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0
“그럼요. 엄청 친하죠. 소개해 줄까요?”
“응? 그, 그래.”
이리냐와 테리나가 대화를 하며 가까이 다가오자 연희는 환히 웃으며 기다렸다. 어차피 같이 갈 것이기 때문이다.
“언니, 이쪽은 예카테리나 언니예요. 이쪽은 강연희 언니구요. 서로 인사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참 예쁘시네요.”
“그쪽도요. 제가 본 여자 중에 제일 예뻐요. 어쩜 이렇게 예쁠 수가 있어요?”
테리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한국에 온 이후 많은 여자를 보았다. 텔레비전을 켜면 탤런트, 배우, 가수가 나온다. 하나같이 미녀들이다.
하지만 테리나가 감탄할 정도는 아니다. 본인 또한 대단한 미녀이기에 워낙 눈높이가 높아서이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에서 아주 예쁜 미녀를 보았다.
김현수의 부인이 될 여주인공이 권지현이라는 기사에 실린 사진이다. 화장기 없는 얼굴이지만 어떤 배우나 탤런트보다도 예쁘다고 느꼈다.
그때의 솔직한 느낌은 낙담이었다. 놀라운 능력을 가진 현수에게 마음이 막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놀란 미녀는 항온의류 화보촬영 때 만난 이리냐 파블로비치 체홉이다.
같은 러시아 출신이라 금방 친해졌는데, 기념으로 보관하고 있는 그때 찍은 원판사진을 볼 때마다 감탄한다.
잡티 하나 없는 아름다운 얼굴과 늘씬한 교구가 참으로 조화롭다 생각했다. 게다가 대학을 졸업한 재원이다.
날씬하고 예쁘기만 한 머리 텅 빈 블론디가 아닌 것이다.
오늘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세 번째로 놀랐다.
복도 저편에서 걸어오며 환히 웃는 강연희가 그 장본인이다. 현수의 와이프가 된 권지현만큼이나 아름답고 교양미가 넘친다.
그런데 동생을 하기로 한 이리냐가 아주 잘 안다고 한다. 둘 사이엔 아무런 교집합[Intersection set]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아주 친한지 너무도 살갑게 대한다.
순간적으로 그게 뭘까 궁금했다. 하여 환히 웃으며 속내를 드러내 최상의 찬사를 던졌다.
이때 제일 예쁘다는 표현을 쓴 건 아직 결혼하지 않은 미스 중에 그렇다는 뜻이다. 테리나에게 있어 권지현은 미세스 중에 제일 예쁜 여자인 것이다.
3장 휴우! 들킬 뻔했어
“언니, 전무이사실로 갈 거지?”
“그래야지. 가자.”
너무도 순진무구하여 어떨 땐 아무 생각 없는 것 같은 이리냐의 말에 연희가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테리나는 ‘대체 무슨 용무로 가지?’ 하고 생각했다.
본인 역시 전무이사실로 가는 중이다. 주영이 지시한 법률적 검토에 대한 보고를 할 시간이기 때문이다.
“언니는 어디로 가요?”
“나? 나도 전무이사실이야. 같이 가.”
가보면 알 것이기에 두말 않고 앞장섰다. 이때 연희와 이리냐는 테리나가 모델인 것으로 인지하고 있다.
이리냐의 경우는 처음 만났을 때 테리나가 하버드 로스쿨 출신 변호사라는 말을 듣기는 했는데 잊었다.
당시엔 현수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연희는 브로셔에서 보았기에 모델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또각, 또각, 또각!
세 여인이 전무이사실로 향하는 동안 복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면서 물러선다.
물론 그들의 시선은 셋에게 향해 있다. 천사처럼 아름다운 세 여신이 강림했기에 모두들 눈을 크게 뜨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셋은 곧장 주영의 사무실로 향했다.
똑, 똑, 똑!
“네, 들어오세요.”
벌컥―!
“아! 어서 와요, 미스 브레즈네프!”
“네, 전무님. 어머, 현수 씨도 와 계시네요.”
“아! 테리나, 어서 와.”
현수가 테리나에게 아는 척을 한 바로 다음 순간 이리냐의 천진무구한 음성이 들린다.
“자기야, 까차 언니 알죠?”
