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2
“기럼요, 기럼요. 당연한 말씀이디요.”
김정은은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배석해 있는 권력자들 역시 흡족하다는 표정이다.
재원이 없어 개발하고 싶어도 개발하지 못하는 것이 공화국의 실정이다. 그런데 남한의 사업가가 자기 돈으로 개발 사업을 벌여준다는데 왜 싫겠는가!
그러는 가운데 자신들에게도 어느 정도 떨어질 것이다. 물론 김칫국 먼저 마시는 생각이다.
“참으로 유익한 말씀이셨습네다.”
“그렇지요? 참, 제가 여러분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가져온 게 있습니다.”
“기래요? 뭐디요?”
“전에 왔을 때 백두산 들쭉술이 아주 좋았습니다. 하여 귀한 술을 조금 가져왔습니다. 정력에 좋은 겁니다.”
정력이라는 말에 모두들 눈이 번쩍 뜨이는 모양이다. 북한 사람도 남한과 같은 민족이라는 것이 확연하다.
“지금쯤 밖에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들여오라고 전해주시겠습니까?”
“이보라, 군관 동무. 날래 가서 말 전하라우.”
“네, 알갔습네다.”
문 가까이 서 있던 정복차림 군관이 거수경례를 하고는 후다닥 튀어나간다.
잠시 후, 일행은 영빈관 연회장으로 모두 이동했다.
현수가 김정은 등과 만나 이야기하는 동안 테리나는 러시아 대사관의 협조를 받아 이 연회를 준비했다.
물론 최철 대좌가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녔다.
연회에 준비된 술은 엘프주이다. 마시면 간이 좋아지는데다 주향 또한 일품인 술이다.
“이 술은 제가 아프리카에서 어렵게 구한 겁니다. 담은 시기가 약 500년 전으로 추정되는 귀한 겁니다.”
“네에? 이거이 500년이나 된 술이라는 겁네까?”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말이다.
“네. 500년간 숙성된 거 맞습니다. 드셔보시면 압니다.”
연회장 소속 아가씨들이 분주히 오가며 술을 따라 모두의 잔을 채우곤 재빨리 뒤로 물러난다.
“위원장님, 외람되지만 오늘은 제가 먼저 건배를 제의해도 되겠습니까?”
“아! 물론입네다. 먼저 하시디요.”
“감사합니다.”
현수는 김정은에게 정중히 예를 갖추곤 잔을 들었다.
“여러분이 계시기에 안주에 이실리프 유화단지 및 기계공업단지를 건설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습니다. 우리의 발전된 내일을 위해 건배를 제의합니다.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모두가 ‘위하여’를 외치곤 잔을 비운다. 이때 현수의 입술이 달싹인다.
“매스 앱솔루트 피델러티!”
샤르르르르르릉―!
눈에 보이지 않는 마나가 빠른 속도로 북한 수뇌부의 몸속으로 스며든다.
김정은은 물론이고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박봉주 내각 총리, 최룡해 인민군 총정치국장, 그리고 리영길 총참모장과 장정남 인민무력부장 등이다.
뒤쪽에 서 있는 아가씨들과 테리나에겐 가지 않도록 범위를 제한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12장 니들이 엘프주 맛을 알아?
절대충성 마법이 구현되었으니 이제 어느 누구도 현수의 의중을 거스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또한 하려는 일을 방해하지도 않을 것이다.
절대왕정 시절에 국왕에게 충성을 바치는 충신 같은 마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캬아아∼! 술맛 한번 뎡말 기가 막힙네다.”
“캬아! 맞습네다. 이런 술은 난생처음입네다. 가슴이 뻥 뚫리는 상쾌함이 느껴집네다.”
“크흐으! 동무도 그런 기분을 느꼈습네까? 나는 10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듯 후련해졌습네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술이 있디요? 뎡말 대단한 술입네다. 이거 우리 들쭉술은 명함도 못 내밀겠습네다.”
“길티요. 이게 훨씬 낫습네다.”
모두들 한마디씩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구동성으로 말한 것처럼 상쾌하면서 후련함이 느껴졌고, 자연의 청량함과 신선함, 그리고 말로 형언하기 힘든 시원함이 동시에 엄습한 까닭이다.
