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3
바실리의 동공이 급격하게 팽창한다. 동양에서 온 사내의 입에서 너무도 유창한 아제르바이잔어가 흘러나온 때문이다.
곁에 있던 박 과장은 러시아어로 대화하는 거라 생각한 듯 별 무표정이다.
“미스터 바실리! 대통령 비서실로부터 긴급히 방문해 달라는 통신을 받았습니다. 곧장 갈 수 있을까요?”
“전화번호를 주시면 제가 연결해 보겠습니다.”
또다시 영어 대화였다. 박 과장이 메모해 둔 전화번호를 주자 근처에 있는 공중전화에서 통화를 한다.
당연히 아제르바이잔어이기에 박 과장은 무슨 내용인지 몰라 멀뚱멀뚱이다. 하나 현수는 아니다.
대통령 비서실로 걸린 전화는 세 사람을 거쳐 비서실장과 연결되었다. 바실리로부터 몇 가지 확인을 하곤 곧장 데리고 오라는 내용의 대화였다.
“미스터 박! 지금 바로 오라고 합니다.”
“알겠습니다. 가죠.”
공항을 빠져나와 곧바로 이동했다.
개발이 덜 되었고, 알려지지 않아 그렇지 웬만한 유럽의 도시보다 훨씬 세련된 모습이다.
건물들은 큼직큼직했고, 아름다웠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하자 상아색 건물이 눈에 뜨인다. 10층쯤 되어 보이는데 아파트인 듯싶다.
“다 왔습니다. 저 건물이 대통령 집무실입니다.”
“……!”
방금 아파트일 것이라 생각했던 건물을 가리킨다.
대통령 집무실 앞에 의례히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군인이나 경찰도 보이지 않는다. 비교적 자유스런 모양이다.
바실리의 낡은 벤츠가 멈추자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 나타나 문을 열어준다.
“아제르바이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현수가 대꾸하자 안으로 들어가라는 듯 손짓한다.
건물 로비엔 여러 사람이 서 있다. 시키는 대로 들어가자 선두에 있던 사내가 손을 내민다.
“아제르바이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천연환경자원부 장관 후세인굴루 바기로프입니다.”
“아! 네에,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대한민국 천지건설의 부사장 김현수입니다.”
“오! 우리 말을 아주 잘하시는군요.”
바기로프 장관은 40대로 보이는 잘생긴 백인이다. 현수의 능숙한 아제르바이잔어에 감탄한 듯 환한 웃음을 짓는다.
“아직 잘하는 건 아닙니다. 더 배워야지요. 앞으로 큰일을 같이 해나갈 나라의 언어이니까요.”
“아! 그렇습니까? 아주 좋은 생각이십니다.”
장관과 대통령은 한국엘 다녀간 적이 있다. 그렇기에 한국에 대해 제법 알고 있을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 접견실까지 가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길 한다.
한국토지공사는 2038년까지 인구 5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7,200만㎡ 규모의 아제르바이잔 신도시 건설사업 총괄관리(PMㆍProgram Management)를 계약한 바 있다.
불과 5∼10년 사이에 대규모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첨단도시를 만들어낼 능력을 가진 나라는 오로지 한국뿐이라 인정한 결과이다.
1단계 PM사업이기에 계약금액은 약 450억 원이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본격적인 신도시 건설로 영역을 확대할 경우 그 규모는 엄청나진다.
2∼3단계 사업관리 및 설계용역과 건설관리만 수주해도 1조 원을 훌쩍 뛰어 넘는 계약이다.
설계뿐만 아니라 시공 패키지까지 수주하면 약 583억 달러(70조 원)짜리 공사가 된다.
장관의 의도는 앞으로 잘해보자는 뜻일 것이다.
현수는 적당히 맞장구를 쳐줬다.
띵―!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정장을 걸친 사내가 정중히 고개 숙여 예를 갖춘다.
“대통령 수석보좌관 라미즈 메디에프(Ramiz Mehdiyev)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네, 반갑습니다. 천지건설 부사장 김현수입니다.”
“대통령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안내를 받아 들어가니 고풍스런 인테리어가 일품인 접견실이 드러난다.
