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8
현수는 남편이 해야 할 당연한 일이 뭔지도 모르면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자 연희와 지현이 배시시 웃는다.
“쳇! 뭔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알았대요. 그죠? 솔직히 고백해 봐요. 모르죠?”
“응? 그, 그래. 잘 몰라. 그게 뭔데?”
“호호! 호호호!”
“깔깔! 깔깔깔깔!”
둘은 자지러지게 웃는다.
“아무튼 커피 마셔요.”
지현이 내민 것 받으면서도 둘의 눈치를 살핀다. 남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 뭔가를 생각하면서.
‘뭐지? 뭔데 이러지? 흐음, 뭘까? 알 수가 없네.’
현수의 상념을 깬 건 연희이다.
“참! 큰일 났어요.”
“큰일? 무슨 큰일?”
“이리냐가 브레즈네프 변호사에게 실수를 했어요.”
현수는 잠들어 있는 이리냐를 힐끔 바라보았다.
“실수? 무슨 실수?”
“우리가 부인이라는 걸 들켰어요. 어떻게 해요?”
“뭐?”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자칫 소문이라도 번지면 악성 댓글로 몸살을 앓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리냐가 취했을 때 브레즈네프 변호사가 물었대요. 자기야 하고 어떤 관계냐고요.”
“그랬더니?”
“자기하고 나도 아내라고 말해 버렸대요.”
“끄으응!”
나직한 침음을 내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현수는 잠든 이리냐에게 손을 뻗었다.
7장 아리아니가 밤마다 하는 일
“바디 리프레쉬! 큐어 포이즌! 어웨이크!”
샤르르르르릉―!
마나가 이리냐의 체내로 스며든다.
“끄으응!”
“이리냐, 테리나에게 뭐라고 했어? 자기하고 연희도 내 아내라고 했어? 그랬어?”
“네? 그게 무슨……. 어머나! 내, 내가…….”
기억이 떠오른 듯 이리냐의 안색이 급격히 창백해진다. 한국 사회가 어떤지 연희에게 들어 잘 알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혼외 자식이 있다는 소문만으로 검찰총장이 자리에서 쫓겨나는 일이 있었다. 그렇기에 절대로 중혼(重婚)했음이 알려져선 안 됨을 수없이 교육받았다.
그런데 불어버렸다. 제 입으로 아주 시원하게!
연희는 현수의 시선을 가리며 이리냐의 어깨를 잡는다. 그리곤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입을 연다.
“어휴! 내가 미쳐요, 미쳐! 그렇게 조심하라고 일렀는데.”
“미, 미안해요, 언니! 미안해요, 자기야! 내가…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저 술 끊을게요. 자갸, 용서해 줘요.”
“……!”
지현은 뭐라 말할 수 없는 입장인지 잠자코 있다.
현수는 울상인 이리냐를 보고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괜찮아. 내가 나중에 테리나를 만나서 잘 타이를게.”
“미안해요, 자기.”
“괜찮다니까. 그나저나 배 안 고파? 가서 밥 먹어.”
“아니에요. 나 같은 건 한 열흘 굶어봐야 정신 차려요. 그러니 굶을게요. 굶게 해주세요.”
“……!”
진심으로 반성하는 듯하다. 그렇다고 어찌 굶게 하겠는가!
“밥 안 먹으면 용서 안 해줄 거야. 그러니까 가서 먹고 와. 알았지?”
“정말요? 알았어요. 이리냐, 밥 먹고 올게요.”
이리냐는 발딱 일어나 식탁으로 향한다. 현수는 연희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 자리에 같이 있었어?”
“네. 아무래도 이리냐가 실수할 것 같아 같이 갔어요. 근데 말릴 틈이 없었어요. 미안해요.”
“아냐. 연희가 그런 것도 아닌데. 그리고 이참에 정리 좀 해. 아까 나더러 고맙다고 하지 말라 했지?”
“네, 우리가 당연히 할 일을 하는 거니까요.”
“그래. 그래서 앞으론 고맙다는 말을 가급적 하지 않을 거야. 대신 당신들도 내게 미안하다는 말 하지 마.”
“네?”
지현, 연희 모두 눈이 동그래진다. 이유가 뭐냐는 뜻이다.
