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5
아리아니가 몹쓸 물건을 먹인 셈이다.
킨샤사에 당도한 첫날은 이렇게 하여 지나갔다. 새벽 5시 반쯤 되었을 때 연희와 이리냐가 항복을 한다.
“자기야! 이제 그만. 나 이제 자기야가 무서워요.”
“현수 씨! 나도. 자기 때문에 나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 없어요. 그러니까 몇 시간만이라도 그냥 놔둬요.”
“……!”
둘은 애처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그제야 머쓱해진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내 생각만 했네. 알았어. 쉬어! 슬립!”
둘 다 재워놓고 나온 현수는 마타디항으로 텔레포트했다.
그곳에서 새로운 컨테이너들을 구입했다.
몇 번의 거래를 통해 안면을 익힌 상인은 말하지도 않았건만 스스로 가격을 낮춰줬다. 현수가 아니면 팔리지도 않을 것이기에 재고 처리한 것이다. 다음은 천지약품으로 이동했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인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탕, 탕, 탕ㅡ!
“본부장님! 계세요? 계세요?”
몇 번을 두드리고 소리치자 반응을 보인다.
“하아암, 누구세요?”
문을 열고 나선 건 처음 보는 20살쯤 된 흑인 청년이다.
“누구 찾아요?
“네. 이춘만 본부장님을 만나러 왔는데 안 계신가요?”
“사장님이요? 사장님은 여기서 안 주무세요.”
“그럼 어디에?”
“저기 저쪽에 저 집 보이지요? 저기가 사장님 댁이에요.”
말을 마친 청년을 볼일 다 봤다는 듯 문을 닫고 들어가 버린다. 아침잠 깨운 게 불만인 모양이다.
“이런! 쩝…….”
뒤돌아선 현수는 나직이 혀를 찼다.
왠지 집에서 푸대접받은 기분이 든 때문이다.
천지약품은 현수와 이춘만 본부장의 지분율이 50 : 50이다. 따라서 현수도 사장이다. 그런데 직원이 사장의 얼굴을 몰라 문 닫고 들어가 버리니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저 집이라고 했지?”
방금 전 청년이 가리킨 집은 주변의 다른 집들과 달리 반듯하고 크다. 새로 지은 듯한데 완공된 것 같지는 않다.
바로 옆에 가설재들이 얼기설기 얽혀 있다.
띵동∼! 띵동∼! 띵동∼! 띵동∼!
“근데 이 집이 맞나?”
초인종을 눌러놓고도 괜스레 불안하다. 혹시 다른 사람의 집이면 새벽부터 한 소리 들을 듯하기 때문이다.
“누구세요?”
잠이 덜 깬 음성이기는 하지만 분명한 한국어이다. 그리고 중년 여성의 음성이다.
‘맞나보네. 근데 누구지?’
“누구시냐니까요.”
다소 짜증 섞인 반응이었기에 얼른 대답했다.
“저어, 여기가 이춘만 본부장님 댁 맞습니까?”
찌이잉―! 딸깍!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문이 열린다.
조심스레 열고 들어서니 너른 마당이 드러난다.
기화이초까지는 아니지만 제법 세심한 손길을 받은 듯 잘 가꿔져 있다.
바깥쪽에서 본 것처럼 건물의 뒤쪽은 공사 중이다.
마당을 지나 현관으로 다가가니 누군가 문을 연다. 40대 후반∼50대 초반의 파마머리 아줌마다.
“아침부터 누구시죠? 본사에서 오셨어요?”
“네? 아, 네에. 본사라면 본사 맞습니다. 근데 본부장님은 아직 주무시나요?”
“이것 보세요. 지금이 몇 신 줄 알아요? 와도 너무 일찍 온 거잖아요. 본부장님은 지금 주무시니까 어느 부서 누군지 직위와 성명을 말해봐요. 깨면 전해 드릴 테니.”
시계를 보니 7시도 안 된 시각이다. 확실히 남의 집을 방문하기엔 적합하지 않은 시각이다.
“아! 제가 너무 일찍 왔군요. 죄송합니다.”
“됐구요. 어느 부서 누구예요?”
아줌마는 약간 불쾌한 표정이다.
“아! 네에, 저는 김현수라 합니다. 본부장님 깨시면 천지약품 사무실에서 기다린다고 전해주시겠습니까?”
“네? 누구요?”
아줌마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뜬다.
“김현수라고 전해주시면 아실 겁니다. 그럼 이만! 새벽부터 실례 많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얼른 고개 숙여 사과하고는 몸을 돌렸다. 이때 아줌마가 벼락같이 소리를 친다.
