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4
경비대장이 또 고함을 지른다.
놀란 대원들이 즉시 흩어졌지만 이곳은 뒤질 곳도 없다.
그냥 T자형 복도 양 끝에 경비원들이 은신할 수 있는 허리춤까지 올라오는 시멘트 구조물 하나가 전부인 곳이다.
“대장님, 고함 좀 그만 지르십시오. 보세요. 여기에 뭐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
촤르르륵! 촤르르륵!
“근데 이건 왜 이래?”
여전히 다이얼이 돌고 있는 소리가 들린다.
“대장님, 금고에 이상이 있는가 봅니다.”
“그럼 가서 금고 담당 모시고 와.”
“네, 알겠습니다.”
경비대원 셋이 얼른 뛰어간다.
이 금고를 열려면 두 명의 금고 담당자가 양쪽 구멍에 열쇠를 꽂고 동시에 돌려 일정한 위치에 맞춰야 한다.
그리고 일곱 개의 다이얼을 모두 맞춰야 한다.
제한 시간은 5분이다. 그 시간 내에 다이얼 일곱 개가 모두 맞지 않으면 24시간 동안 결코 열리지 않는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중년 사내 셋이 왔다.
“경비대장, 다이얼이 고장이라고요?”
“네, 아무래도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보십시오. 저절로 돌아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촤르르륵! 촤르르륵!
금고 담당자들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셋은 이런 일에 익숙하기에 눈빛으로 신호를 보내는가 싶더니 금방 금고 문을 열어젖힌다.
육중한 문이 열리자 경비대장이 고함을 지른다.
“뭐해? 어서 안으로 들어가 수색해!”
“네, 알겠습니다!”
금고 안으로 들어간 경비대원들이 샅샅이 뒤졌지만 이상이 있을 리 없다.
이런 와중에 현수 역시 금고 내부로 들어선다.
산더미처럼 쌓인 현금더미 위로 올라간 현수는 분주히 오가는 경비대원들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대장님!”
“네,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래도 금고 다이얼에 문제가 발생한 듯합니다.”
“알았다. 모두 철수!”
“네! 철수!”
경비대원들이 모두 빠져나가자 경비대장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내부를 살피곤 나간다.
쿠우웅―! 촤르륵! 촤르르르륵! 촤르륵! 촤르르륵!
육중한 금고문이 닫힌 후 다이얼이 제멋대로 돌아간다. 그와 동시에 짙은 어둠이 사위를 감싼다.
“깜깜해서 멜라토닌은 잘 분비되겠군. 하지만 너무 깜깜하잖아. 라이트!”
금방 환한 빛이 금고 내부를 밝힌다.
“많군.”
금고는 여러 개의 격벽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중 엔화가 제일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달러화도 많고 유로화와 위안화도 제법 있다.
다른 한쪽엔 골드바가 쌓여 있다.
“여기도 무게 감지 장치가 있겠지?”
대꾸하는 이가 있을 리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공간 오픈! 입고.”
바닥을 뛰어다니며 금고 안의 모든 것을 쓸어 담았다.
예상대로 바닥엔 무게 감지 장치가 있는 모양이다.
삐이이이잉! 삐이잉! 삐이이이이잉!
요란한 경보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이것에 신경 쓰지 않고 남은 것을 모두 아공간에 담았다.
그리곤 입구로 갔다.
“멜트(Melt)! 씰(Seal)! 멜트! 씰! 멜트! 씰! 멜트! 씰!”
금고 문은 특수 금속이다. 그런데 이것이 녹는다. 멜트 마법의 위력이다. 그리고 접합이 된다. 봉인 마법 때문이다.
삐이이이잉! 삐이잉! 삐이이이이잉!
요란한 경보음 속에서 누군가 금고 문을 열려는 듯하다.
촤르르, 철커덕! 촤르르, 철커덕―! 촤르르르! 철커덕!
하지만 다이얼은 돌아가려다 멈춘다.
멜트 마법에 녹아서 이웃한 판과 접합된 때문이다. 이 정도면 거의 용접 수준이다. 이 금고의 문은 이제 정상적인 방법으론 열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흐음! 깨끗하군. 참, 흔적은 남겨 드려야지.”
현수는 아공간에 담긴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지나제 종이에 지나제 프린터로 인쇄한 것이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다.
不 要 貪 圖 釣 魚 島
지나의 공식 문자인 간체로 쓰인 ‘조어도를 탐내지 말라’는 뜻이다.