김정은도 예외는 아니다. 딱 한 잔 마셨을 뿐이지만 진한 여운이 느껴져 말을 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흐으으음!”
비강을 통해 빠져나가는 주향이 아깝다는 느낌이다.
“오늘 김현수 동지 덕분에 새로 개안한 느낌입네다.”
“맞습네다. 세상에 이런 술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네다. 이 술의 이름은 뭡니까?”
모두들 이름과 산지를 알기만 하면 거금을 들여서라도 사오겠다는 생각인 모양이다.
“이 술은 세상에 딱 한 통밖에 없습니다. 그중 일부로 이것과 같은 걸 만들기 위한 연구 중에 있지요.”
모두들 현수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
“아프리카 정글 깊숙한 곳에 위치한 동굴에서 발견하였기에 정식 명칭은 없습니다. 저는 이 술을 대량 생산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하여 생각해 둔 이름은 있습니다.”
“뭡네까, 그 이름이?”
“엘프주입니다.”
“엘프? 엘프가 뭡네까?”
남한과 달리 북한엔 판타지 소설 같은 것이 보급되어 있지 않다. 그렇기에 엘프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다.
“엘프는 말이지요…….”
잠시 엘프에 관해 설명을 해줬다. 모두들 눈빛이 초롱초롱하다. 처음 듣는 이야기이니 신기한 모양이다.
“그래서 엘프주라 이름 지은 겁니다. 술맛 좋지요?”
“아! 기럼요. 뎡말 일품이었습네다.”
“한데 술은 이게 다입네까?”
기가 막힌 맛인데 딱 한 잔씩만 마시니 감질난 모양이다.
“아닙니다. 제가 가진 것 중 절반을 가져왔습니다. 충분히 드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주의하실…….”
현수는 많이 마시지 말 것을 권했다.
간이 좋아지고 치매 예방 등의 효과를 설명해 주고 남기면 다음에 마실 수 있음을 이야기한 것이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인다. 오늘 하루 마시고 마는 것보다는 다음에 또 마시는 것을 택한 것이다.
연희가 끝날 무렵 김정은에게는 바이롯 한 병을 주었다. 물론 엄청나게 귀한 것이라고 포장을 했다.
하여 100년 묵은 산삼보다도 더 좋은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절대충성 마법 덕분이다.
“수고하셨어요.”
“그래, 협정서 초안은 다 작성되었어?”
“네, 여기요.”
현수는 테리나가 넘긴 이실리프 기계공업단지 설립에 관한 협정서를 면밀히 검토했다.
대단위 기계공업단지 신설에 관한 내용이라 협정할 것이 상당히 많기에 서류는 제법 두툼했다.
이런 걸 불과 몇 시간 만에 만들어내는 걸 보면 테리나는 확실히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재이다.
읽는 동안 커피를 내온다. 그리곤 바로 곁에 앉아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있다. 무엇이든 물으면 설명해 주려는 것으로 알고 내버려 두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자신이 서류만 보고 있어서 졸려 그러는가 싶어 내버려 두었다.
그런데 어깨에서 축축함이 느껴진다.
“……!”
왠지 이상하여 살짝 고개를 틀어 바라보았다.
서류를 읽는 정도의 움직임이었기에 테리나는 현수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다.
그런데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 뚝뚝 떨어져 앞섶은 물론이고 치마까지 적시는 중이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정도인 것이다.
다시 서류에 시선을 돌렸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 애처로운 여인을 어찌할 것인가 생각해 봐야 하는 상황이다.
지현과 연희, 그리고 이리냐에게 더 이상의 여인은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그렇기에 아무리 애처롭고 마음이 흔들려도 받아들일 테니 울음을 멈추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골치가 아프다. 그런데 방법이 없다.
한편, 테리나는 저도 모르게 솟는 눈물의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협정서 초안을 읽는 현수의 모습은 멋지다.
주어진 일에 열중하는 사내의 모습인 것이다.
이런 사내의 사랑을 받으며 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쏟아지듯 눈물이 솟은 것이다.
한편으론 자신의 처지가 한심했다. 다른 여자의 남편이나 탐내고 있는 현실이 마뜩치 않은 것이다.
다른 사내도 있을 것이란 생각을 안 해본 게 아니다.
