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8
그중 케이트만큼 아름다운 여자는 드물었다. 그렇기에 현수가 마땅해하지 않으면 날름 하려는 생각을 품었던 것이다.
“자넨 좋겠어!”
“좋기는 개뿔! 말도 안 되는 조건이었잖아. 어떻게 케이트를 아내로 맞아들이라는 걸 조건으로 내걸지?”
“속으론 좋으면서. 그나저나 나도 부탁하지.”
“그래? 결정되었어? 해봐. 뭐든 들어줄 테니.”
대체 어떤 부탁을 하려는지 들어나 보자는 표정이다.
“남아일언중천금, 장부일언중천금이라는 말 확실한 거지?”
“대체 무슨 부탁을 하려고 다짐을 요구하는 건가?”
현수의 말은 묵살되었다.
“확실하냐고?”
“확실해! 다만 카이로시아나 로잘린, 그리고 성녀나 케이트와 헤어지라는 건 안 돼. 그 밖의 것은 들어줄게.”
현수의 말이 떨어지자 라세안의 고개가 끄덕여진다.
“뭐어? 성녀도 낼름 했어? 하긴……. 능력 있으니. 좋아, 내 부탁은 다프네도 아내로 맞아들이라는 거야.”
“뭐? 다프네를? 혼돈의 숲을 안내해 줬던?”
“그래, 그 다프네도 아내로 받아들여.”
“라세안! 자네 혹시 열 있어? 대체 다프네는 왜?”
“……!”
라세안은 대꾸 대신 빤히 바라보기만 한다.
“대체 왜? 혹시 내가 아니라고 하면 가서 그녀라도 쓱싹하려고? 설마 그런 거야?”
현수의 말투가 라세안과 비슷해졌다.
“그건 알 필요 없고, 어떻게 할 거야? 다프네도 아내로 맞이할 거지? 무슨 부탁이든 다 들어준다고 했잖아.”
라세안은 제법 오랜 시간을 같이해서 그런지 제니스같이 협박하진 않았다. 대신 빤히 바라본다.
남자로서 내뱉은 말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표정이다.
“다프네가 예쁜 아가씨인 건 인정해. 하지만 나는 그녀에 대해 애정이 조금도 없어.”
어떻게든 모면하려는 말이다.
“처음부터 죽고 못 사는 사이는 없지. 살다 보면 조금씩 애정이 샘솟을 수도 있는 거니까. 안 그래?”
라세안은 긴말하지 않는다. 또 바라만 볼 뿐이다. 네 입에서 어떤 소리가 나올지 기대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휴우! 대체 왜 내게…….”
현수는 잠시 고뇌에 찬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면 염복10)이 아니라 여난11)이다.
카이로시아와 로잘린, 그리고 성녀까지는 조화롭게 컨트롤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두가 지나치리만치 순종적이니 한쪽만 편애하지 않으면 된다.
여기에 케이트와 다프네까지 포함되면 다섯이나 된다.
코리아 제국의 백작이라 뻥을 쳤으니 다섯 명의 부인까지 둘 수 있다. 따라서 이곳에선 손가락질 당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양심상 다섯이나 되는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다는 것에 대해 심리적 거부감이 있다.
하여 어떻게든 현 상황을 모면하고 싶다. 그런데 라세안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다프네를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하면 아드리안 공국, 아니, 아드리안 왕국뿐만 아니라 이실리프 자치령 또한 수호하겠다고 선언해 주지.”
“…대체 왜? 다프네와 무슨 관계 있나?”
이실리프 자치령에 대한 수호 선언도 해주면 좋다.
라세안이 마나의 품으로 돌아가는 그때까지 후손들의 안녕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하여 무슨 의도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세안의 말이 이어진다.
“드래곤 로드와의 중재에도 나서겠네.”
“진짜?”
라세안이 나서주기만 한다면 제니스 혼자일 때보다 더 확실할 것이다.
“자네와 다프네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이와 그 아이의 후손들이 바라는 게 있다면 세 가지는 들어주겠네.”
드래곤은 결코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이라도 맹약이 된다.
다시 말해 한번 한 말은 반드시 지킨다. 남아일언중천금 따위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무게감이 있다는 뜻이다.
