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0
“네에? 조건이요?”
드래곤이 인간의 부탁을 들어준다는 것도 믿을 수 없는데, 거꾸로 조건을 걸었다는 말에 눈이 동그랗게 변한다.
“응! 둘은 드래곤 로드와의 분쟁 조정뿐만 아니라 향후 이실리프 자치령을 수호하겠다고 해. 근데…….”
잠시 말을 끊자 어서 이야기하라는 듯 다가앉는다.
“근데 뭐요? 혹시 막대한 금은보화를 내놓으라고 해요?”
드래곤들이 천성적으로 반짝이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기에 묻는 말이다.
“아니.”
“그럼 신검 같은 병장기를 요구했어요?”
로시아의 표정이 약간 어둡다. 희대의 명검은 구하기도 어려울뿐더러 값도 막대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냐.”
“그럼요? 혹시…….”
로시아가 말끝을 흐린다. 드래곤이 어떤지 들은 바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혹시… 미녀를 대령하래요?”
로시아의 낯빛이 다소 창백해진다.
절세미녀를 내놓으라는 요구라면 어찌하나 싶은 것이다.
그건 자기들이 살기 위해 남을 사지로 몰아넣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그거라면 영지를 옮기는 건 어때요? 로이어 영지가 넓어지니까 그중 일부를 달라고 할게요.”
공작령 중 일부를 달라고 하면 기꺼이 줄 거라는 생각이다. 현수는 사위이기 이전에 이실리프 마탑주이기 때문이다.
“아니, 영지를 옮길 수는 없어. 근처에 이실리프 마탑이 있기 때문이야.”
“아……!”
로시아는 나직한 탄성을 낸다. 이실리프 마탑을 통째로 옮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 어쩌죠? 뭘 해달라고 하는데요?”
감당할 수 없는 일만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되었다.
“제니스케리안과 라이세뮤리안은 나더러 케이트와 다프네를 아내로 맞이하래.”
“네……? 뭐라고요?”
드래곤이 인간에게 할 요구라 하기엔 몹시 이상하다. 하여 순간적으로 뇌 기능이 꼬인 듯 멍한 표정이다.
“나더러 케이트와 다프테를 아내로 맞이하라는 거야.”
“혹시… 그 사람들 알아요?”
“알기는 해. 케이트는 미판테 왕국에서 현자라 부르는 아르가니 에이런 판 포인테스 후작의 손녀야.”
“그녀를 어떻게 알아요?”
“그곳을 지나치던 길에 잠시 본 적이 있어. 다프네는 라수스 협곡에 있는 혼돈의 숲을 안내해 줬던 길잡이이고.”
“그럼 드래곤이 아니고 인간이라는 말이지요?”
“그래. 둘 다 인간인 건 확실해.”
“그런데 왜 그들 둘을 자기더러 책임지래요?”
로시아는 심히 의아하다는 표정이다.
“케이트는 제니스의 제자야. 내가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면 제니스는 반쯤 장모가 되는 셈이야.”
“반쯤 장모요?”
“그래. 그러면 내가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되지.”
“자기가 위대한 존재를 함부로 대해요?”
로시아가 또 갸웃거린다.
인간이 어찌 중간계의 조율자이며, 마법의 조종이며, 위대한 존재인 드래곤을 함부로 대한단 말인가!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대체 어찌 된 영문이냐는 표정이다.
“사실 전에 제니스케리안과 한판 붙은 적이 있어.”
“네에? 드래곤과 싸웠다고요?”
“그래.”
“어머! 왜, 왜요?”
“말하자면 조금 긴데, 전에…….”
카트린느를 만난 것부터 시작하여 실종 사건까지 이야기했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 제니스와 다섯 시간에 걸친 혈투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몹시 놀란 표정이다.
“그, 그래서요?”
“내가 이겼지. 그게 몹시 억울했나 봐. 그래서 나한테 대접받으려고 케이트를 아내로 맞이하라고 요구한 것 같아.”
“세상에 맙소사……!”
로시아는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이 드래곤과 일대일로 붙어서 이겼다고 한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튼 제니스케리안은 그런 의미에서 케이트를 아내로 맞이하라는 것 같아.”
“그럼 다프네라는 아가씨는요? 그녀는 라이세뮤리안님의 제자인가요?”
