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2
“하하! 농담입니다. 그나저나 도착하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그간 진행된 것들을 브리핑해 주세요.”
“네? 아! 네에. 알겠습니다. 잠시만요.”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낸 박 과장은 아제르바이잔 유화단지 조성공사에 관한 각종 자료를 보여주며 설명한다.
과연 최연소 과장으로 승진할 만큼 실력 있음이 느껴지는 브리핑이었다.
“그러니까 우리의 히든카드가 공개되었으니 수주에 어려움이 있을 거라는 게 박 과장의 생각이란 말이죠?”
“아무래도 그럴 것 같습니다. 워낙 쟁쟁하잖습니까.”
오라고 했으니 가기는 가는데 아무래도 성과가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인 모양이다.
지나건축공정총공사와 벡텔은 세계적인 건설사이다. 서열로 따지면 세계 5위 안에 든다.
반면 천지건설은 국내에서만 유명하지 외국에선 잘 모르는 회사이다. 당연히 경쟁상대로는 상당히 뒤떨어진다.
그러니 가보았자 별무소득일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뚜껑은 열어봐야 하는 겁니다.”
“그렇긴 하지요.”
박 과장은 시무룩한 표정이지만 대답은 한다. 이때 스테파니가 캐리어를 밀며 다가온다.
“자아, 식사 왔습니다.”
생긋 미소 짓고는 둥근 뚜껑을 연다.
12장 아제르바이잔에서
“우와∼!”
박 과장의 입이 딱 벌어진다. 평범한 햄버거를 기대했는데 호텔 레스토랑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테이블 세팅이 끝났다.
장미를 꼽은 화병도 있고, 주황색 라벨이 인상적인 피그멘텀 말벡(Pigmentum Malbec)도 있다.
햄버거와 뛰어난 매칭을 보여 북미에서는 햄버거 와인이란 애칭으로도 널리 알려진 것이다.
접시 위에 놓인 햄버거는 롯데리아나 맥도널드에서 파는 것과는 다르다. 두툼한 스테이크가 겉으로 드러나 있다.
드레싱도 예술적이다. 색깔로 보면 초콜릿 시럽인 듯싶다.
이 밖에 감자튀김도 있고 빵도 있다. 그리고 맛깔나 보이는 샐러드가 푸짐하다.
“입맛에 맞기를 바랍니다. 보스!”
“잘 먹을게요. 자, 먹읍시다.”
“네.”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넣으니 살살 녹는다. 둘은 아무런 대화 없이 음식을 먹었다. 모양만큼이나 맛이 있었다.
“후식이에요.”
스테파니가 가져온 디저트는 시원한 아이스 커피였다.
“흐음! 좋은데요?”
배가 부르니 아까의 낙심을 잊었는지 박 과장이 웃는 얼굴을 보인다.
“음식 솜씨가 좋네요. 모처럼 과식했나 봅니다.”
“저도요.”
“그나저나 리우 건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아! 그거요?”
박 과장이 다시 노트북을 펼친다. 그리곤 그간 수집한 자료들을 기본으로 한 설명이 이어졌다.
상당히 많은 자료를 수집했고, 치밀하게 분석한 흔적이 느껴진다. 공사가 끝나면 리우데자네이루 사람들이 들어가 살게 된다. 그들의 입장에 서서 다각적으로 접근했다.
개념 설계도와 조감도도 많이 준비되었다.
하지만 확 끌어당기는 맛이 부족하다. 이 정도는 다른 건설사들도 충분히 준비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 이외에도 다른 자료들도 있지만 아직 입력되지 않았습니다. 하여 설명 드리지 못한 것도 많습니다.”
“흐음! 현재의 것만으로는 수주에 어려움이 있을 듯합니다. 뭔가 좀 더 획기적인 것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네, 그런데 그건…….”
박 과장은 말끝을 흐린다.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어찌 안 찾아보았겠는가!
기획영업단은 사내통신망을 이용하여 천지건설 직원 전체에게 아이디어 공모를 했다. 신형섭 사장까지 나서서 사원 모두 최소 1개 이상의 아이디어를 내라고 했다.
그 결과 정말 별의별 아이디어가 다 나왔다.
그런데 쓸 만한 것은 별로 없고, 대부분 뜬구름 잡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다.