“나와 다프네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이와 그 후손들의 소원 세 가지를 들어주겠다고? 자네가 대체 왜……?”
이 말을 아주 밀접한 관계로 지내겠다는 뜻이다. 현수는 왜 이런 시키지도 않은 말을 하느냐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하나 라세안은 바라만 볼 뿐이다. 이제 네 차례이니 네 뜻을 밝히라는 표정이다.
“…좋아, 다프네도 아내로 맞아들이겠네.”
“남아일언은?”
“중천금이네.”
라세안의 말을 현수가 받았다. 그러자 손을 내민다. 현수에게 배운 악수를 하자는 뜻이다.
하여 굳은 악수를 나누며 물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다프네인가? 자네가 예쁘다고 칭찬을 그렇게 해놓고서.”
왜 직접 쓱싹하지 않고 본인에게 넘기냐는 뜻이다. 이에 라세안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다.
“결혼하고 첫날밤을 지내면 그때 알려주지. 그나저나 자네가 내 부탁을 들어주었으니 나도 자네의 청을 들어줘야지. 로드에게 다녀오겠네. 텔레포트!”
샤르르르르릉―!
라세안의 신형 또한 사라졌다.
“허∼! 대체 왜……. 그나저나 큰일이네. 로시아와 로잘린에게 뭐라 말하지? 크으, 설상가상이 되어버렸네.”
나직이 중얼거리며 몸을 돌렸다. 브론테 왕국의 기사와 병사들이 여전히 무릎 꿇은 채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
도망치면 죽음이라는 생각이 전염병처럼 번져 있기에 어느 누구도 도주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
잠시 기사와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기사 200명에 병사 20,000명이다.
“모두 들어라! 나는 이실리프 마탑의 마탑주이다!”
“……!”
모두들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이다.
아수라 같던 흑마법사들을 추풍낙엽처럼 쓸어버린 실력이다. 하여 벌써부터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희 중 대표는 누구인가?”
현수의 말이 떨어지자 선두에 있던 기사가 크게 고개를 조아리며 대꾸한다,
“소, 소인 테피라 몬데스가 이들의 수장이옵니다.”
“좋아, 자리에서 일어서게. 그대는 기사인가?”
얼른 일어서며 공손히 고개를 조아린다.
“그러하옵니다. 헤리온 자작가의 기사이옵니다.”
“브론테 왕국은 흑마법사에 의해 장악되었다 들었다. 그 내용을 소상히 고하라.”
“네, 마탑주님! 저희 브른테 왕국은…….”
잠시 기사 테피라 몬데스의 말이 이어졌다.
소상공인이 나라에 활력을 불어넣던 브론테 왕국엔 알칸 대공이라는 자가 있다.
국왕은 국사를 결정함에 있어 늘 그의 의견을 물었다. 그가 국사(國師)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알칸 대공은 국왕의 스승이다. 그렇기에 행정 요직엔 알칸 대공의 사람들이 박혀 있다.
물론 흑마법사들이다. 이렇게 되어 멀쩡하던 나라가 흑마법사의 천하로 바뀐 것이다.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귀족들은 알칸 대공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다. 국왕친림패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알칸 대공은 귀족들로 하여금 영지 병력을 이끌고 다른 나라를 침공하도록 했다.
그곳에서 재물과 곡식을 약탈해야 했고, 흑마법사의 실험체가 될 포로들도 잡아와야 했다.
안 그러면 귀족 일가가 그 일을 대신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범 케이스로 지시를 따르지 않던 귀족 일가를 좀비와 구울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현재 모든 귀족가의 행정관은 흑마법사이다.
브론테 왕국 수도의 아카데미에선 흑마법을 가르치고 있다. 그렇기에 모든 인력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귀족이라는 허울만 남겨놓은 것이다. 그렇기에 알칸 대공의 명령을 따라야 했다.
이곳에 온 병력은 헤리온 자작가와 이웃 영지인 라르센 자작가, 그리고 호프만 남작가의 기사와 병사들이다.
헤리온 자작, 라르센 자작, 그리고 호프만 남작은 조금 전 몬스터들과의 혈전 때 모두 사망했다.
