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3
“괜찮아?”
아주 다정한 음성이다. 그리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시선이 마주치자 눈물이 또 샘솟는다.
“흐흑! 흐흐흐흑!”
뜨거운 눈물이 두 볼을 적시며 흘러내린다.
그럼에도 눈을 감지는 않았다. 자신을 보고 있는 현수를 1초라도 더 시선 속에 담고 싶은 때문이다.
“……!”
현수는 마음이 아프고 애처롭다 느꼈지만 무어라 위로해 줄 수가 없다. 하여 가만히 안아주었다.
테리나의 눈물이 잦아든 것은 거의 10분이 지나서였다. 우느라 심력을 너무 많이 소모해서 그런지 축 늘어진다.
또 혼절하려는 것이다.
“테리나! 테리나! 정신 차려! 바디 리프레쉬!”
샤르르르르릉―!
마나가 스며들자 조금 나아지는 것 같다.
“아공간 오픈!”
상처 입은 게 아니다. 하여 회복 포션이 아닌 마나 포션을 꺼냈다. 얼른 뚜껑을 열곤 테리나의 입안으로 흘려 넣었다.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기력을 되찾고 처음 한 말이다.
“아냐. 괜찮아. 사람 마음이라는 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일단은 편안히 누워 몸과 마음을 추슬러. 알았지?”
“네, 하라는 대로 할게요.”
가만히 고개만 끄덕이는 테리나를 번쩍 안아 침대로 데리고 갔다. 그리곤 말없이 의복을 벗겼다.
편히 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딥 슬립!”
샤르르르릉!
테리나가 잠에 빠져든다. 잠시 침대 곁에 앉아 잠든 모습을 지켜보았다. 화장기가 없어도 매우 아름답다.
손을 뻗어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푹 자. 자고 일어나면 기분이 괜찮아질 거야.”
창가로 자리를 옮겨 협정서를 읽었다.
문득 답답함이 느껴진다. 옷을 입고 밖으로 나오니 엘리베이터 앞에서 졸고 있던 최철 대좌가 벌떡 일어난다.
“어디 가시게요?”
“조금 답답해서요. 이 시간에 술 마실 곳 있나요?”
“이 시간이라면…….”
북한은 한국과 다르다. 밤이 되면 깜깜한 암흑으로 휩싸이는 곳이다. 12시가 넘은 이 시각에 영업하는 술집이 있을 리 없다. 호텔도 마찬가지이다. 손님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최철 대좌가 생각났다는 듯 시선을 준다.
“가시디요. 제가 모시갔습네다.”
“네, 그럼.”
영빈관 밖으로 나가자 연락 받은 경호요원들이 차에 올라탄다. 현수가 탄 벤츠는 텅 빈 도로를 따라 잠시 질주했다.
“여긴… 어딥니까?”
“공화국엔 이 시간에 문을 여는 술집이 없습네다. 하여 제 집으로 모셨습네다. 들어가시디요.”
“네? 사모님과 아이들이 잠들…….”
현수의 말은 중간에 끊겼다.
“아닙네다. 출발할 때 연락하였으니까니 지금 들어가셔도 됩네다. 가시디요. 제가 모시갔습네다.”
“음, 알겠습니다.”
모처럼 생각해서 이곳까지 왔는데 그냥 가자고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최 대좌의 아내가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삐익―!
나지막한 경첩 음에 이어 실내가 눈에 들어온다.
“어서 오시라요. 환영합네다.”
“어서 오시라요. 환영합네다.”
현관 입구에 서 있던 최 대좌의 아내가 한 말을 꼬맹이 셋이 그대로 따라서 합창한다.
“아이들도 있는데 선물을 못 가져왔습니다.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을……. 아닙네다. 그냥 오셔도 됩네다. 자, 안으로 들어오시디요.”
“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현수와 최 대좌가 들어서자 현관문이 닫힌다. 밖에는 호위사령부 제1호위부 특임대원들이 삼엄하게 경계 중이다.
군관 4명과 사관 8명이다.
“집이 아주 깔끔하네요.”
실내를 휘 둘러보고 현수가 한 말이다. 방 세 개에 거실과 부엌, 그리고 화장실 하나가 있는 구조이다.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시라요.”
최 대좌의 아내가 차려놓은 음식은 백두산 들쭉술 한 병, 닭볶음탕 한 접시, 그리고 과자 두 봉지이다.
창졸간에 차려낸 음식이기는 하지만 너무나 빈약하다. 북한의 열악한 실생활을 엿보는 듯하다.