“…자기?”
테리나의 시선이 현수에게 쏠린다. 어찌 된 영문인가 싶은 것이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결혼했으니 이제 겨우 두 달 된 새신랑이다. 그런데 이리냐와 바람이 났나 싶은 것이다.
“까차? 그럼, 잘 알지. 두 번이나 북한에 같이 갔다 왔는걸. 자, 앉아. 연희도 앉고.”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연희는 엉거주춤하며 앉았지만 이리냐는 아니다. 아직 분위기 파악이 안 된 것이다.
하여 냉큼 현수의 오른쪽으로 다가가 바로 곁에 앉으며 현수의 팔을 껴안는다.
현수가 슬쩍 밀어내는 몸짓까지 했지만 이리냐는 연희에게 언니는 왜 왼쪽으로 가지 않느냐는 표정이다.
“험험! 미스 브레즈네프, 내가 말했던 법률적 검토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눈치 빠른 주영이 분위기 쇄신용으로 꺼낸 말이다.
“아, 그거요. 검토해 본 바에 의하면 우리 쪽은 문제 될 게 없습니다. 주문은 그쪽에서 먼저 했지만…….”
잠시 업무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 각종 장비를 현지로 보내면서 문제가 발생되었다.
이실리프 상사는 중장비 등을 생산하는 회사의 생산량 거의 전부를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 워낙 주문량이 많으니 그쪽에서 VVIP 대접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필요로 하는 다른 회사와 약간의 마찰이 생겼다. 그쪽에선 이실리프 상사 때문에 손해를 입었다면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걸어왔다.
원래는 그 회사에 납품될 물건을 이실리프 상사로 먼저 보내면서 발생된 일이다.
“그래서 변호사님 말대로라면 이대로 소송을 해도 우리에겐 책임이 없다는 겁니까?”
“물론이에요. 귀책사유가 없으니까요. 문제가 된다면 저쪽에 물건을 주기로 해놓고 우리에게 먼저 공급한 생산자에게 도덕적 책임이 있습니다.”
이번에 문제가 된 건 로그마스타와 팀버킹이란 장비이다.
로그마스타는 벌목을 하면서 곧바로 원하는 사이즈로 재단해 주는 벌목 장비이다.
팀버킹은 원목을 목재로 가공해 주는 장비이다.
원래는 다른 업체에서 주문하여 제작했다. 그런데 이실리프 상사로부터 대량 주문이 들어갔다.
생산자 입장에서 한두 대 구입하고 말 거래처보다는 3,000대 이상을 주문하는 대량 거래처가 더 중요하다.
하여 이실리프 상사에서 독촉하자 먼저 주었는데 그걸 문제 삼고 나온 것이다.
법률적 검토에 대한 의견을 모두 주고받자 잠시 쌩한 분위기가 된다. 테리나의 시선이 현수에게 쏠리면서부터이다.
연희와 이리냐는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게 있는지 눈빛을 교환한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때 연희가 나섰다.
“아까 말이에요, 화장실에 있는데…….”
잠시 연희의 말이 이어지자 모두의 시선이 쏠린다.
사람을 뽑을 때 최대한 주의를 기울였는데 스파이가 잠입했다고 하자 주영이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현수는 누가 누구를 심었는지, 그게 누구인지 파악하는 것이 먼저라고 하였다.
“사원증 아직 안 만들었지?”
“그래, 아직은. 그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래? 그럼 내가 양식을 만들어서 보내줄게. 그걸로 사원증 만들어서 배부해. 알았지?”
“네가? 안 바빠?”
“아무리 바빠도 그런 건 내가 직접 하고 싶다.”
“그래? 그럼 나야 좋지.”
주영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나랑 볼일 다 본 거지? 나 가도 돼?”
“응? 그, 그래. 가도 된다, 오늘은.”
주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아, 그럼 갈게.”
이리냐가 따라 일어나려다가 엉거주춤하며 주저앉는다.
이제야 분위기를 파악한 것이다. 연희는 까차를 보고 있다. 예상대로 까차는 현수에게 시선을 주고 있다.
“연희 씨, 그리고 미스 체홉, 오늘 반가웠어요.”
“아, 네. 반가웠어요.”
“네, 저, 저도요.”