“나는 당신들을 사랑하고 당신들도 나를 사랑해. 그렇지?”
“네, 그럼요.”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는 미안하다는 말 하는 거 아냐. 무엇을 하든 상처 주려고 한 게 아닐 테니까. 그치? 사람이니까 실수할 수도 있는 거야. 그러니 미안하다는 말 하지 마.”
“…알았어요. 그럴게요.”
연희와 지현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자, 그런 의미에서 한번 안아줄게. 이리 와.”
“호호, 네.”
왼쪽엔 지현이, 오른쪽엔 연희가 안겨온다. 현수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둘의 교구를 꼭 안아주었다.
“아아! 행복하다.”
“……!”
여인들은 대답 대신 현수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흘렀다.
“이리냐, 밥 다 먹었어요.”
“좀 많이 먹지. 요즘 살 빠진 거 같은데. 쉐리엔도 있으니 앞으론 많이 먹어.”
“네, 그럴게요.”
자신이 끼어들 자기가 없음에 이리냐는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는다. 이때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다.
“이리냐, 뭣 좀 물어봐도 돼?”
“그전에 제가 먼저 물어볼 게 있어요.”
“그래? 뭔데?”
“자기 까차 언니에게 애칭을 지어줬어요?”
마침 물으려던 것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북한에 출장 갔을 때 까차라는 말이 왠지 이상해서 이름을 줄여서 테리나라고 부르겠다고 했어. 근데 러시아에선 애칭 지어주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어?”
“당연히 있죠. 제가 예전에 읽었던 어떤 책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어요.”
이리냐는 부전공으로 선택했던 러시아 문학 시간의 과제를 떠올렸다. 고문서를 읽고 그에 대한 소감을 쓰는 것이었다.
그때의 주제가 바로 애칭에 관한 다양한 속설이었다.
자식이 태어나면 좋은 이름을 지어주어라. 그 이름이 아이의 일생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평생을 보살피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내가 여인에게 애칭을 지어줌은 평생을 같이하고 싶다는 의미이다. 다만 둘의 나이 차이가 열 살 이상일 경우엔 후견인이 되겠다는 의미이다.
러시아의 이름은 길다. 그렇기에 이를 줄여 짧은 호칭을 쓰기도 한다. 이를 애칭, 또는 별명이라 한다.
이성이 애칭을 지어주는 것은 사랑을 받아달라는 뜻이다.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결혼을 약속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헐!”
그냥 까차라는 호칭이 이상해서 예카테리나를 줄여 테리나라 부르겠다는 의미밖에 없었다.
그런데 러시아 사람들은 이를 다르게 받아들인다고 한다.
테리나와는 나이트클럽에 간 적이 있다. 법률자문 역으로 북한에 동행해 주는 대신 한국의 밤 문화를 경험하고 싶은데 보디가드 해줄 사람이 없다고 해서이다.
그때 섹시댄스 경연대회가 있었고, 1등을 하려 진한 키스를 했다. 그때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무마되었다.
그런 다음에 북한엘 동행했다가 애칭을 지어준 것이다. 그리고 같은 침대를 여러 번 썼다. 목욕할 때 등을 밀어줬고, 본의 아니게 혼탕도 경험했다. 하지만 육체적 접촉은 없었다.
어쨌거나 애칭 지어준 것이 문제될 듯싶다.
하여 이맛살을 찌푸리는데 이리냐는 깎아놓은 사과를 찍어 입에 넣으며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 한다.
“테리나 언니 시집 안 간대요. 자기가 이름 지어줘서요.”
“……!”
지현과 연희의 시선이 확 쏠린다. 어쩔 거냐는 표정이다.
“나는 테리나 언니 좋은데. 지금보다 더 친해졌으면 좋겠어요. 예쁘고 날씬한데다 똑똑해서 배울 것도 많고…….”
이리냐는 철없는 아이처럼 마음속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다.
“으으음.”
현수는 나직한 침음을 냈다.
그리곤 연희와 지현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테리나를 받아들일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현수의 눈빛에서 진심을 읽었는지 지현과 연희가 참았던 숨을 몰아쉼이 느껴진다. 괜스레 미안한 기분이 들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자, 이제부터 뭐할까?”