테피라는 이들 영지 기사 중 가장 연장자이다. 그렇기에 본인이 대표라고 나선 것이다.
테피라 등은 영주의 출동 명령을 받고 이곳에 왔다. 무지막지하다 해도 좋을 몬스터들의 습격을 저지하기 위함이다,
어제 도착하였고, 아침부터 혈전을 벌였다고 한다.
테피라의 말에 의하면 흑마법사의 수는 아직도 10,000여 명이 더 있다. 현재는 2,000명 단위로 묶여 몬스터들에 대항하는 중이다.
“그럼 현재의 영지엔 흑마법사들이 없다는 건가?”
“극소수 필수 인원만 남아 있고 대부분 차출된 상태입니다. 매지션 로드께서 제거하신 흑마법사들도 저희 영지 행정관들입니다.”
“흐음! 그래? 그럼…….”
현수는 테피라와의 대화를 조금 더 이어갔다. 그 결과 이들 모두 어쩔 수 없이 나서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너희 모두 영지로 되돌아가라. 브론테 왕국을 떠나겠다면 가족을 이끌고 테리안 왕국을 통해 이실리프 자치령으로 오도록 하라.”
“……!”
현수의 말에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꼼짝없이 죽을 일만 남았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내 영지엔 드리튼 백작과 영지민이 이미 당도하여 있다. 내 영지 개발에 힘을 보태라. 그 일이 끝나면 너희에게 자유를 줄 것이다.”
이실리프 자치령은 경기도 크기와 비슷하다.
그런데 영지민이 너무 적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찾아드는 유민의 대부분은 테리안 왕국 사람들이다.
그들을 지속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좋지 않다.
이곳은 노동력이 국가의 재산인 곳이기에 우호관계에 금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브론테 왕국은 없어져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 땅에 살았다 하여 모두가 악인은 아니다. 하여 살길을 열어주려는 것이다.
“저, 정말 저희를 받아주시는 겁니까?”
“내 영지에 오기만 하면 그리될 것이다. 강요하는 것은 아니니 잘 생각하여 판단하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테피라가 고개를 조아리며 사의를 표한다.
현재의 브론테 왕국은 온갖 불의가 판을 치고 있다. 흑마법사들이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줘야 하는 세상인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노동력과 재물뿐만이 아니다. 딸과 아내를 원하기도 한다.
그들의 뜻에 반하면 언제 어떻게 없어질지 모른다.
수년 전부터 실종되는 사람 수가 상당히 많은 것이 그 증거이다. 모르긴 해도 흑마법의 실험 재료로 쓰였다가 죽어선 좀비나 구울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떠나고 싶어도 갈 데가 없었으며, 흑마법사들의 감시를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이곳에 출동했던 거의 모든 흑마법사가 제거되었다.
영지에 남아 있는 흑마법사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들은 전투에 참여할 수 없을 정도로 저서클이다.
그들만 제거하면 가족들과 함께 불의의 땅을 탈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셈이다.
5장 더 이상은 안 돼요!
“이실리프 자치령에선 흑마법사와 관련된 자들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니 그리 알도록!”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사람 가려서 데려가겠습니다.”
“좋아, 이제 가게.”
“네, 감사합니다, 마탑주님!”
테피라를 비롯한 모든 기사와 병사들이 깊숙이 허리를 숙여 절을 한다. 이때 현수의 입술이 달싹인다.
“텔레포트!”
샤르르르릉―!
현수 또한 사라졌다.
“흐와아∼!”
“휴우우∼!”
모두들 긴 한숨을 쉰다.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다 살아나온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같은 시각, 제법 먼 곳까지 도주했던 몬스터들 사이에선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살육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제니스와 라세안, 그리고 현수가 사라지자 억눌렸던 흉성과 본능이 되살아난 까닭이다.
하여 오거와 트롤, 그리고 드레이크 같은 중상위 몬스터들이 오크와 고블린 같은 하위 몬스터들을 무차별적으로 잡아먹는 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브론테 왕국군은 슬그머니 전장을 이탈했다. 한시바삐 영지로 돌아가 가족들을 데리고 테리안 왕국으로 넘어가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