현수보다 더 잘생긴 사내도 많다. 하여 그런 사내들과의 인연을 만들어보려 했다.
그런데 안 된다. 아무리 매너 좋고 잘생겼으며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내라 하더라도 눈에 들어오지 않은 때문이다.
왜 그런가를 생각해 보니 본인의 마음은 이미 누군가에게 완전히 점령당해 있다.
화인이 찍히듯 현수가 자리 잡아 다른 사내는 조금도 틈을 비집고 들어올 수 없을 정도인 것이다.
하여 정신과 의사를 찾아보기도 했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미친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이다.
그곳에서 많은 위로를 받았고 나름대로의 처방도 받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
큐피드가 쏜 화살은 너무 단단하고 깊숙이 박혀 있어 죽기 전에는 뺄 수 없다는 느낌이다.
바라만 보는 사랑은 슬프고, 외롭고, 쓸쓸하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을 붕괴시킨다. 그래서 젊은이들의 자살 이유 중 22%가 짝사랑의 외면 때문이다.
테리나는 샘처럼 솟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어젯밤에도 이랬다. 하지만 손을 움직여 닦아내지 않았다.
사랑하는 현수가 눈치채면 마음 불편해할 것 같아서이다.
“……!”
현수는 잠시 어금니를 악물었다.
스스로의 마음을 굳히기 위함이다. 지현과 연희, 그리고 이리냐에게 한 약속을 지키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그래서 다시 협정서 초안을 읽기 시작했다. 문자는 읽혀지지만 내용은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도 읽었다.
차츰 내용이 이해된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테리…….”
말을 하려다 멈췄다. 잠든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이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생각대로 눈을 감고 있다.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여 테리나를 소파 위에 눕혔다.
침대로 옮기려다간 깰 것 같아서이다. 이불을 가져다 살그머니 덮어주었다. 눈물 젖은 얼굴이 보인다.
안쓰럽고, 애처롭다.
이 순간 테리나는 잠든 것이 아니었다. 슬픔에 북받쳐 정신을 잃고 혼절한 상태인 것이다. 이런 상태가 심해지면 성녀처럼 의식을 찾지 못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어쨌거나 현수는 이런 상황을 모른다. 하여 샤워도 하고 서류들을 꺼내 다시 읽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이상하네.”
사람이 잠들면 뒤척인다.
일정한 자세가 계속되면 침대나 이불에 눌린 부분이 압박을 받아 혈액순환이 나빠지기 때문이다.
스웨덴 릴하겐 임상병리연구소의 통계에 따르면 하룻밤에 성인이 뒤척이는 횟수는 평균 80∼100회 정도이다.
그런데 테리나는 전혀 움직임이 없다. 호흡을 하지 않는다면 죽은 것으로 오인할 정도이다.
“테리나! 테리나!”
거푸 이름을 불렀으나 반응이 없다. 문득 이상함을 느낀 현수는 얼른 흔들어보았다.
“테리나! 테리나! 자는 거야?”
헝겊 인형처럼 흔들리기만 할 뿐이다.
“이런 젠장! 또…….”
성녀와 같은 케이스라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문제이다. 가이아 여신은 이곳엔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테리나는 성녀도 아니다.
“어웨이크! 테리나!”
“끄응!”
“휴우!”
무심코 시전한 마법에 반응하자 나지막한 한숨이 나온다. 안도의 한숨이다.
한편, 깊은 혼절의 나락 속에 있던 테리나는 마음속 지옥을 경험하고 있었다.
펄펄 끓는 기름 속에도 빠졌고, 뜨거운 불판 위를 구르기도 했다. 가시달린 채찍에 매를 맞았으며, 커다란 바위에 짓눌려 신음을 토하기도 했다.
무시무시한 괴물에게 쫓기기도 했다.
가장 마음을 아프게 한 건 현수가 지현과 연희, 그리고 이리냐에게만 다정하게 대하고 자신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었다.
너무 힘들고, 무섭고, 괴롭고, 외로웠으며, 가슴이 아파 그냥 죽어버리고 싶었다. 이때 밝은 빛이 비췄다. 허공으로 시선을 돌리자 현수가 자신을 부르는 음성이 들린다.
그리곤 깨어난 것이다.
“여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