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1
1장 고마워! 디오나니아
“자, 이제 잎사귀를 채취하자. 아리아니, 시작하기 전에 얘들한테 어떻게 해야 덜 아픈지 물어봐 줄래?”
식물도 통증을 느끼고 보은하겠다고 꽃을 피우니 웃기지만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벌써 물어봤어요. 근데 저 많은 걸 언제 다 찢어요? 수액도 받아야 한다면서요.”
“그래도 해야지. 어떻게 해. 꼭 필요한 건데.”
“혼자 하려면 몇날 며칠이 걸릴지 모를 일이에요. 그냥 계세요. 제가 정령들 불러서 시킬게요. 주인님 혼자 2만 5천 그루나 되는 걸 언제 다 일일이 찢고 있어요. 안 그래요?”
아리아니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그래주면 나야 고맙지. 근데 어쩌려고?”
“이번엔 물의 요정을 부를 거예요. 걔들이 조심스럽게 찢고 수액을 받으면 그리 많이 걸리지 않을 거예요.”
“그래? 고마워!”
“쳇! 근데 나는 사랑하지 않나 봐요.”
아리아니의 뜬금없는 말에 무슨 뜻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엔 ‘미안하다’, ‘고맙다’ 이런 말 하는 거 아니라면서요.”
“아, 그거? 미안. 내가 깜박했다.”
“또 미안이라고 하셨어요. 아무래도 주인님은 절 사랑하지 않으시나 봐요.”
“아, 아냐! 그럴 리가 있어? 내가 아리아니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데. 몰랐어? 참, 당근주스 줄까? 식혜도.”
“호호! 좋아요. 주세요.”
아리아니는 언제 삐쳤었느냐는 듯 입맛을 다신다.
수천 년이나 존재했지만 너무나 순진무구하다.
아공간에서 당근주스와 식혜를 꺼내주면서 왠지 미안한 기분이 든다. 순진한 어린아이를 꼬드겨 앵벌이1)시키고 그 돈을 빼앗는 악덕 양아치가 된 기분이다.
“채수병인지 뭔지 뚜껑이나 열어주세요.”
“그래, 알았어.”
아공간에서 4리터짜리 채수병을 몽땅 꺼내 뚜껑을 열기 시작했다. 무려 3만 개나 되기에 엄청 빨리 움직여야 했다.
그러는 사이 아리아니는 물의 상급 정령 엔다이론을 불러냈다. 그리곤 뭔가 지시를 내린다.
알아들을 수 있는 건 될 수 있으면 위쪽의 잎사귀들을 찢어내라는 것이다. 조금 있다 먹이를 줄 텐데 땅바닥을 돌아다니는 것이라 아래쪽을 찢어내면 곤란하기 때문일 것이다.
실라이론이 금발이라면 엔다이론은 연한 푸른빛이 감도는 금빛 머리카락을 가졌다. 물론 알몸의 처녀 모습이다.
신장은 170㎝ 정도이며 대단히 아름답다.
잠시 후, 상당히 많은 운다인과 운디네가 나타난다. 엔다이론보다는 어린 듯 보인다.
엔다이론이 20세 처녀라면 운다인은 16세 소녀이고, 운디네는 8세 꼬맹이다. 이들은 현수가 꺼내놓은 채수병을 챙겨 들고 일제히 날아갔다.
“주인님, 마나 좀 쓸게요.”
“응? 그, 그래!”
수백이 족히 넘는 알몸이 눈앞을 어지럽히고 있다. 현수는 멍한 시선으로 엔다이론을 보고 있다.
차마 운다인과 운디네에겐 시선을 줄 수 없어서이다.
그러는 사이 켈레모라니의 비늘로부터 마나가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아리아니는 이것을 이용하여 정령력을 뿜어내 공급하고 있다. 그런데 상당히 많은 양이 빠르게 소모됨이 느껴진다. 정령이 많아서 이러는 듯싶다.
“주인님, 아공간 여세요.”
“오케이!”
아공간이 열리자 디오나니아 잎사귀가 들어가기 시작한다.
“아리아니, 수액을 담은 병은 아공간에 넣지 말고 여기 내려놓으라고 해. 뚜껑 덮어야 하니까.”
“네, 알았어요.”
잠시 후, 수액이 가득 찬 채수병이 주변을 에워싸기 시작한다. 모든 일을 마친 것은 세 시간쯤 지나서이다.
현수는 2만 5천 개의 채수병을 아공간에 담았다. 하나당 4리터씩이니 10만 리터나 채집한 것이다.
디오나니아의 잎사귀 10만 장도 얻었다. 이 정도면 당장 급한 물량은 해결할 듯싶다.
