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4
“오러를 싣지 않고 순수한 힘으로만 쏘겠습니다. 사거리를 잘 보시죠.”
말을 마치곤 곧바로 시위를 당겼다. 바로 곁에 있던 후렌지아의 고개가 갸우뚱거린다.
빈 대롱에 아주 짧은 화살을 얹어서 당긴 때문이다.
피이잉―!
시위를 놓자 뭔가가 날아가는지 파공음이 들린다. 그런데 현수를 보니 화살이 그대로 있는 듯하다.
“……?”
퍼억―!
멀리 떨어진 나무에 뭔가가 박히면서 잎사귀가 떨어진다.
“……!”
자신들의 활로는 350m가 한계이다. 인간들이 사용하는 활의 사거리 200m보다 훨씬 길다.
하여 인간의 활을 우습게 알았다. 그런데 방금 현수가 쏜 화살은 무려 500m나 날아갔다.
어린 엘프들이나 쏠 자그마한 활의 위력치곤 대단하다.
“그, 그건 뭐죠?”
후렌지아의 물음에 현수가 빙그레 웃었다.
“내가 속한 나라의 전통 활입니다. 화살은 편전이라고도 하고 애깃살이라고도 하는 거죠.”
아공간에 담겨 있던 애깃살 하나를 꺼내 보여주었다. 물론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이다.
“저어, 그 활 좀 보여줄 수 있나요?”
“그러시죠.”
선선히 각궁과 통아, 그리고 애깃살을 넘겨주었다.
후렌지아는 서둘러 조금 전에 보았던 대로 통아에 애깃살을 놓고 시위를 당겨본다. 사위의 장력이 강한지 살짝 이맛살을 찌푸린다. 하여 잔뜩 힘주는 모습이다.
조준하고 발사했지만 애깃살은 몇 발짝 앞에 떨어진다.
“이건 왜……?”
“그건 발사 요령을 모르면 쏴지지 않는 활입니다.”
“아, 그래요? 그럼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알려 드리는 건 어렵지 않은데, 이런 활도 없으면서 왜?”
각궁은 물소 뿔 등 여러 재료가 혼합되어 만들어진다.
아르센 대륙엔 가장 중요한 물소가 없다. 그렇기에 만드는 방법을 알려줘도 제작이 불가능이다.
“그 활 우리에게 줄 수 없어요?”
컴파운드 보우는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다.
재료가 뭔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하지만 각궁은 제조 기법만 배우면 될 듯하다. 그렇기에 탐내는 것이다.
“내가 활을 주면 엘프주 제조 비법을 알려주실 겁니까?”
“……?”
다소 도발적인 어투이다. 그런데 후렌지아는 발끈하기는커녕 그래도 되느냐는 표정으로 족장을 바라본다.
이에 트렌시아 토들레아가 잠시 눈빛을 빛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후렌지아의 입술이 열린다.
“좋아요. 활의 제조 비법을 알려주면 우리도 엘프주 제조 비법을 알려드리지요.”
“……!”
설마 이런 대답을 할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기에 현수는 잠시 머뭇거렸다.
“으음! 아르센 대륙엔 없는 재료 때문에……. 차라리 활을 필요한 만큼 드리는 건 어떨까요?”
“우리 일족 모두가 쓸 만큼을 주겠다고요?”
“일족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100개 정도는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수는 각궁 명인으로부터 활을 받을 때 한숨과 더불어 재고가 제법 있음을 들은 바 있다.
2013년 8월, 각궁을 만드는 장인들은 35℃를 넘는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시위에 나선 바 있다.
궁시협회가 협회 공인을 받아야만 궁시를 판매할 수 있도록 관련 제도를 변경한 때문이다.
장인들 입장에선 이 제도가 비합리적인데다 명분도 없을뿐더러, 궁시 발전을 저해한다고 판단했다.
아무튼 협회는 궁시(弓矢)의 품질이나 규격 등은 무시한 채 가격 상한제를 일방적으로 정했다. 아울러 궁시를 구입한 궁도인들의 신상을 기록해 6개월마다 보고하라고 했다.
장인들 입장에선 다분히 강압적인 제도이다.
이런 공인인증제 시행 전만 해도 전통 활인 각궁은 65만 원 정도에 팔렸다.
그럼에도 협회는 55만 원을 가격 상한으로 정했다.