“안 돼요! 가지 말아요. 미안해요. 김현수 부사장님인 걸 몰랐어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우리 그이 깨울 테니까요.”
“아! 사모님이셨습니까?”
“네? 네에.”
“처음 뵙습니다. 김현수입니다.”
다시 고개 숙여 예를 갖췄다.
“미, 미안해요. 자, 잠깐만요.”
아줌마는 잠옷차림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화들짝 놀라더니 쏜살처럼 안으로 들어간다.
잠시 후, 이춘만 본부장이 눈을 비비며 나왔다.
“아이고, 이게 누구신가? 어서 오시게.”
“그간 안녕하셨지요?”
“그럼, 우리 부사장님 덕분에 아주 잘 먹고 잘살고 있었네. 자, 거기 그러고 있을게 아니라 어서 들어오시게.”
“아닙니다. 사모님도 계시는데…….”
“아냐, 아냐! 그 사람 지금 도망갔어.”
“네? 그게 무슨?”
“자네에게 무례하게 굴었다고 그러면서 볼 면목이 없다고 뒷문으로 도망갔네. 그러니 들어오시게.”
“헐……!”
나직한 탄성을 내자 이춘만 본부장이 잡아끈다.
“자자, 들어가자니까, 아직 공사 중이라 주변이 어수선하긴 해도 안쪽은 그런대로 괜찮네. 커피 괜찮지?”
“네? 아, 네에. 그나저나 처음 본부장님 댁을 방문하면서 아무것도 안 가져왔네요. 세제나 휴지 사와야 하는데.”
“아이고, 이 사람아! 우리 사이에 무슨……. 당연히 그냥 오는 거지. 자자, 어서 들어오시게.”
이춘만 본부장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아직 정리가 덜 된 살림들이 여기저기 늘어져 있다. 그걸 보곤 이유를 설명한다.
“그저께 입주했네. 집사람이 와서.”
“아! 네에.”
현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캐나다에서 가져온 듯한 캐리어가 풀어헤쳐져 있는 것이 보인 것이다.
“어떻게 된 겁니까?”
“어떻게 되긴? 자네 말대로 했네. 마누라한테 전화해서 ‘나 외롭고 지쳐서 혼자 살기 힘들 것 같다’고 했지.”
“그랬더니요?”
“득달같이 짐 싸서 왔네. 크크, 내가 현지처라도 얻으려는 것으로 생각했대.”
“아! 네에.”
웃으면서 한 이야기지만 내용은 슬프다.
남편은 국내도 아닌 외국, 그것도 문화시설이나 편의시설이 열악한 아프리카에서 번 돈 전부를 송금해 줬다.
아내는 자식 교육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가용 타고 다니면서 문화시설들을 섭렵했을 것이다.
그러다 남편이 벼락출세를 해서 돈을 잘 벌게 되었다. 그런데 외롭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대놓고 말한 건 아니지만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새로운 여자를 얻겠다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그 즉시 비행기를 타고 왔다. 화수분이나 다름없는 남편을 다른 년에게 빼앗기고 이혼당하긴 싫어서이다.
까놓고 말하면 이춘만 본부장의 부인은 속물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식을 낳아준 어미이다. 게다가 젊어선 열렬히 사랑했던 여인이기도 하다. 다소의 허물이 있더라도 묻어주는 게 남편의 도리라 여겼다.
하여 아직 완공도 되지 않은 이 집으로 입주한 것이다.
이 집이 다 지어지면 아내를 불러들이려 했다. 일종의 서프라이즈 파티를 구상했는데 헛물만 켠 셈이다.
이 본부장은 현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어떻게 해서 이만한 자리에 있는지를 소상히 말한 것이다.
현수가 없었다면 아직도 만년과장 자리에 머물러 있을 것이며, 아들 학비를 대기에도 빠듯했을 것이라 하였다.
당연히 절대로 실례해선 안 될 사람 목록의 첫 번째이다. 그런데 새벽부터 남편의 이런 당부를 무참히 깨버렸다.
면목이 없기에 뒷문 열고 도망친 것이다.
“사모님은 이쪽 지리에 어두우실 텐데 어쩌죠?”
“괜찮네, 마투바가 같이 나갔으니까.”
“마투바요? 오빠인 마림바가 데려갔다면서요?”
“그래! 그랬는데 되돌아왔네.”
“아! 그래요?”
