시다간……. 혹시 아세요? 스승님의 오라버니가 드래곤 로드님이시라는걸.”
케이트는 여전히 조심스런 표정이다. 드래곤의 심기를 어지럽혀 좋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알아. 그래서 제니스를 만나러 온 거야. 근데 안 보이네. 지금 어디에 있지?”
“스승님이요?”
“그래.”
“아마 내일쯤 오실…….”
케이트의 말은 중간에 잘렸다. 마나 유동과 동시에 제니스의 신형이 나타난 때문이다.
“하인스! 여긴 웬일이지?”
“어머! 두 분이 서로 아시는 사이예요? 근데 스승님은 어쩐 일이세요? 오늘 못 오신다고 했잖아요.”
케이트가 어리둥절할 때 제니스의 말이 이어졌다.
“케이트 때문에 왔나?”
“케이트 때문이라니? 난 여기 있는 줄도 몰랐어.”
“그럼 여긴 무슨 일이지?”
“드래곤 로드 때문이야.”
“옥시온케리안 말인가?”
제니스가 슬쩍 미간을 좁힌다.
쌍둥이로 태어나 오랫동안 같이 지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서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용무를 말했다.
“그래. 제니스가 중재 좀 해줬으면 해서.”
이번엔 제니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내가 중재? 무슨 일로?”
“내 영지가 로드의 영역과 겹치나 봐.”
“겹치는 게 아니라 하인스가 그의 영역을 침범한 거야. 그 땅은 지난 수천 년 동안 옥시온케리안의 영역이었으니까.”
“그래? 그건 그럴 수도 있겠군. 아무튼 내가 자리를 잡으려는 곳에서 나가라고 하네.”
“당연하지. 자신의 영역을 침범 당했으니.”
제니스의 고개가 위아래로 크게 끄덕여진다. 인간이 감히 드래곤 로드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근데 갈 데가 없어. 그러니 거기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제니스가 힘 좀 써주면 안 될까?”
“내가?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제니스는 새침한 표정이다. 전에 현수에게 당했던 생각에 치가 떨린 때문이다.
시쳇말로 쪽팔려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현수에게 당한 후 너무도 분통이 터져 눈물을 질질 짠 것이다.
태어난 이래 초유의 일이다.
비교적 냉정한 성품을 타고나기에 부모 드래곤이 세상을 떠나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어쨌거나 현수에게 두들겨 맞고 아파서 울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에게 매 맞고 눈물 흘린 드래곤이 된 것이다.
매까지 맞았는데 중간에 나서서 도우라 하니 마뜩치 않다. 하여 새침한 표정인 것이다.
이런 속내를 어찌 짐작하지 못하겠는가!
현수는 시니컬한 표정을 지었다.
“뭐 안 된다면 할 수 없지. 힘으로 꺾으면 되니까. 그나저나 대륙에 드래곤의 개체수는 얼마나 돼?”
“그건… 왜 묻지?”
“드래곤 로드와 싸우면 다 덤빈다면서. 나도 준비를 좀 해야 하거든. 혹시 라세안으로부터 들은 거 없어?”
“라세안으로부터 들은 거? 뭐?”
제니스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지 감이 잡히지 않은 때문이다.
“내게 핵배낭이라는 게 있어. 그걸 몇 개나 준비해야 하나 해서. 설마 개체수가 100을 넘고 그러는 건 아니지?”
“……!”
제니스는 핵배낭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현수에게 호되게 당한 이후 침울해 있을 때 들은 이야기이다.
그 정도 당한 걸 다행으로 여기라는 뜻으로 해준 말이다. 그때 각종 미사일과 핵배낭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거 하나면 웬만한 산 하나는 평지가 되어버린다고 했을 때 말도 안 된다고 했다.
드래곤도 단숨에 그럴 순 없기 때문이다.
그때 라세안은 손바닥의 상처를 보여주었다. K―6 중기관총에 당한 흔적이다.
제니스는 라세안의 상처를 보고 크게 놀랐다. 드래곤은 본체일 때가 폴리모프 상태보다 훨씬 강하다.
그리고 드래곤의 비늘은 소드 마스터라 할지라도 상처 내는 게 쉽지 않다. 그런데 움푹 파인 걸 본 것이다.
“뭐 개체수가 100을 넘어도 그만이긴 해. 그거보다 더 강력한 것도 있으니까. 핵미사일이라는 게 있거든. 한번 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