“아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아. 나도 그 친구가 왜 그런 요구를 했는지 모르겠어.”
“네? 친구요? 라이세뮤리안님이 친구라고요?”
“응. 나하고 친구하기로 했어.”
“헐!”
드래곤과 싸워서 이겼다고 하고, 다른 드래곤과는 친구 먹었다는 말이 허무맹랑하게 들린다.
그렇기에 저도 모르게 탄성을 냈다.
“다프네는 라이세뮤리안이 다스리는 라수스 협곡 안에 있는 여자들만 사는 마을 주민인데…… 아! 혹시…….”
“왜요? 뭐 짚이는 게 있어요?”
“아무래도 라이세뮤리안의 딸 같아.”
“네? 그, 그럼 드래고니안인 건가요?”
“아마도. 근데 전혀 그런 걸 못 느꼈는데. 아, 그럼…….”
현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던 중 유전에 대한 생각을 했다. 부모로부터 형질을 물려받을 때 꼭 반반씩 받는 것은 아니다. 어느 한쪽으로 심하게 치우칠 수도 있다.
다프네는 인간 쪽 형질이 훨씬 강한 자손인 듯싶다.
“왜요?”
“생각해 보니 다프네가 라이세뮤리안의 딸이 분명한 거 같아. 그 친구도 날 대할 때 약간 껄끄러워하거든.”
“왜요?”
“그거야 내가 너무 세서 그렇지. 그래서 안전장치로 딸을 안기려는 것 같아.”
“헐!”
로시아는 할 말을 잃었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너무도 태연스레 자신이 강하다 하니 어이가 없는 것이다. 그러다 논점을 벗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묻는다.
“아무튼 케이트와 다프네 모두 받아들이실 건가요?”
“그게 말이야…….”
잠시 말을 잇지 못하자 카이로시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묻는다.
“받아들이세요. 드래곤 로드와 싸울 수는 없잖아요. 제니스케리안님과 싸워서 이기긴 했지만 로드는 더 강하잖아요.”
로시아는 심히 우려된다는 표정이다.
“그래서 대답은 그렇게 했어. 영지 개발이 한창이라.”
“잘하셨어요.”
“미안해, 로시아.”
현수는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솔직히 섭섭해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자기가 워낙 잘난 사람이라 그러는걸.”
“……!”
“맏언니 노릇 잘해볼게요. 제가 제대로 하지 못하거든 언제든지 말해주세요.”
로시아는 생각을 정리했다는 듯 굳은 표정이다.
“고마워. 잘할게. 이리 와.”
로시아의 교구를 끌어당겨 강하게 안아주었다.
“아무튼 이렇게 자기랑 있으니까 좋아요. 이제 날 떨어뜨려 놓지 않을 거죠?”
“그래. 가급적이면 그럴게.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현수는 로시아의 교구를 더 힘 있게 안아주었다.
“로잘린에게도 말은 해야지?”
“네, 그럼요. 참, 로니안 자작님 후작으로 승작하셔요.”
“후작?”
미판테 왕국엔 로잘린이 이실리프 마탑주의 부인이 된다는 소문이 번졌다.
두 달쯤 전 테세린은 케일론 영지의 영주 칼멘 후작의 공격을 받을 뻔했다. 그때 현수가 남긴 편지가 있었다.
테세린의 영토를 침범하면 케일론 성은 지도에서 지워질 것이다. 믿고 못 믿는 것은 네놈의 판단에 맡기노라.
― 이실리프 제2대 마탑주 하인스 멀린 킴 드 셰울.
추신) 엘리사에게 200골드를 내리도록 하라.
아울러 그 일가가 테세린으로 이주하도록 조치하라.
황급히 도주한 칼멘 후작은 느닷없는 마탑주의 등장 이유를 캤다. 사실을 알아야 사죄를 하던 다시 도모하던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케일론 영지에서 파견한 세작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6장 매지션 로드라 부르지 말라
초초특급 보고!
로니안 자작의 여식 로잘린과 이실리프 마탑주님 간의 혼인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절대로 군사를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테세린에 한 발짝이라도 발을 들이면 케일론은 끝입니다.
보고서를 읽은 칼멘 후작은 목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이후 가신들을 불러놓고 향후 테세린에 대해서는 어떠한 도발도 건의하거나, 행하지 말 것을 명했다.