작별인사도 없이 사라진 후 오랫동안 보지 못한 얼굴이다. 하여 다시 돌아와 반갑다는 표정을 지었다.
“참! 마림바는 반군지도자 중 하나인데 그거 아세요?”
“알고 있네. 대대적으로 정부군과 붙어보려는데 동생들이 거추장스러워 다시 보낸 거네.”
“아!”
정부군이라 함은 우호관계에 있는 죠지프 카빌라 대통령과 가에탄 카구지 내무장관 쪽이다.
둘이 붙는다니 마음이 편치 않다. 정부군이 더 조직적이므로 마림바가 체포당하거나 목숨을 읽을 수도 있다.
그때 마투바와 동생들이 슬퍼할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 공격한다는데요?”
“그건 잘 모르네. 다만 멀지 않은 때라고만 하더군.”
“흐으음, 그렇군요. 마투바와 동생들은 건강해요? 마투바는 아직도 술 잘 마시고요?”
“어이구, 그 주당이 어디 가겠는가! 모두 건강하네. 그리고 마투바는 한류에 푹 빠진 빠순이가 되었네.”
이 본부장은 하루 종일 모니터를 끼고 사는 마투바가 넌덜머리난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어제는 하루 종일 소지섭과 임수정 주연의 ‘사랑한다, 미안하다’를 보았다. 16부작이나 되는데 거의 다 보았다.
그리곤 훌쩍거리며 눈물을 짜는데 못 봐줄 풍경이었다. 예전 같으면 뭐라고 한마디 했겠지만 어제는 그러지 못했다.
아내가 곁에서 같이 휴지를 뽑고 있었기 때문이다.
“끄으응! 아무튼… 괜히 그건 가르쳐 줘서.”
마투바에게 한국말 빨리 배우라고 드라마를 권했는데 후회된다는 표정이다.
“참, 아디스아바바 쪽은 어때요?”
“어! 거긴 며칠 전에 다녀왔는데 많이 진척되었더군. 한창호건축사 사무소에서 파견한 직원들이 아주 꼼꼼해.”
화제가 바뀌자 몹시 흡족하다는 표정이다.
이춘만 본부장은 콩고민주공화국과 에티오피아에 무비자 입국하는 특혜를 얻었다. 양국으로부터 명예 외교관 신분증을 발부받은 것이다. 이는 천지약품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도 좋았던 결과이다.
“그쪽이 얼추 준비되는 것 같으니 일 좀 더하셔야죠?”
“일을 더해?”
“네! 에티오피아에 이어 우간다와 케냐에서도 우리가 들어오길 바란다는군요.”
“헐! 거긴 언제 또 작업했나? 정말 대단해! 그나저나 이러다 아프리카 전체에 다 들어가는 거 아닐까?”
“뭐, 오라고 하면 가죠. 우리야 손해 볼 일 아니니까요. 참, 에티오피아에서 주문 받았어요.”
“주문?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도 안 했는데?”
“마수걸이라는 말 아세요?”
“마수걸이? 알지. 장사꾼들이 맨 처음으로 물건 파는 걸 뜻하는 말이잖아.”
뭐 이런 걸 다 물어보냐는 표정이다.
“네, 에티오피아 정부에서 마수걸이 주문을 했습니다.”
“뭐, 얼마나 대단한 걸 주문했기에 이래?”
현수와 이춘만 본부장은 이미 통이 커져 있는 상태이다. 그렇기에 웬만한 수량으론 눈도 꿈쩍하지 않을 정도이다.
“홍역, 말라리아, 콜레라 백신 각각 3,000만 명분이요.”
“허어!”
아무리 통이 커도 이 정도면 감탄사가 나오는데 당연하다. 수량이 엄청나므로 이익도 많이 발생된다.
그리고 그 이익은 정확히 반분된다. 물론 무료급식소 운영비용은 먼저 공제된다.
“대금은 금괴로 지급받기로 했습니다. 제가 처분해서 송금해 드릴게요.”
“그, 그러게. 세상에! 3,000만 명분이나. 그것도 세 가지를……. 하여간 자넨 뭐든 하기만 하면 대형이군, 못 말려, 정말 못 말릴 사내야. 자넨!”
이춘만 본부장은 진심 어린 감탄을 하며 현수를 새삼 바라본다. 경제 사정도 좋아지고 결혼도 해서인지 확실히 반듯해 보이고, 잘생겨진 듯하다.
딸이 있으면 무조건 사위 삼아야 할 모습이다.
『전능의 팔찌』 3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