우리가 조어도로 발음하는 이 섬을 일본에선 센카쿠 열도[尖角列島]라 부르고, 지나에선 댜오위타이라 부른다.
일본 오키나와에서 서남쪽으로 약 400㎞, 지나 대륙에서 동쪽으로 약 350㎞, 대만에서는 약 190㎞ 떨어진 동지나 해상에 위치한 자그마한 섬이다.
이 섬이 영토 분쟁의 격랑 속에 휘말린 이유는 인근 해역의 석유 매장 가능성 때문이다.
또한 배타적 경제수역 및 대륙붕 경계선과 관련이 있다.
아울러 중동과 동북아를 잇는 해상교통로이자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양국은 현재에도 이 문제 때문에 첨예하게 대립 중이다.
따라서 현수가 남긴 이 종이 한 장이 어쩌면 두 나라 간의 전쟁을 야기할 수도 있다.
“그건 니들끼리 알아서 할 일이고. 자, 다음!”
아공간에서 꺼낸 C4는 금고의 가장 얇은 곳에 놓였다. 메탈 디텍션 마법을 쓰면 금방 알 일이다.
“앱솔루트 배리어!”
절대 방어 마법이 구현된 가운데 C4가 품고 있던 모든 것을 내놓는다.
콰콰아아아앙―!
우수수! 우수수수!
금고 철판이 찢기면서 외부를 감싸고 있던 콘크리트까지 손상을 입어 시멘트 가루가 뿌옇게 일어난다.
“디그! 디그! 디그! 디그!”
마법으로 흙을 푹푹 떠서 사람 하나가 다닐 만한 통로를 만들었다. 텔레포트를 쓰면 간단히 빠져나가지만 혼란을 주기 위한 조치이다.
“디그, 디그, 디그! 디그! 디그! 디그!”
미쓰비시 도쿄 UFJ 본점으로부터 약 100m 떨어진 곳까지 통로를 만들었다. 아무런 지지대 없이 흙만 퍼낸 것인지라 작은 진동만으로도 무너지게 될 것이다.
파다 보니 하구관로와 닿게 되었다.
“으윽, 냄새. 하지만 차라리 잘되었군.”
은행과 경찰은 누군가 이곳으로부터 통로를 뚫어 금고를 털었을 것이라 추측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곳을 통해 빠져나간 후 하수가 흘러들도록 한 것으로 오인하게 될 것이다.
“텔레포트!”
샤르르르릉―!
현수가 하수관로에서 텔레포트 마법으로 사라지고 나자 시커먼 구정물이 여태 파놓은 통로를 따라 흘러간다.
남겨놓은 종이야 젖겠지만 그건 알 바 없다.
“으으! 냄새. 클린!”
몸에 밴 하수도 냄새를 빼곤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오늘 아침 당도했던 총리 관저 인근 빌딩의 옥상이다.
조금 전 C4의 강력한 폭발로 인한 진동 때문에 지진인 줄 알고 대피했던 사람들이 되돌아오는 모습이 보인다.
고개를 돌려보니 총리 관저 쪽도 난리가 났다. 수십 명이 뛰어다니고 있다.
물론 사라진 고위 관료들을 찾는 중이다.
“온 김에 재특회 놈들도 데려가야지. 텔레포트!”
샤르르르릉―!
지난해 재특회원들은 동경 번화가에서 시위한 바 있다. 그때 외친 구호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한국인을 죽이자!
한국인에게 독을 먹여라!
한국 학교에 대한 재정 지원을 폐지하라!
한국 여자를 강간하라!
한국인은 일본에서 나가라!
종군위안부는 없다!
참고로 재특회 회원은 1만 3,000여 명으로 추산된다.
어쨌거나 이곳은 재특회 동경지부 사무실이다.
일전에도 시위를 마치고 이곳에 모여 회합 중이던 200여 명을 아공간에 담은 바 있다.
“이시하라 신타로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극우 단체인 유신회 공동 대표인 하시모토 도루도 있으면 좋겠지만 그는 오사카 시장이다.
이 시각에 동경에 있을 리 없다.
이시하라 신타로는 전 동경도지사이다. 현직에 있지 않으니 어쩌면 이곳에 있을 수도 있다. 하여 2층으로 올라갔다.
지부장실 밖에서 엿듣기 마법을 구현했다.
“이브즈드랍!”
누군가 통화하는 모양이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요. 오늘도 합니다. 네, 네! 11시 집합입니다. 물론입니다. 그럼요! 당연한 일입니다. 네, 대일본제국은 영원히 번영해야 합니다.”