현수가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중후한 사내가 들어선다. 아제르바이잔 대통령 일함 알리예프이다.
1961년생이니 만 52세이다. 콧수염이 인상적이다.
“대통령님이십니다.”
바기로프 장관의 말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 길 오느라 애쓰셨습니다. 일함 알리예프입니다.”
“반갑습니다. 천지건설 부사장 김현수입니다. 대통령님을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와우! 우리 말 참 잘하네요.”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웃는다.
잠시 후, 자리에 앉았다.
가장 상석엔 대통령이 앉았고, 그를 중심으로 좌측엔 메디에프 수석보좌관과 바기로프 장관이 앉았다.
현수와 박 과장은 우측에 자리했다.
“귀국 대통령님을 뵈었었는데 유감입니다.”
알리예프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국빈자격으로 방문한 바 있다. 그때 노무현 전 대통령과 만나 상호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양국 간 협력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하여 한―아제르 공동성명을 발표한 있다.
알리예프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한 유감을 표한 것이다.
“네에. 안타까운 일이지요.”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대통령이 말을 잇는다.
“그나저나 김현수 부사장님은 참 대단한 분입니다. 콩고민주공화국과 러시아에서 한 일을 보고 받았습니다.”
“아! 네에. 운이 좋아 그리된 겁니다.”
“하하! 운이라니요, 능력이죠. 모처럼 먼 길을 오셨는데 이곳에서도 좋은 성과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모두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었다.
“자, 차부터 한 잔 드시지요.”
알리예프 대통령이 먼저 잔을 들자 모두들 따라서 커피 잔을 든다. 이때 현수의 입술이 달싹였다.
“오펜시브 참!”
샤르르르르릉―!
눈에 보이지 않는 마나가 알리예프 대통령을 비롯하여 메디에프 수석보좌관과 바기로프 장관, 그리고 박진영 과장에게 스며든다.
하지만 이를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 모두들 커피 한 모금씩을 머금는다. 현수 역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진한 커피 맛을 음미했다.
“자아, 그럼 본격적으로 사업 이야길 해볼까요?”
“그러시죠.”
대화가 시작되었다. 박진영 과장은 아제르바이잔어를 전혀 모르기에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입도 벙긋 못해 보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분위기가 매우 좋다는 것이다. 하여 이 사람 저 사람의 표정을 유심히 살핀다.
그러는 동안 허심탄회한 대화가 오갔다.
경쟁사들이 제시한 조건은 모두 파악되었다. 오펜시프 참 마법의 위력 덕분이다.
요즘 들어 달러화의 가치가 떨어졌기에 공사비는 172억 달러(20조 6,400억 원)로 내정되었다.
이 중 90억 달러는 이실리프 뱅크가 제공한다. 전액 천지건설에 지급할 공사비이다.
천연환경자원부 장관이 공사비 결재를 승인한다는 사인만 하면 한국 내에서 천지건설로 곧장 송금키로 했다.
차관형태로 빌려준 금액은 원유와 천연가스로 받기로 했다. 아제르바이잔 입장에선 손해가 아니고, 현수 입장에서는 에너지 자원 확보라는 효과가 있는 거래이다.
대화는 두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하하! 김현수 부사장님처럼 화통한 분을 만나게 되어 아주 유쾌합니다.”
“저도 대통령님을 뵙게 되어 참 좋습니다.”
“우리 앞으로 잘해봅시다.”
“네, 서로에게 이득이 될 일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알리예프 대통령 등은 기분이 좋은 듯 연신 파안대소를 터뜨린다. 이때 바기로프 장관이 입을 연다.
“대통령님! 그럼 유화단지 공사는 확정된 걸로 하고 본 계약 체결을 준비토록 하겠습니다.”
“그래주십시오. 중요한 논의는 다 된 듯하니 최대한 빨리 계약을 체결하고 공사를 시작하십시다.”
“저는 이만 물러가 준비할 것을 준비한 뒤 다시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십시오. 다시 만나는 날엔 아름다운 부인도 같이 오십시오. 성대한 연회를 준비하겠습니다. 하하하!”