신 사장은 사원교육을 해야 함을 느낀다며 이마를 짚었다. 창의력 부족을 실감했던 것이다.
최종적으로 목록에 오른 건 두 개의 아이디어뿐이다. 그나마 방금 전 설명에 등장했지만 특기할 만하지 못했다.
“리우 건은 시간이 얼마나 있죠?”
“제안서 접수까지 앞으로 두 달입니다.”
“개념설계 포함된 거지요?”
“네, 현재 설계실에서 기본 작업 중입니다. 우리 쪽 안(案)이 확정되면 다음 달부터는 본격적인 제안서 작성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흐음, 알겠습니다.”
현수는 고개를 끄덕이곤 구름이 솜이불처럼 깔린 창밖 풍경에 시선을 줬다.
“미스 스테파니!”
“네, 보스!”
현수가 부르자 기다렸다는 듯 발딱 일어선다.
“도착까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죠?”
“운항 예정시간이 11시간이니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담요 가져다 드려요?”
의중을 단번에 파악한 듯 환한 웃음을 짓는다.
“그게 좋겠네요.”
잠시 후 현수와 박 과장은 수면안대를 끼고 누웠다. 피곤했는지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가늘게 코고는 소리가 들린다.
피식 웃고는 스테파니를 바라보았다.
“어머! 왜? 뭐 필요하신 거라도…….”
현수는 고개를 저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슬립!”
“하암, 졸리네요.”
털썩―!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스테파니가 깊은 잠에 빠져든다.
“슬립!”
이미 잠들어 있던 박 과장에게도 수면 마법을 걸었다. 그리곤 아공간에 담긴 것들을 꺼냈다.
이실리프 마법서를 비롯한 여러 마법서이다.
“흐음, 숙제할 시간인가?”
둘을 피해 결계를 치고 들어가 앉았다. 타임 딜레이 마법도 구현시켰다. 시간의 흐름이 180 : 1로 변한다.
“아! 이렇게 하면……. 쩝, 그러려면 상당한 공간이 필요하네.”
가장 먼저 연구한 것은 카피된 항온마법진에 마나석을 박는 마법이다. 한 장씩 펼쳐놓고 마나석이 박히게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한 번에 최소 100만 장 이상은 완성해야 하는데 그걸 하나하나 늘어놓는 데 걸리는 시간과 공간이 문제이다.
하여 허공에 띄워 놓고 마나석이 박혀들게 하는 것을 연구하는 중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제트기는 쉬지 않고 날고 있다.
현수가 결계를 해제한 것은 바깥 시간으로 일곱 시간이다. 결계 안 시간으론 52.5일이나 된다.
“휴우∼! 이게 이렇게 어려운 거였나?”
결국엔 항온마법진에 마나석을 박는 마법을 완성시켰다.
비규격인 마나석이 육각형 기둥의 형태로 깎여 허공에 떠 있는 마법진에 박혀들게 하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이것에 시동어를 외쳐 활성화시키기만 하면 최소 3년간 같은 온도가 유지되도록 할 것이다.
결계 안에서 이 마법 하나만 연구한 것은 아니다.
반중력 마법 역시 연구를 마쳤다. 장소가 협소하여 실험까지 해본 것은 아니지만 이론적으론 완성되었다.
이 마법이 구현되면 아무리 무거운 물체라 할지라도 허공에 떠오른다.
그리고 일정고도가 되면 더 이상 상승하지 않고 멈춘다. 이를 전투기에 적용시키면 수직 이착륙이 가능해진다.
무소음, 무동력이기에 스텔스 기능 또는 투명화 기능만 부여되면 하늘을 완벽하게 지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지난해 연말 세트렉아이는 중소형 인공위성 ‘두바이샛―2호’를 통해 세계에서 처음으로 1m급 초정밀 해상도를 갖춘 위성 영상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이 회사는 인공위성 제작기술까지 있다. 발사기술만 부족했다. 하여 러시아의 발사체를 이용했었다.
그런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
세트렉아이에서 위성을 제작하면 반중력 장치를 이용하여 별다른 발사대나 비용 없이 우주까지 띄워 올릴 수 있다.
초정밀 영상까지 얻을 수 있으니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기술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건 시험해 보면 알겠지.”
현수는 반중력 마법에 대한 고찰을 모두 기록해 두었다. 실패할 경우를 대비한 것이다.