음성으로 이시하라인지는 알 수 없다.
“아, 신타로님은 내일 오신답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대일본제국 만세! 황국 신민의 의무입니다. 또 뵙겠습니다.”
철컥―!
통화가 끝났다. 그런데 이시하라 신타로는 없다.
“개자식! 명도 더럽게 기네. 아무튼 곧 모인다 이거지?”
시각을 확인한 현수는 편안한 곳에 자리 잡았다. 그리곤 드나드는 면면을 살폈다.
한국인에 비해 확실히 키가 작다는 느낌이다.
‘하긴 이러니 왜(矮)놈이라 불렀지.’
참고로 왜는 키가 작다는 뜻이다.
남겨진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의 평균 신장은 161∼166㎝이고 일본인의 평균은 155∼161㎝이다.
그런데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사진을 보면 사무라이의 신장은 130∼150㎝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된다.
2013년 우리 국민 평균 신장을 살펴보면 8∼9세가 129.1㎝이고, 12∼13세가 151.8㎝이다.
따라서 임진왜란 때 우리 국토를 유린했던 사무라이는 지금으로 치면 8∼13살짜리 어린아이만 했다는 뜻이다.
‘쬐끄만 자식들이 겁도 없이 감히…….’
현수는 지옥도에 있는 총알개미4)를 떠올렸다.
이 녀석에게 물리면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받게 된다.
어쩌면 일제강점기에 우리 독립군이 당한 고문보다도 더욱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지옥도엔 그런 놈들이 그야말로 지천이다.
이놈들을 그곳에 데려다 놓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니 절로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어린다.
재특회 동경지부에 오늘 시위대로 모인 인원은 239명이다. 아까 전화를 받은 자가 동경지부장이라 한다.
“자, 이제 조선 놈들을 쫓아내도록 시위를 합시다!”
“와아아! 조선 놈들을 모조리 죽여라! 와아아!”
“조선 계집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강간한 뒤 죽여 버리자!”
들고 있는 피켓 등을 흔들며 고함을 지르는 걸 보니 반쯤 미친놈들 같다.
이들의 머리 위로 날아오른 현수는 즉시 아공간을 열었다.
“아공간 오픈! 입고! 입고!”
“헉! 저건 뭐야?”
“으악! 저건 뭐지?”
허공에 일렁이는 시커먼 공간 속으로 사람들이 빨려들자 가장자리에 있던 놈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선다.
“홀드 퍼슨! 홀드 퍼슨! 홀드 퍼슨!”
도주하려 했지만 발이 떼어지지 않는다.
“아앗! 왜 이래?”
“내 발이, 내 발이 안 떨어져! 으아악!”
결국엔 아무도 도주하지 못했다.
“아리아니, 놈들은?”
“잘 있어요. 이놈들을 냄새가 덜 나서 좋기는 한데 전부 발육 부진인 거예요? 왜들 이렇게 작아요? 애들인 거예요?”
“아니. 왜놈들이라 그래. 아무튼 가자.”
일본을 떠난 현수가 지옥도에 당도한 것은 30분가량 지나서이다.
총알개미 역시 현수의 존재감을 느끼고 일제히 물러선다. 가이아 여신의 힘이 이곳까지 미치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이래주니 좋기는 하다.
안 그렇다면 드래곤 피어 마법을 써야 하는데 개미들에게 먹힐지는 미지수이다.
3장 제11전투비행단에서
“아리아니, 얘들 뒤로 간 것도 여신의 가호 때문인 거야?”
“글쎄요. 이번엔 저도 조금 아리송해요. 개미들은 잘 안 먹히거든요. 특히 얘들처럼 전투적인 것들은 더해요.”
“아무튼 좋아. 아공간 오픈!”
말 떨어지기 무섭게 컨테이너 박스가 튀어나온다.
“언락!”
철컥―!
와당탕탕! 와당탕탕!
안에 있던 녀석들이 일제히 쏟아져 나온다. 모두들 겁먹은 표정이다. 조금 전까지 재특회 동경지부 강당에 있었다.
그런데 이곳은 아무리 봐도 정글이다. 하여 모두가 웅성거리며 어리둥절할 때다.
“모두 들어라!”
허공에서 유창한 일본어가 들리자 모두의 고개가 들린다. 그중엔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상도 포함되어 있다.
“나는 한국인 김현수라 한다. 아울러 지구에 단 하나밖에 없는 마법사이기도 하지.”
현수가 잠시 말을 끊자 일제히 웅성거린다.
“무슨 개소리래? 근데 저 자식은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