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7
“좋아요. 당신의 부탁을 받아들이죠. 옥시온케리안에게 이실리프 자치령을 인정하라고 말하겠어요. 물론 받아들이고 말고는 그의 선택이겠지요.”
“그래, 그 정도만 나서줘도 돼.”
현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옥시온케리안은 제니스가 말을 한다 해도 금방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네이팜탄보다 10억 배쯤 강력한 무기가 있다고 하면 이곳으로 오게 될 것이다.
와서 현장을 확인하면 생각을 달리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위력시위를 한 것이다.
수호룡 선포는 본인의 의지로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스승이 부탁한 공국의 안위는 이제 해결된 셈이다.
이 세상 어느 제국도 드래곤 두 마리가 수호하는 나라를 치려 하는 우매한 짓은 벌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호룡 선포도 하죠. 대신 내 조건은 당신이 케이트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거예요.”
“엥? 뭐라고? 뭘 어떻게 해?”
“스, 스승님!”
“헐!”
라세안과 케이트, 그리고 현수 모두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요구였던 때문이다.
제니스는 이런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듯 케이트에게 시선을 돌린다.
“왜? 너는 마탑주가 싫으냐?”
단도직입적이고 분명한 물음이다. 케이트의 두 볼은 어느새 빨갛게 달아올라 있다. 무언가를 상상한 모양이다.
하룻밤 상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 인생 전체를 함께한다고 생각을 한 케이트는 달아오르는 뺨을 두 손으로 덮었다. 그리곤 고함치듯 대답한다.
“아, 아뇨! 시, 싫지는 않아요! 아뇨! 싫지 않은 게 아니라 좋아요! 저 시집가고 싶어요.”
“자, 이 아인 좋다는군요. 이제 어쩌시렵니까?”
제니스는 더 이상의 양보는 없다는 듯 단호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같은 순간 현수는 당황스러움을 느끼고 있다.
제니스의 요구도 요구지만 케이트의 반응 또한 그러하다.
둘이 얼굴을 마주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게다가 첫 대면 때 케이트는 몹시 당돌했다.
당연히 뭔 망발이냐면서 펄쩍 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좋단다.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고는 빤히 바라보고 있다. 어서 고개를 끄덕이라는 표정이다.
‘헐! 이게 무슨…….’
내심 어이없어 할 때 라세안의 전음이 있었다.
‘이보게, 친구! 벌써 쓱싹했으면서 왜 대답을 안 해? 너무 좋아서? 고개만 끄덕이면 이제 제니스가 반쯤 장모가 되는 셈이네. 케이트의 스승이니까. 어서 좋다고 해.’
그러고 보니 라세안을 떼어놓고 지구에 다녀오려 했을 때 이런 대화를 했다.
“나 어딜 좀 다녀오겠네. 자넨 이곳 상황 좀 알아봐 주겠나?”
“어딜 가려는데?”
“응, 점찍은 거 잘 있나 보러 가려 하네.”
“아! 그거…….”
그때 라세안은 현수가 케이트를 접수하러 가려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기에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일 마치고 복귀했을 때엔 이런 대화를 했다.
“어휴! 피곤해.”
“이봐, 뭘 하다 온 거야? 새로 살림 차리느라 그렇게 힘들었어? 점찍었던 케이트를 쓱싹하고 온 거지? 그런 거지?”
“으이그, 하여간! 미안. 좀 늦었어.”
“어땠어? 좋았어? 삼삼했지? 그치?”
“삼삼하긴… 그저 그랬네.”
“그래도 괜찮았지? 그랬나?”
“그래! 그랬으니까 이제 더 묻지 마!”
누가 들어도 케이트가 접수된 것으로 들릴 말이다.
그날 이후 라세안은 자신이니까 케이트를 양보한 것이라면서 엄청 생색냈다.
어쨌거나 라세안에게 있어 케이트는 이미 현수에게 접수된 여인이다. 따라서 제니스의 요구는 누워서 떡 먹는 것처럼 쉽게 들어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답하지 않고 머뭇거리자 혹시라도 제니스의 마음이 변해 다른 걸 요구할까 싶어 전음을 보낸 것이다.
같은 순간, 제니스는 심유한 눈빛으로 현수를 바라보고 있다. 내심이 어떤지 짐작해 보려는 것이다.