“네, 같이 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진영 과장은 뭔가 잘된 것 같기는 한데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 곤혹스러운지 계속 눈치만 보고 있다.
“바로 가실 건 아니지요?”
“네, 하룻밤 머물고 가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쉬시고 내일 아침식사라도 같이 합시다.”
“초대해 주신다면 기꺼이 응하겠습니다.”
“메디에프 수석보좌관! 김 부사장님과 일행을 모시는 데 소홀함이 없도록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대통령님!”
대통령 집무실을 나선 현수는 곧장 포 시즌즈 호텔로 향했다. 고풍스런 분위기가 느껴지는 특급호텔이다.
안내된 객실은 투 베드 스위트룸이다. 하룻밤 숙박비만 330만 원이 넘는다.
“휴우∼!”
모두가 물러가고 둘만 남게 되자 박 과장이 넥타이를 풀며 긴 한숨을 쉰다. 긴장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지만 어떤 내용의 대화인지 알지 못해 몹시 답답했던 이유도 있다.
“조금 쉬었다가 관광이나 합시다.”
“네? 아, 네에. 근데 어떻게 된 겁니까? 분위기는 좋았는데 성과가 있는 겁니까?”
“……!”
현수는 대꾸 대신 박 과장을 바라보았다. 몹시 궁금하다는 듯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박 과장님! 우리 안(案)대로 계약하기로 했습니다.”
“네에? 정말이요?”
많은 이야기가 오갔을 뿐 계약서 작성까지는 아직 여러 난관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이야기를 하니 놀랐다는 표정이다.
“곧바로 본사에 연락해서 계약서 작성 준비하라고 하세요. 공사비는 172억 달러입니다.”
“헐! 부사장님 혹시 마법사세요?”
넋이 반쯤 나간 표정으로 물은 말이다.
“맞아요, 마법사! 대단하죠?”
농담처럼 싱긋 웃어 보이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어떻게 이렇게 쉽게!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박 과장이 실제로 너무 어이없다 느끼고 있다. 본인이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될 것 같던 일이다.
그런데 처음 본 사람들과 두어 시간 이야기하곤 엄청난 공사를 수주했으니 연락하란다.
어찌 황당하지 않겠는가! 하여 정신적 공황상태가 되었다.
이때 현수의 말이 이어진다.
“오늘의 결과가 쉽게 이루어진 거 같아요?”
“그럼 아닙니까? 부사장님은 여기 처음 오셨고, 여기 사람들과도 처음 만난 거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너무도 어이가 없는지라 말을 끝맺지도 못한다.
“오늘 우리가 나눈 대화가 어느 나라 말인 거 같습니까?”
“그거요? 러시아어 아닙니까?”
마치 말썽쟁이가 반항하는 듯한 어투이다.
“아뇨! 아제르바이잔어입니다. 나는 오늘 이곳에 오기 전까지 아제르바이잔어를 독학했습니다.”
“헐! 말도 안 돼!”
자습서도 없을 법한 남의 나라 언어를 혼자서 익혀서 모국어 수준으로 대화를 나눴다는 뜻이다.
당연히 기가 막힐 일이다.
박 과장은 멍한 표정으로 현수를 바라본다.
“한국외국어 대학에 아제르바이잔어과가 있습니다. 귀국하는 대로 졸업생들을 찾아 취업시켜야 할 겁니다.”
“아! 그렇지요. 네, 알겠습니다.”
박 과장은 혹시 잊을지 모른다는 듯 얼른 다이어리에 메모한다. 일이 성사되면 통역할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 기술진에게 여산, 울산, 대산 유화단지를 견학하라는 것도 잊지 말아요.”
“물론입니다.”
“이거보다 더 큰 공사 있는 거 알죠?”
“이것보다 더 큰 공사요?”
박 과장은 무슨 뜻이냐는 표정이다.
“안주에 조성될 이실리프 유화단지 잊었어요?”
“아! 그거요. 그거 진짜였습니까?”
“당연하죠. 이번 건보다 몇 배나 크니 준비 단단히 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유념토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