“고마워, 엔다이론, 운다인, 운디네.”
혼자 했으면 얼마나 오래 걸렸을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 일을 정령들의 도움으로 아주 쉽고 빠르게 마쳤다.
하여 진심을 담아 말하며 환히 웃어주었다.
“어머! 저희가 보이세요?”
엔다이론 역시 실라이론처럼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이번에도 아리아니가 끼어든다.
“내 주인님이시잖아, 이 바보야! 바람하고 물은 조금 멍청한가? 다음에 불과 땅도 그런지 알아봐야겠어.”
“아! 그, 그렇군요.”
엔다이론이 낯을 붉힌다. 졸지에 바보 소리를 들어 부끄러운 것이다.
“다음에도 또 도와줄 거지?”
“네. 아리아니님의 주인이시니 당연히 그래야지요. 자주 불러주세요.”
“그래. 또 봐.”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모두들 환히 웃으며 정령계로 돌아간다.
“자, 이제 내 차례인가?”
받은 게 있으면 줘야 한다. 현수는 디오나니아 서식지를 20등분한 뒤 각각에 쥐 채집 틀 하나씩을 열어놓았다.
이번에도 입구가 열리자마자 얀디루와 라니냐가 수북하게 쌓여 있는 중심부를 향해 일제히 움직인다.
펄럭, 펄럭! 펄럭, 펄럭……!
기다렸다는 듯 사냥이 시작되었다. 잎사귀에 휩싸인 생쥐들은 빠져나오려 발버둥치지만 성공하는 녀석은 거의 없다.
“으으, 더러운 냄새! 주인님!”
“알았어. 저쪽 멀리 물러나 있어.”
시궁창 냄새와 더불어 악취가 진동하자 아리아니가 코를 잡고 뒤로 물러난다.
디오나니아의 사냥 솜씨는 상당히 좋았다. 중심부에 도달하는 녀석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이제 갈까?”
“네, 가요. 열매가 맺히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니까요.”
“그래, 가자. 트랜스퍼 디멘션!”
샤르르르르릉―!
현수와 아리아니가 사라진 후에도 생쥐 사냥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아르센력 2855년 12월 16일에 일어난 일이다.
* * *
“생각해 보니까 고맙네.”
“누가요? 저요? 우리끼린 그런 말 안 하기로 했잖아요.”
“아니, 아리아니 말고 디오나니아 말이야.”
“……!”
아리아니가 살짝 삐친 듯 대꾸도 하지 않는다.
“잎사귀도 주고, 수액도 주고, 꽃도 주었는데 열매까지도 준다잖아.”
“치, 그게 다 제가 있어서 그런 거예요. 저는 실라이론도 부르고 엔다이론도 불렀잖아요.”
자기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음을 알아달라는 표정이다.
현수는 짐짓 장난기가 동했지만 애써 참았다.
장난칠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리아니의 영혼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순결할지도 모른다.
이런 건 한번 잘못되면 영원히 삐칠 수 있다. 그렇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맞아. 그러고 보니 아리아니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네. 근데 내가 왜 그걸 까먹고 있었지? 하지만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은 안 할게.”
“왜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크게 뜬다.
“그야 내가 아리아니를 너무 사랑하니까 그렇지. 우린 서로 사랑하는 사이지?”
아리아니는 30㎝ 정도 되는 예쁜 인형 같다. 그렇기에 이토록 쉽게 이야기한 것이다.
“네에? 어머, 부끄러워라. 숙녀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아이, 부끄러워요!”
진짜 부끄러움을 느끼는지 고개를 숙이며 몸을 배배 튼다.
“아무튼 내가 고맙다고 말하지 않거나 미안하다고 사과하지 않아도 앞으론 내게 뭐라 하지 마. 아리아니는 어떤지 몰라도 난 너를 사랑하니까.”
“…네에, 고마워요. 어머, 아니에요. 고맙지 않아요.”
어찌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가!
사랑하기에 고맙다는 말은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면서 당황한 듯 얼른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모습이 몹시 귀여웠다.
현수는 피식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왠지 속이는 기분이 든 때문이다.
‘그나저나 수액이 엄청 많네.’
화장품은 섬유유연제 용기 같은 것에 넣어서 파는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찔끔 넣어서 아주 비싼 값에 판다.
디오나니아 수액 10만 리터는 확보되었다. 트롤 250여 마리의 체액은 마리당 10리터 정도는 뽑아낼 수 있다.
둘을 합치면 10만 2,500리터나 된다.
화장품 하나에 이것 10㎖씩 넣는다면 1,025만 개를 생산해 낼 수 있다. 5㎖라면 2,050만 개나 된다.