이것만 있으면 왜 실패했는지 파악하여 금방 새로운 마법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
“어웨이크!”
“끄응! 하아암! 어머…….”
잠에서 깨어난 스테파니는 자신이 잠들었었다는 것에 화들짝 놀란 표정이다. 황급히 현수와 박 과장을 바라본다.
둘 다 잠에 빠져 있음을 확인하곤 얼른 매무새를 가다듬는다. 그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기장실 쪽으로 향했다.
“어웨이크!”
“…하아암! 잘 잤네. 으드드드!”
잠에서 깬 박 과장은 습관인 듯 기지개를 켠다. 그러다 현수를 발견하곤 계면쩍은 웃음을 짓는다.
“아! 부사장님…….”
“많이 피곤했나 봐요. 코를 아주 심하게 골더군요.”
“아! 제가 그랬습니까?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앞으론 쉬어가며 일하세요. 일도 좋지만 건강이 먼접니다. 그러다 김 과장 과부되는 수가 있어요.”
“넷? 아, 네에. 앞으론 그러겠습니다.”
빙그레 미소 짓는다.
“참! 김 과장 곧 자리 옮기게 됩니다.”
“천지기획 사무실이 외부에 마련되는 건가요?”
“아뇨! 이실리프 뱅크로 전직하게 될 겁니다. 내가 스카우트 했거든요.”
“이실리프 뱅크요? 은행이잖아요.”
소규모 저축은행 쯤으로 생각했는지 별 반응 없다.
“네. 뱅크니까 은행이죠.”
“김 과장이 거기서 무슨 일을 하지요? 경험도 없는데.”
“전체를 조율할 브레인이 필요해서 스카우트한 거예요. 그러니 그런 줄 알고 계세요.”
“아! 네에.”
박 과장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스테파니의 얼굴이 붉어져서 나온다.
“죄송해요. 배 고프시죠? 조금만 기다리세요.”
이번엔 무엇을 먹고프냐고 묻지도 않고 종종걸음으로 사라진다. 어디만큼 왔는지 확인하려 조종실에 갔다가 윌리엄 기장에게 혼난 모양이다.
출발하기 직전에 회사 일로 중요한 회의가 계속될 것 같으니 웬만하면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했다.
하여 나올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여덟 시간쯤 전에 햄버거를 먹고 아무것도 없으니 배가 고파 여러 번 호출했던 모양이다.
상황을 짐작한 현수는 윌리엄을 불러 같이 음식을 먹었다. 이번 메뉴는 스위스 라클레테14)이다.
그릴에 구운 바게트, 버섯, 새우, 소시지, 감자는 치즈와 묘한 궁합을 이뤘다. 윌리엄은 언제 짜증을 냈느냐는 듯 연신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맛있다고 야단이다.
박 과장 역시 먹느라 정신이 없다.
다 먹고 나니 팥빙수를 후식으로 내왔다. 입안이 상큼해지는 느낌이었다.
“보스, 곧 도착할 겁니다. 안전벨트를 매주십시오.”
윌리엄이 조종실로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들린 멘트이다. 셋은 좌석에 앉아 각자의 안전벨트를 맸다.
잠시 후, 무사히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Baku)에 위치한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ar Aliyev)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입국수속을 밟으며 바라보니 팻말을 든 사내가 있다. 삐뚤삐뚤한 한글로 천지건설이라 쓰인 것이다.
“바실리는 임시로 고용한 전직 공무원입니다. 이번 프로젝트와 관련 있는 환경천연자원부에 있었습니다.”
“그래요?”
박 과장과 시선이 마주치자 바실리는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이때 박 과장의 부연설명이 이어졌다.
“후세인굴루 바기로프(Huseingulu Bagirov) 환경천연자원부 장관 비서실에 재직했었다고 합니다.”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갑습니다. 또 오셨네요.”
“미스터 바실리! 이분은 우리 회사 부사장님이십니다.”
둘의 대화는 영어로 이루어졌다.
“오! 젊은 분이시군요. 반갑습니다. 바실리입니다.”
바실리는 저도 모르게 아제르바이잔어로 인사했다. 남카프카스의 아제르바이잔과 이란 북서부에서만 쓰이는 언어이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천지건설의 김현수입니다.”
“……? 와아, 우리 말 참 잘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