그리고 즉각 왕실에 연락했다. 이실리프 마탑주가 로니안 자작의 사위가 됨을 알린 것이다.
소식을 접한 왕실에선 곧바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미판테 왕국엔 이실리프 마탑주가 남긴 분명한 흔적이 있다. 케발로 영지에서 시전된 헬파이어가 그것이다.
흔적만으로도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짐작될 정도이다. 헬 파이어가 직격된 곳의 땅은 유리질로 변해 있다.
초고열로 녹아버린 것이다. 이런 것이 기사단이나 병사들에게 퍼부어질 경우를 생각해 보면 끔찍하다.
할 수만 있다면 당연히 포용 1순위이다.
아드리안 공국을 침범했던 전과가 있기에 전전긍긍하던 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국 자작의 사위가 된다고 한다.
테세린 영지는 유카리안 영지와의 영지전에서 승리하였기에 백작으로 승작시키는 논의는 이미 끝난 상태이다.
명실상부한 변경백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실리프 마탑을 품에 안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 하여 논의 끝에 백작이 아닌 후작으로 한 계급 더 승차시키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그리곤 로니안 자작 일가를 수도로 불러들였다.
자작은 후작위를 받게 되고, 세실리아는 왕후와 돈독한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이실리프 마탑주라는 용을 품게 된 로잘린에겐 당연히 최상의 서비스가 부여될 것이다. 최고급 의복은 물론이고 최고급 장신구와 최고급 화장품 등으로 치장될 것이다.
미판테 왕국의 공주조차 부러워할 정도가 될 예정이다.
하여 로니안 자작과 세실리아 부인, 그리고 로잘린은 현재 미판테 왕국의 수도로 향하는 중이다. 모든 귀족이 보는 앞에서 승작식을 거행하겠다며 불러들인 때문이다.
“네, 후작이요. 한꺼번에 두 계급이나 승작하신 거죠.”
“고작 후작이라고?”
제국인 라이셔에서도 에델만 백작을 공작으로 두 계급 승차시켰다. 고작 왕국인 미판테에서 후작으로 때우려 한다는 생각을 했기에 물은 말이다.
“어머! 고작이라니요? 후작이에요, 후작! 공작 바로 아래요. 어머, 그러고 보니…….”
로시아가 말끝을 흐린다. 해놓고 보니 뭔가 이상해서이다. 제국보다도 못한 대우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뭐 이 나라에서 그렇게 한다니 내가 간여할 일을 아니지. 그나저나 라수스 협곡 때문에 수도로 가는 게 몹시 힘들 텐데 어떻게 가고 있지?”
남쪽으로 한참을 내려가 라수스 협곡이 끝나는 지점에 당도하면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러려면 엄청나게 먼 거리를 가야 한다.
아무런 사고가 없어도 최소 몇 달은 걸릴 여정이다.
“배를 타고 가셨어요.”
“배? 바벨 강엔 엘리터가 우글거리잖아?”
테리안 왕국에서 미판테 왕궁으로 건너올 때 직접 경험한 바 있기에 한 말이다.
“그래요. 그래서 세 척씩 묶어서 타고 갔어요. 그러면 배가 뒤집힐 일은 없으니까요.”
무슨 뜻인지 확실히 알아들었다. 하지만 걱정되는 건 여전하다. 엘리터가 얼마나 흉포한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 그래도 놈들이 워낙 많잖아. 특히 밤에는…….”
엘리터 역시 다른 몬스터들과 마찬가지로 야행성이다. 따라서 한밤중에 배 위로 기어오를 수 있다.
웬만한 도검으론 상처조차 입히지 못할 놈이니 그럴 경우 상당히 위험하다.
“네. 근데 크게 걱정 안 하셔도 될 거예요. 배는 매일 저녁마다 항구에 정박하니까요.”
로니안 자작은 승작하러 가는 중이다. 그렇기에 배를 타고 남하하는 동안 거의 모든 영지를 방문할 계획이다.
로니안 자작이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불편한 잠자리 때문이기도 하지만 훗날을 위함이다.
후작위를 받게 되면 중앙에서 국정에 관여하게 될 수도 있다. 그때 우호적인 반응을 얻기 위한 조치이다.
지금까지는 오로지 테세린의 보존과 개발에만 신경 썼지만 앞으론 그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