보다 많은 궁도인이 싼 가격에 궁시를 구입할 수 있게 한다는 취지이다.
시위에 나선 장인 가운데에는 무형문화재도 있다. 이들이 제작하는 것은 문화재가 될 확률이 매우 높다.
그럼에도 협회에서 일방적으로 가격 상한을 정한 것이다.
무형문화재 명인들은 그 가격으론 문화재 전수가 어렵다며 협회의 공인인증제를 거부했다.
그러자 이들의 ‘단합’은 ‘담합’으로 간주되었다.
결국 궁시 판로가 막혀 생계 수단이 끊긴 장인들은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사업을 아예 접거나 나이도 많은데 스트레스로 건강이 나빠진 회원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현수의 각궁을 만든 장인이 말하길, 하나를 만드는 데 대략 3,700여 번의 손이 간다고 했다.
그리고 약 100일이 소요되며, 부레풀을 이용해야 하기에 여름에는 만들 수 없다고 했다.
그때 현수가 매입한 가격은 70만 원이다.
55만 원밖에 받을 수 없다고 하였지만 활이 너무도 마음에 들어 더 준 것이다.
한편, 전에 맛본 엘프주는 가히 명품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맛과 향이 좋았다. 활 100개를 주면 7,000만 원이 들지만 그 정도는 얼마든지 지불할 용의가 있다.
“제조 비법은 알려줄 수 없는 건가요?”
“알려 드리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이곳에 없는 재료를 쓰는 것인지라…….”
현수가 말끝을 흐리자 족장이 나선다.
“그럼 아리아니님께 연락해 주시고 그 활은 120개를 주십시오.”
“……?”
“대신 엘프주 1,000병과 제조 비법을 알려 드리죠.”
“…좋습니다. 그러지요.”
현수가 지구에서의 버릇처럼 손을 내밀자 그건 대체 왜 내밀었느냐는 표정을 짓는다.
“아……!”
자신을 실책을 깨닫고는 계면쩍은 웃음을 지었다.
“아리아니에게는 뭐라 말해주면 될까요?”
“세계수가 시들고 있으니 살펴봐 달라고 요청해 주시면 됩니다.”
“좋습니다. 그러지요.”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족장의 얼굴에 미소가 어린다.
숲의 요정 아리아니라면 왜 시드는지 원인을 찾아낼 것이다. 나무에 관해선 신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간 속 썩이던 바가 해결될 것이기에 이제야 마음이 놓인 것이다.
“그럼 저희는 돌아가서 엘프주를 준비하겠습니다. 좋은 소식 부탁드립니다.”
족장과 엘프 일족이 우르르 일어서는 것을 보니 정말 다급한 마음에 왔다는 것이 느껴진다.
“…알겠습니다. 저도 곧바로 아리아니에게 가보지요. 아! 이 활 가져가십시오.”
현수는 각궁과 통아, 그리고 편전을 건네주었다.
이들과는 우호 관계가 형성되었다.
훗날이라도 이실리프 자치령에 문제가 발생되었을 때 도움이 되어달라는 뜻에서 건넨 것이다.
8장 새로운 종속 관계
‘흐음, 지구로 가면 각궁을 왕창 가져와야겠군.’
현수의 이런 생각 때문에 각궁 장인과 협회 사이의 알력은 단숨에 해소된다.
현수가 지구로 가서 각궁 1,000자루를 주문하기 때문이다. 엘프에게 줄 것과 이실리프 자치령에서 쓸 것이다.
콩고민주공화국 정글에서 쓸 것이라 말하며 주문한다.
전부 수출용이므로 장인들이 협회에 보고할 필요가 없는 물량인 것이다.
각궁 하나당 평균 납품 가격은 80만 원을 지불할 생각이다. 무형문화재의 명맥이 끊길 수 있으니 후한 값을 치러서라도 유지케 하고 싶은 것이다.
장인들은 현수에게 납품하기 위한 활을 만드는 동안 단 하나도 국내 판매를 하지 않는다.
아무리 잘 만들어도 55만 원밖에 못 받기 때문이다.
이에 여러 궁도인이 불만을 토로하자 궁시협회에선 각궁 장인들에게 납품을 명령한다.
하지만 이는 즉각 거절된다.
현수가 추가로 주문하게 될 각궁 5,000자루는 평생을 만들어도 다 못 만들 분량이기 때문이다.