“죄송합네다. 차린 게 너무 없디요? 마침 식재료가 떨어져서…….”
“아, 아닙니다. 갑자기 온 제가 잘못이지요. 그나저나 닭볶음탕이 아주 맛있겠습니다.”
“제가 먼저 한잔 올리갔습네다.”
최 대좌가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두 손으로 술을 따르려 한다. 곁에 아이들이 보고 있는데 가장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어떨지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는 듯하다.
“어른들 술 마시는 동안 너희들은 과자 먹을래?”
식탁 위의 과자봉지를 아이들에게 주자 엄마 눈치를 본다. 그래도 되느냐는 표정이다.
“아저씨가 주는 건 먹어도 돼. 이거 다 먹으면 맛있는 과자 많이 보내줄게. 자, 이거 가지고 방에 들어가서 먹어.”
아이들은 현수의 손에 들린 과자봉지에 시선을 주면서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하다.
“하하! 녀석들. 자, 이거 먹어. 너희들 방은 어디지?”
작은 녀석이 곧바로 방 하나를 가리킨다.
“자, 아저씨랑 같이 가자.”
제일 작은 녀석을 번쩍 안아 들고는 성큼성큼 걸어 아이들 방으로 갔다. 그리곤 과자봉지를 건네주었다. 먹고 싶은 걸 애써 참고 있었는지 금방 봉지 속에 손을 넣는다.
문을 닫고 나오도록 최 대좌는 자세를 바꾸지 않고 있다.
“편히 앉으세요. 그리고 술은 제가 먼저 따를게요.”
“아, 아닙네다. 그럴 수는…….”
현수가 병을 낚아채니 할 수 없이 놓는다.
“자, 사모님부터 한잔 받으세요.”
“네? 아, 아닙니다. 어떻게……?”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어떻게 해서 벼락 진급을 하고 창전거리 아파트까지 배정 받았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공화국을 위해 큰일을 하는 남조선 사업가의 눈에 뜨여 경애하는 위원장 동지가 특별 경호임무를 하달했다고 한다.
그분의 눈에 벗어나면 도로 신의주로 가야 한다면서 혹시라도 보게 되면 얼른 인사부터 하라는 말을 듣곤 했다.
이 사업가는 국빈들이나 묵을 수 있는 백화원 초대소를 사용하며, 언제라도 제1위원장을 독대할 수 있다고 한다.
심지어 러시아 대사조차 절절매는 존재라 하였다.
그런 사람이 집에 왔다.
신의주에서 살던 집보다 훨씬 나은 창전거리 아파트이다. 그럼에도 몹시 부끄럽다는 느낌이다.
그런데 술을 따라준다니 몸 둘 바를 몰라 절절맨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내의 잔에 술이 채워진다.
쪼르르륵―!
“자, 다음은 최 대좌님! 나를 위해 늘 애써주는 것에 대한 제 마음입니다.”
“아이고, 이러지 마십시오.”
최 대좌는 황송하다는 표정이다. 절대충성 마법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또 술을 따라주었다.
쪼르르륵―!
“자, 저도 한잔 주십시오.”
술병을 건네자 공손히 따른다. 무릎 꿇지 말라고 해봤자 안 들을 것 같아 그냥 두 손으로 술을 받았다.
쪼르르륵―!
“자, 그럼 한잔 해볼까요?”
짐짓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며 잔을 들자 최 대좌 부부가 황송해하며 잔을 든다.
“최 대좌님 가정의 행복을 위하여!”
“위, 위하여!”
쭈욱―!
“크으으!”
단숨에 잔을 비웠다. 상당히 독한 술이기에 목구멍이 화끈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울적했던 게 약간은 풀리는 기분이다.
주거나 받거니 하며 들쭉술 여섯 병을 비웠다. 안주로 내온 닭볶음탕은 일찌감치 떨어져 김치를 안주 삼았다.
백두산 들쭉술은 남북정상회담 만찬장에서 건배주로 쓰일 만큼 북한 최고급 주류이다.
병당 600㎖가 담겨 있으며 40도짜리 술이다. 이런 걸 여섯 병이나 비우는 동안 최 대좌의 아내는 취했다.
엄청 긴장했지만 알코올을 못 이긴 것이다. 최 대좌 역시 만취했다. 하지만 현수는 멀쩡하다.
테리나로 인한 마음의 답답함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큐어 포이즌!”
샤르르르르릉―!
마나가 스며들자 꿈틀거리더니 정신을 차리는 듯하다. 하긴 체내 알코올이 다 분해되었으니 깨는 게 정상이다.