“아리아니, 나중에 말이야. 디오나니아에게 또 잎사귀와 수액을 달라고 하면 줄까?”
“으음, 아마도요. 대신 걔들이 좋아하는 먹이를 여러 번 주셔야 할 거예요.”
“아, 그래? 근데 가능성이 있어?”
“제가 누구예요? 숲의 요정이에요. 사실 걔들은 제가 하라고 하면 찍소리 못하고 들어야 하는 애들이에요.”
모처럼 큰소리칠 기회를 잡았다는 듯 두 손은 허리춤에 놓여 있고 얼굴엔 의기양양한 빛이 가득하다.
“알았어. 그럼 나중에 또 부탁할게.”
“언제든 말씀만 하세요.”
* * *
“어서 오게, 김 서방!”
“네, 장모님! 그간 안녕하셨지요?”
“그럼, 그럼! 어서 들어오게.”
현관문을 열어준 안숙희 여사는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장인어른은요? 퇴근하셨어요?”
“그렇다네. 지금 막 퇴근해서 옷 갈아입는 중이시네.”
“아, 네.”
“엄마, 저도 왔어요!”
“그래, 어서 와, 우리 예쁜 딸!”
뒤따라 들어온 지현이 안 여사의 품에 폭 안긴다. 부드럽게 등을 다독이는 장모의 얼굴은 몹시 기분 좋은 듯하다.
“장모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이거 받으세요.”
“그래, 근데 그게 뭔가?”
“아버님 좋아하시는 술을 좀 가져왔습니다.”
“술을? 간에 좋지도 않은…….”
안 여사가 뭐라 말하려 할 때 현수가 먼저 입을 연다.
“아! 이 술은 마시면 간이 나빠지는 게 아니라 거꾸로 좋아지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려 마시면 건강해지는 술입니다.”
“에이, 세상에 그런 술이 어디 있나? 아무튼…….”
현수가 마법사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렇기에 미심쩍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 든다.
이때 안방 문이 열리고 권 고검장이 나타난다.
“아! 김 서방 왔는가?”
“네, 장인어른. 저희 왔습니다.”
현수가 꾸벅 절을 하자 고검장이 아내를 바라본다.
“여보, 우리 김 서방이랑 지현이 먹을 밥은?”
“다 되었어요. 식탁으로 오세요.”
안 여사가 몸을 돌리자 장인이 눈짓한다. 부탁했던 술을 가져왔느냐는 표정이다.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우리 마나님 생신 축하 식사를 해보실까?”
“하하! 네, 가시죠.”
식탁으로 간 고검장의 눈이 커진다. 한눈에 보기에도 상당히 값비싸 보이는 크리스털 술병 때문이다.
“김 서방, 이 술은 뭔가?”
“마시면 간이 좋아지는 술입니다. 스트레스 해소에도 좋고 숙면을 취하실 수도 있어요. 뿐만 아니라 피부 질환이 개선되며, 무엇보다도 치매 예방 효과가 있는 겁니다.”
“아, 그래? 세상에 그런 술도 있나?”
“네. 향을 맡아보시면 금방 느끼실 겁니다.”
“그래? 그렇담 한잔 해봐야지. 자, 따르게.”
뿅! 쪼르르륵―!
뚜껑을 뽑자 나직한 소리와 더불어 숲의 진한 향기가 번진다. 잔이 차감에 따라 그 농도가 조금씩 더해간다.
“흐으음! 무슨 술이기에 이런 향내가 나나?”
“좋으니까 그렇지요. 자, 장모님도 한잔 받으세요.”
“아냐. 술은 무슨 술. 난 술 잘 안 마시네.”
“마누라, 그러지 말고 한잔 받아. 오늘 생일이잖아.”
“그럼 그래볼까요?”
얼른 술을 따라줬다. 그리곤 지현과 본인의 잔도 채웠다.
“자, 우리 안숙희 여사의 생일을 위하여!”
“위하여!”
쭈우우우욱―!
“캬아! 좋다!”
권 고검장은 비강(鼻腔)을 통과하는 주향에 심신이 상쾌해짐을 느끼고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낸다.
“어머! 이 술은 정말…….”
“흐으음! 이거 술 맞아요?”
장모와 지현 역시 이게 대체 무슨 술이냐는 표정이다.
“이게 말이죠, 아프리카 오지에 사는 원주민으로부터 얻은 건데요. 그게…….”
현수는 적당히 거짓말을 했다.
원주민의 조상 중 누군가가 전혀 오염되지 않은 갖가지 열매를 조합하여 술을 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