다급해진 협회에서 각궁 가격 상한을 인상해 줄 의사를 내비친다. 하지만 장인들은 이 또한 거절한다. 그리곤 꼴도 보기 싫으니 다시는 보지 말자는 말로 인연을 끊어버린다.
무형문화재 보호 운운하며 정부 관계자까지 나서지만 이마저 무시당한다. 정작 보호받아야 할 때는 아무런 힘도 안 써놓고 뒤늦게 나서는 꼴이 우습기 때문이다.
아무튼 장인들은 물론이고 후손들까지 지속적으로 각궁을 만들어낸다.
이실리프 자치령 등의 수요가 나날이 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각궁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솟는다. 새롭게 팔리는 것이 없으므로 자루당 500만 원이 보통이 된다.
하지만 팔리는 것은 없다.
소장자들이 내놓지 않기 때문이다.
협회는 궁도인들의 질타를 받고 결국엔 해산된다.
이 단체는 비상식적인 제도를 만들어 전통문화의 본질을 왜곡하였다.
그 때문에 많은 궁도인이 혼란과 분노를 경험했다.
뿐만 아니라 전승해야 할 우리의 활 문화 전체의 근간을 뒤흔들었다. 그렇기에 이들이 해산되던 날 많은 궁도인이 환호성을 터뜨린다.
이 과정을 지켜본 현수는 대한민국에 상당히 많은 협회가 있음을 알게 된다. 또한 그들이 얼마나 편향적이며 무능하고 독선적인지를 파악하게 된다.
하여 빙상과 배구 등 여러 종목의 협회를 유심히 관찰하게 된다.
편 가르기로 공정치 못한 선수 선발을 자행한 빙상, 비밀 엄수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해 선수의 발목을 잡은 배구 등은 당연한 개혁 대상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들 협회는 해산이 된다.
뿐만이 아니다.
축구, 농구, 야구 등 거의 모든 스포츠 협회가 개혁된다.
각각의 종목은 새롭게 발족하게 되는 체육부 공무원들이 전제적인 조율을 하게 된다. 체육부 산하에 축구, 야구, 농구, 배구, 빙상 등등으로 종목별 부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각 부서의 장(長)은 공정함이 인증된 공무원이 맡는다. 이들은 3∼5년을 주기로 보직 순환이 된다.
다시 같은 부서의 장이 되는 일은 없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종목별 체육인들 가운데 능력을 인정받은 자는 각 부서의 비상임 고문 내지는 자문역을 맡게 된다.
재직하는 동안 일정한 보수는 지불받지만 아무런 권력도 없는 자리이다.
대표선수 선발 등에 일절 관여치 못하기 때문이다.
자료 분석과 공정한 심사기준 제시 및 종목별 진행 방향 제안 등으로 업무가 한정될 것이다.
이들이 제시한 것을 받아들이고 말고는 전적으로 각 부서의 장이 가진 고유권한이다.
만일 이 과정에서 불법 행위가 드러나면 즉각 파면됨과 동시에 공무원 연금 자격이 박탈된다.
만일 이들 사이에 담합이 발견되면 즉시 퇴출시키고 영구히 발붙이지 못하게 한다. 학교별 파벌이 발생될 경우는 두 학교 출신 선수 모두 대표선수 선발에서 제외시킨다.
발생될 불협화음을 아예 원천 차단해 버리는 것이다.
어느 한쪽의 무고에 의한 불협화음이 생길 경우 그쪽 출신 학교 선수는 10년간 대표선수 선발에서 제외시킨다.
그 학교의 학과 자체를 고사시키는 것이다.
아무튼 올림픽 등에 출전할 국가대표 선발 등은 각 부서의 장이 전문가들의 의견을 취합하여 신중히 결정한다.
이때 반드시 네티즌들의 의견을 묻도록 한다. 공정함을 취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반드시 다수결을 적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빌어먹다 거꾸러질 정당처럼 돈을 주고 사람을 사서 조작하려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런 선발 과정에서 불법행위가 드러나면 관계 공무원은 즉각 파면됨과 동시에 공무원 연금 자격이 박탈된다.
뇌물을 받았거나, 이득을 취했을 경우엔 그 액수의 1,000배를 벌금으로 납부토록 한다.
아울러 영원히 공직진출이 금지된다.
이는 부서의 장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휘하 공무원들 전부에 해당되는 규정이다.
스포츠는 정정당당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