처음 케이트를 발견했을 때 그녀는 경각지경에 처해 있었다. 뒤쪽에서 트롤 한 마리가 살금살금 다가가고 있어 몹시 위급한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때 라세안의 다음과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어라! 케이트 잖아. 하인스의 여자가 여긴 왜……?”
그 순간 제니스의 생각은 정리되었다. 하여 그 즉시 트롤을 쫓아내고 케이트를 구했다.
감사의 뜻을 전하는 케이트를 바라보던 제니스는 눈빛을 빛냈다. 인간치고는 마나 감응도가 뛰어난데다 화후 또한 높아 호기심이 생긴 것이다.
하여 이것저것 물어보았고, 제자로 받아들였다.
여기엔 두 가지 안배가 있다.
하나는 유희이다. 재질 뛰어난 인간의 마법 스승이 되어 한동안 시간을 보내보려는 것이다.
두 번째는 현수이다.
케이트는 현수의 여자라 하였다. 그런 케이트의 스승이 되면 자신은 반쯤 장모가 된다. 제자의 남편이 되기 때문이다.
라세안과 함께하는 동안 현수는 자신과 관련 있는 인물들을 살뜰히 챙긴다고 들었다.
매지션 로드이며 그랜드 마스터이지만 카이로시아의 가족과 로잘린의 부모에게 아주 잘해준다는 것이다.
사회적 신분과 작위에 관계없이 배우자의 부모에겐 효도를 하는 것이 코리아 제국의 법도이기 때문이란다.
따라서 케이트의 자리가 확고해지면 현수로부터 반쯤 효도를 받는 위치가 된다.
앞으로 평생 동안 공경을 받는 일만 남은 것이다.
이는 두들겨 맞은 치욕스런 과거를 지우는 일이 될 것이다. 아울러 드래곤으로서의 체면도 서는 길이다.
그렇기에 이런 요구를 했는데 대꾸가 없다.
슬쩍 오기가 돋는다.
“싫으면 마세요. 옥시온케리안과 싸우든 말든 난 상관 안 할 테니까요. 그리고 미리 말해두지만 내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언젠가 아드리안 왕궁에 브레스를 쏘아드리죠.”
“……!”
시선이 마주치자 기다렸다는 듯 말을 잇는다.
“내가 하인스보다 훨씬 오래 살 테니까요.”
이건 확실하다. 현재 현수의 기대 수명은 1,200년이다.
가이아 여신의 가호를 받는 가운데 신성력으로 인한 또 한 번의 바디체인지를 경험한 결과이다.
신성력으로 인한 바디체인지는 마나로 인한 것보다 더한 효과가 있다.
질병에 걸리지 않는 것과 수명이 연장되는 것, 모든 부조화가 바로잡히는 것 이외에 어떠한 불결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다 썩은 물이라 할지라도 손가락 하나를 담그고 신성력을 뿜어내면 이 세상 어떤 약수보다도 깨끗한 물로 정화된다.
지구를 예로 들자면, 일본 후쿠시마 원전 지하수의 방사성 물질은 기준치의 71,000배에 달한다.
2013년 11월에 측정한 결과에 의하면 제1원자력발전소의 관측용 우물 지하수에서 스트론튬908) 등 베타선을 방출하는 방사성 물질이 1ℓ당 71만 베크렐9)의 농도로 검출되었다.
참고로 1ℓ당 10베크렐이 기준치이다.
현수가 이 물에 손을 담고 신성력을 뿜어내면 기준치 이하로 완벽하게 정화된다.
현재의 능력으론 최대 10톤 정도를 정화시킬 수 있다.
라이셔 제국 신전농장에서 신성력 세례를 받을 때 가이아 여신은 다음과 같은 뜻을 전했다.
너는 내가 간택한 내 딸의 배우자!
선택받은 인간이여!
누릴 수 있는 모든 복락을 누리며 살지니 내 딸을 잘 보살펴 내 뜻이 세상에 널리 퍼지도록 하라.
나의 뜻에 따를 때 네 세상에도 나의 힘이 미치리라.