“오늘 잘 마셨습니다. 내일 봅시다.”
최 대좌의 집을 나서서 백화원 초대소로 돌아왔다. 테리나는 여전히 깊은 잠에 취해 있다.
자는 동안 또 울었는지 베개가 흥건히 젖어 있다.
현수는 날이 밝을 때까지 테리나의 머리를 쓰다듬고, 또 쓰다듬어 주었다. 현재로선 그것밖에 해줄 것이 없다.
“잘 주무셨습네까?”
“네, 아주 편히 쉬었습니다. 위원장님은 어떠셨습니까?”
“아이고, 나는 한잠도 못 잤습네다. 하하하!”
“후후후!”
현수와 김정은이 마주 보고 웃는다.
김정은은 아직 혈기왕성한 나이다. 여기에 바이롯 반병이 추가되었으니 그냥 잠들었다면 이상할 일이다.
“저희 쪽에서 협정서 초안을 작성했습니다. 이겁니다. 검토해 보셨으면 합니다.”
“물론입니다. 검토가 끝나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십시오.”
테리나가 작성한 초안 중 수정할 부분은 모두 수정되었다. 이걸 인쇄하여 건넨 것이다.
“최 대좌, 오늘 점심을 최 대좌의 집에서 먹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네? 저, 저희 집이요?”
조수석에 앉아 있던 최철이 화들짝 놀란다.
“왜요? 안 됩니까?”
“아, 아닙니다.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잠시만요.”
최 대좌는 허둥지둥 차에서 내려 집으로 전화 걸러 갔다.
“저분 집에는 왜 가요?”
“어젯밤에 신세 좀 졌거든.”
“어젯밤이요? 밤에 외출하셨어요?”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다.
“응. 테리나가 먼저 자서 술친구가 필요했어.”
“아! 미안해요.”
“참, 여행용 가방은 차에 실어뒀지?”
“네. 근데 가방 속에 뭐가 들어서 그렇게 무거워요?”
현수가 챙겨온 것은 대형 캐리어 두 개이다. 아공간에 담긴 걸 꺼내기 뭐할 때 사용하려 가져온 것이다.
“그냥 이런저런 거. 여행하다 출출할 때 먹을 통조림과 과자도 있고. 하여간 뭐 그런 것들이야.”
테리나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지금의 현수는 어디를 가든 최고의 귀빈이다.
먹고 싶은 게 있다면 어디서든 무료로 제공 받는다. 그런데 통조림과 과자 운운하니 의아한 것이다.
“또 왔습니다.”
“아이고, 어제는 정말 죄송했습네다.”
최 대좌의 부인은 먼저 술에 취했던 것이 몹시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인다.
“꼬맹이들 있죠?”
“네. 얘들아, 뭐 해, 어서 인사드리지 않고?”
“안녕하세요?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네다.”
“하하! 녀석들.”
두 손을 배꼽 위에 얹고 꾸벅 고개를 숙이는 아이들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며 환히 웃었다.
안으로 들어간 현수는 가방부터 열었다. 안에는 각종 통조림과 과자로 가득하다.
캐리어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니 상당히 많이 담겨 있다.
아이들의 눈이 금방 휘둥그레진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고급스런 포장 때문이다.
“어제 처음 오면서 빈손으로 온 게 마음에 걸려서요. 이건 아이들 주십시오.”
“우와! 이거 초코파이예요, 초코파이!”
개성공단 근로자들에게 간식용으로 지급된 초코파이는 장마당을 통해 거래된다. 하도 맛있다고 소문이 나서 세 개를 구입하여 아이들에게 먹인 적이 있다.
그렇기에 알고 있는 것이다.
“엄마, 이거 먹어보면 안 돼요?”
“안 되긴 먹어도 돼. 자, 먹어봐.”
얼른 상자를 열어 하나씩 꺼내주었다. 아이들은 신났다는 표정으로 얼른 베어 문다.
“이건 식재료로 쓰세요.”
스팸과 참치를 포함한 통조림만 수백 개다. 최 대좌의 아내는 뭐라 감사의 뜻을 표해야 할지 몰라 멈칫거린다.
“김현수 동지, 앞으로 충성을 다하겠습네다.”
최 대좌가 먼저 고개를 숙인다.
누가 들었으면 큰일 날 소리이다.
북한의 군인이 남조선의 사업가를 모시겠다는 뜻은 공산당에 대한 충성을 버리겠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에구,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건 우정의 뜻으로 드리는 겁니다. 맛있게 요리해서 드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