“테리나, 나중에 또 봐.”
“네? 아, 네. 그래요, 그럼.”
말을 마친 현수가 걸어 나가는 동안 모두의 시선이 쏠리는 이상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휴우∼!”
전무이사실을 나선 현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나 금방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아래층 인사부를 찾아갔다.
“어서 오십시오. 어떻게 오셨습니까?”
“인사부장님 좀 뵈려고 왔습니다.”
“사전에 약속은 되어 있으신가요?”
비서인 듯한 여직원은 아주 상냥한 미소를 짓는다. 모처럼 훈남이 사무실을 찾아서 기분이 좋은 것이다.
“아뇨. 약속은 하지 못했지만 부장님을 꼭 좀 뵈었으면 합니다.”
말을 하며 굳게 닫혀 있는 인사부장실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쩌죠? 부장님하고 면담하시려면 조금 기다리셔야 해요. 지금 면접을 보는 중이거든요.”
“아, 그래요? 그럼 기다리죠.”
현수가 비서실 안쪽에 준비된 의자에 앉자 비서 아가씨가 서식과 볼펜을 내민다.
“소속과 직위, 그리고 성함과 면담 목적을 적어주세요.”
“네?”
“부장님 만나셔야 한다면서요? 그럼 누가 어떤 목적으로 왔는지 정도는 아셔야 하지 않겠어요?”
여전히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다.
‘에구, 회사엘 자주 나오든지 해야지.’
전에도 이실리프 빌딩에 왔을 때 잡상인 취급당해 경비원들에게 끌려 나갈 뻔했다. 주영이 제때에 내려오지 않았으면 고스란히 봉변당했을 것이다.
오늘은 어리바리한 신입사원쯤으로 착각하는 듯하다.
현재 비서 아가씨는 현수를 어디선가 보았다는 생각을 하는 중이다. 아주 익숙한 얼굴이다. 그런데 현수가 아주 유명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자주 방송을 타는 건 아니다.
가끔 뉴스에 등장하기에 많은 사람이 알 뿐 모두가 확실히 인식하고 있지는 못하다.
하여 며칠 전에 갔던 클럽에서 같이 어울려 놀았던 사내인가 하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그날 좀 취해서 기억이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현수는 실소가 나왔지만 중요한 면접을 보고 있다기에 방해하지 않으려 참으며 양식의 빈칸을 채웠다.
“다 쓰셨어요?”
“네, 여기 있습니다.”
종이를 아끼기 위함인지 양식은 A4 용지를 4등분한 쪽지 수준이다. 이를 접어서 건네자 환히 웃으며 펼친다.
“에구머니나!”
아니나 다를까,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치켜든다.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고 흰자가 검은자보다 훨씬 많다.
“사, 사, 사장님! 죄, 죄, 죄송합니다. 자, 자, 잠깐만요. 부, 부장님께 바로 아, 알리겠습니다.”
상당히 많이 놀랐는지 바들바들 떨며 인사부장실로 달려가려 한다.
아무리 중요한 면접일지라도 이실리프 상사의 실질적인 주인이자 총수인 현수를 만나는 것이 우선이라 여긴 것이다.
“아니에요. 그러지 마세요. 지금 중요한 면접이 있다면서요. 내가 조금 기다릴게요.”
“네? 아, 네에. 그, 그럼……. 참, 차는 뭐로 드릴까요?”
비서 아가씨가 너무 심하게 놀라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론 본인 때문에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상황이 된 것이다.
“그냥 커피면 되요. 기왕이면 블랙으로 주세요.”
“네? 아, 알겠습니다. 자, 잠깐만요.”
비서 아가씨는 뛰듯이 탕비실로 들어가 버린다.
그리고 불과 몇 초 지나지 않았을 때 인사부장실 문이 열리고 사내 셋이 나온다. 그들 뒤로 50대 중반으로 여겨지는 풍채 좋은 사내가 따라 나온다.
“준비해 달라는 서류는 다 되는 대로 언제든 제출하게.”
“네, 감사합니다, 부장님!”
“그래, 이제 우리 이실리프 상사의 사람이 되었으니 열심히들 일해 주시게.”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사내 셋 모두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곤 밖으로 나간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던 부장이 현수에게 시선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