현수는 가이아 여신의 뜻에 따라 성녀를 아내로 맞이하기로 했다. 하여 지구에서도 신성력을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쨌거나 혼자 하면 고작 10톤이 정화되지만 성녀와 함께라면 단숨에 500톤으로 양이 늘어난다.
성녀와 최초 합방 시 가이아 여신은 둘을 축복하는 의미로 또 한 번의 신성력 세례를 베풀 예정이다.
그 이후라면 현수 혼자 100톤, 둘은 5,000톤 정도를 정화시킬 수 있게 된다.
신성력이 고갈되면 기도를 통해 재충전시킬 수 있다. 그러면 추가 정화작업이 가능해진다.
물론 오염된 지하수의 양이 많을 테니 모두 정화하려면 어마어마한 신성력이 필요할 것이다.
어쨌거나 현수의 올해 나이는 서른이다.
이제 1,170년이 남았다. 문제는 제니스가 훨씬 더 오래 살 것이라는 것이다.
앙심이 오래간다면 언젠가 아드리안 공국뿐만 아니라 애써 가꾼 이실리프 자치령에도 브레스를 뿜어댈 수 있다.
그 결과 끔찍한 참상이 빚어지게 될 것이다.
아드리안 공국이야 그렇다 쳐도 이실리프 자치령엔 후손이나 제자들이 살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당하는 것을 어찌 두고만 보겠는가!
하여 제니스를 이 자리에서 소멸시키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라세안이 빤히 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드래곤 로드와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제니스를 소멸시키면 로드가 나설 것이다. 그와 대립각을 세우면 모든 드래곤이 공격할 것이다.
다 죽일 수야 있겠지만 피해가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껏 공들인 이실리프 자치령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고, 아드리안 공국은 박살 날 것이다.
‘휴우! 하는 수 없지.’
현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상상하기 싫은 일들을 떨궈내기 위함이다. 이때 결정적인 전음이 들린다.
‘이보게, 친구! 설마 케이트 싫어진 거야? 그럼 내가 자네 대신 케이트를 차지해도…….’
라세안의 전음에 현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곤 제니스를 바라보며 선언하듯 대꾸했다.
“그러지. 케이트를 아내로 맞아들이겠어.”
케이트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해진다. 쉽지 않을 것이라 여긴 일이 너무도 쉽게 성사된 듯해서이다.
제니스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어린다.
“내가 케이트의 스승이라는 건 알죠?”
아주 공손한 존댓말이다. 그리고 긴 말은 아니지만 담긴 뜻도 확실하다.
“…네, 압니다.”
“우리 앞으로 잘 지내요.”
“그럼요. 앞으로도 케이트를 잘 부탁드립니다.”
현수의 말도 존댓말로 바뀌어 있다. 아내의 스승이니 말을 높여주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호호! 호호호호! 옥시온 문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예요. 드래곤 로드이기는 하지만 내 말은 잘 들어주니까요.”
현수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또 다른 신전 하나를 골라 왕창 싸줄 수 있다고 협박할 생각이다.
그러면 드래곤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다. 그게 골치 아파서라도 양보할 것이라는 걸 알기에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잘 부탁드립니다.”
“당연하죠. 근데 우리 케이트는 언제 데려가실 건가요?”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겐 아내들이 있습니다. 각각의 아내들과 결혼식을 올린 후 데려가죠.”
“너무 늦지 않기를 바라요.”
약속만 해놓고 100년 후쯤 나타날 수 있기에 한 말이다.
“장부의 일언은 중천금과 같습니다. 이실리프 자치령이 완성될 즈음이면 될 겁니다.”
“그럼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겠군요. 그동안 케이트에게 신부 수업을 시키죠.”
“네, 감사합니다.”
현수는 정중히 고개를 숙여주었다. 더 이상의 강짜를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데 드래곤 로드와의 일은 언제…….”
현수의 말은 중간에 끊겼다.
“지금 바로 가죠. 케이트, 이리 와!”
“네? 아, 네.”
케이트가 가까이 다가서자 제니스의 입술이 달싹인다.
“텔레포트!”
샤르르르르릉―!
둘의 신형이 사라지자 라세안이 입맛을 다신다. 몹시 아깝다는 표정이다. 지금껏 수많은 여인을 품었다.
개중엔 제국의 공주도 있다. 일일이 세어보지 않아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최소 200명은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