“보드게임 해요, 우리. 도둑 잡기 재미있는데.”
“나는 부루마블이 좋아요. 그거 해요. 네?”
“그러지 말고 할리할리 해요.”
현수의 한마디에 갑자기 시끄러워진다.
“에구! 차라리 내가 마법을 가르쳐 줄게.”
“마법이요?”
모두의 입이 한순간에 닫힌다. 그리곤 아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현수를 바라본다.
“먼저 마법을 익힐 수 있는 몸인지 확인할 거야. 그러니 가만히 있어야 해. 알았지?”
“네!”
정확히 한목소리를 낸다. 현수는 피식 웃었다.
“마법이 그렇게 배우고 싶었어?”
“그럼요! 마법으로 청소하고 빨래하고 설거지도 하면 얼마나 편하겠어요? 손가락으로 딱 소릴 내면 빨래가 잘 개켜져서 서랍 속에도 들어가구요.”
“자기 메리 포핀스4) 봤구나?”
연희가 얼른 고개를 끄덕인다.
“네. 주영 씨가 DVD 보내줘서 이리냐와 함께 봤어요.”
“흠! 마법은 말이지, 그 영화에서 묘사되는 것보다 조금 더 고차원적인 거야. 머리가 나쁘면 배울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 특히 수학을 잘해야 해.”
“으윽! 난 수학 싫은데.”
이리냐가 이맛살을 찌푸린다. 수학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지현과 연희는 표정 변화가 별로 없다.
둘 다 문과 출신이기는 하지만 딱히 수학을 못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내가 당신들 몸을 바꿔줬지?”
“네, 그랬지요.”
스위스 융프라우 별장에서 무려 열흘이나 걸린 일이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기도 하다. 자신들의 몸에서도 기절할 것 같은 악취가 풍길 수 있음을 깨닫기도 했다.
“그때 이후로 머리가 좋아진 거 같지 않아?”
“어머! 그러고 보니…….”
킨샤사의 저택 관리는 연희가 맡았다. 하여 모든 입출금을 관장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계산이 빨라졌음을 느꼈다.
하여 계산기를 누르려다 멈춘 경험이 여러 번 있다.
게다가 기억력도 많이 좋아졌다. 이전 같으면 잊었을 일도 생생히 기억하여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그래, 그걸 하면 머리도 좋아져. 그러니 수학 걱정은 하지 마. 알았지?”
“자기야!”
연희는 새삼 감격했다는 표정을 짓는다.
너무 많은 것을 받기만 한다고 느낀 것이다. 지현과 이리냐도 마찬가지 표정을 짓고 있다.
“아무튼 우리 지현이 먼저. 자, 이쪽으로 와서 앉아.”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맞은편에 자리 잡고 앉는다. 현수는 무표정한 얼굴로 손목을 잡고 마나를 밀어 넣었다.
치료를 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지라 전과 달리 한꺼번에 다량을 투입시킨 것이다.
“으으으, 으으으으!”
마치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듯 부르르 떤다.
‘흐음! 이 정도면 괜찮은 건가?’
10서클 마스터이기는 하지만 가르치는 것은 처음이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나 감응도가 어느 정도인지 판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 다음은 연희! 이리 와서 앉아.”
“네에.”
연희에 이어 이리냐도 지현과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이 정도면 마나 감응도가 좋은 거겠지.’
현수는 짐짓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마나심법이란 걸 전수해 줄 거야. 이걸 시전하면 처음엔…….”
현수는 예전에 본인이 느꼈던 바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어느 누구에게도 전수해 줘서는 안 된다고 했다.
설사 자식이라도 자신의 허락 없이 가르치지 말라고 했다.
이 밖에 지켜야 할 수칙을 알려줬다. 마법사가 된 뒤 자신이 한 약속을 깨면 모든 게 허사라는 것 등이다.
“아공간 오픈! 이실리프 오픈!”
현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시커먼 공간 속에서 이실리프 마법사가 튀어나와 둥실 떠오른다.
셋은 화들짝 놀라며 물러앉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나심법 부분을 찾아 내용을 확인한 뒤 구결을 전수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