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7
구입 후엔 매년 자동차세를 내야 한다.
이런 것들 다 빼고 나면 얼마나 저렴하겠는가!
게다가 일 년에 딱 두 번만 주유소를 가게 된다.
한국에서 버는 것의 절반만 벌어도 더 윤택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거주지가 무상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 집이 싫다면 토지를 불하 받아 집을 지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를 팔아 양도 차익을 거두는 것은 금지이다.
* * *
“아, 김 사장님! 안녕하시죠?”
“네, 실장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전화를 걸어온 이는 에티오피아 대통령 비서실장 비아니 아자한이다. 특유의 부드러운 음성이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저희 쪽은 조인식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언제쯤 오실 건지 알아보라는 대통령님의 지시가 있어 전화드렸습니다.”
“에구, 늦어서 죄송합니다. 가장 빠른 시일 내에 출국하여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오실 때 철도공사와 도로공사 비용이 얼마나 될지 대강의 금액을 알아봐 주십시오. 저희도 규모를 알아야 어찌할 건지 예산을 움직이니까요.”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규모를 파악하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곧장 해외영업부장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부사장님?”
“어서 오세요, 최규찬 부장.”
예전엔 하늘같은 상사였는데 지금은 가끔 갈궈줘야 일을 잘하는 아래 직원이다.
하여 신 사장에게 가지 앉고 먼저 부른 것이다.
“자리에 앉으세요. 근데 윤 차장이 안 보이네요.”
“금방 들어올 겁니다.”
“그래요? 그럼 잠시 기다립시다. 참, 차 한 잔 하죠.”
현수가 인터컴을 누르자 강연희 대리가 받는다.
“강 대리, 여기 커피 두 잔, 아니, 석 잔 부탁해요.”
“네, 알겠습니다, 사장님.”
연희의 천연덕스런 음성이다.
이때 문이 열리고 해외영업부 윤 차장이 들어선다.
“죄, 죄송합니다. 갑자기 배탈이 나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요즘 접대가 많았나 봅니다.”
“네? 아, 네. 과민성 대장증세 때문에……. 죄송합니다, 부사장님.”
윤 차장이 얼른 고개 숙여 사과한다. 금장 안경을 쓴 30대 초반의 샤프한 이미지의 사람이다.
S대를 졸업하여 단 한 번도 승진에서 누락되지 않아 이른 나이지만 차장 자리에 있다.
박진영 과장이 은근히 추월해 보고 싶어 하는 인재이다.
딸깍―!
부사장실 문이 열리고 아이보리색 투피스를 걸친 김지윤 대리가 들어선다.
“응? 강 대리는 어디 갔습니까?”
“네, 조금 전 설계팀장님께서 긴급 업무협조 요청을 하셔서 그쪽으로 갔습니다.”
이 시각 현재 박진영 과장과 강연희 대리는 설계팀장과 대화 중이다. 리우데자네이루 재개발사업의 정확한 콘셉트를 브리핑하는 중인 것이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김 대리도 잠시 자리에 앉죠.”
“…네…….”
지윤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착석한다.
“두 분을 부른 이유는 아직 회사에서 알지 못하는 두 건의 공사 때문입니다.”
“……?”
최 부장과 윤 차장, 그리고 지윤의 시선이 쏠린다.
“우선 이 지도부터 봐주십시오.”
현수는 에티오피아 지도를 찾아 펼쳤다. 전지 크기(788× 1,090㎜)인 이것은 얇은 비닐로 덮여 있다.
먼저 아와사 지역을 찾아 그 위에 원을 그렸다.
그리곤 아디스아바바까지 선을 그었다. 다음은 아와사로부터 소말리아 북부의 항구 베르베라까지 그었다.
수성펜을 거둬들이자 셋은 이게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선이냐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이곳은 아와사란 지역입니다. 이곳부터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까지는 4차선 고속도로 공사를 할 겁니다. 그리고 이곳 베르베라까지는 표준궤 철도를 공사할 거구요.”
아디스아바바와 베르베라가 있는 곳에도 원을 그렸다.
셋은 웬 뜬금없는 고속도로와 철도냐는 표정이다.
“……!”
아디스아바바를 빼놓고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지명이다. 그렇기에 지도 위의 지명을 확인하려 했지만 붉은 원이 그려져 있어 식별하기 어렵다.
하여 잠시 머뭇거리는데 현수의 말이 이어진다.
“해외영업부에서는 우리가 이 공사의 설계부터 시공까지 완수하는 데 얼마나 비용이 들지, 시간은 얼마나 걸릴지를 산출해 줘야 합니다.”
“설마……. 이 공사도 수주하신 겁니까?”
최 부장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다.
이것들은 잉가댐 및 발전소 공사와 킨샤사·비날리아 간 고속도로 공사에 맞먹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소리 소문 없이 또 수주한 듯하니 어찌 의외가 아니겠는가!
“정말요? 정말 이 공사도 우리가 하는 겁니까?”
동석한 윤 차장의 눈도 흰자위가 많아진다.
평안남도 안주에 세워질 2,000만 평 규모 이실리프 기계공업단지 공사도 엄청나게 큰 공사이다.
시화공단과 반월공단, 그리고 인천의 남동공단9)을 동시에 건설하는 것보다도 훨씬 큰 공사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 공사는 국내 팀이 맡기로 했다.
국내의 건설경기가 별로인지라 진행 중인 아파트 분양사업팀만 남기고 모두 이것에 투입된 것이다.
부지 조성은 물론이고 설계부터 시작하여야 하기에 인원이 부족하여 사람을 더 뽑는다는 말이 나왔다.
그런데 큰 공사가 또 있다. 두 건이라고 한다.
그런데 하나하나가 엄청나게 큰 초대형 공사이다.
“맞습니다. 제가 수주했습니다.”
“헐! 세상에! 맙소사!”
“부사장님, 혹시 마법사세요?”
엘리트 코스만을 걸어온 윤 차장마저 넋을 잃는다.
아버지가 현직 장관이라 상당히 콧대 센 사람이다. 하여 안하무인이라는 평가를 받기는 하지만 매우 유능하다.
그런 그를 김지윤 대리가 바라보고 있다. 놀라서 넋 나간 괴상한 표정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시선에 담긴 빛이 예사롭지 않다.
이 순간 깨달았다. 누가 지윤의 옛 애인이었는지를!
현수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었다.
“조금 전 에티오피아 대통령님으로부터 최단 시일 내에 방문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바쁘시더라도 이 일부터 해줘야 합니다. 아셨습니까?”
“네? 아, 네. 그, 그럼요! 최우선적으로 이 일부터…….”
최 부장이 더듬거린다. 이제 천지건설의 실세는 현수이다.
과거엔 회장의 처남인 박준태 전무가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지금은 분명 현수에게 넘어가 있다.
국내 영업담당인 박 전무가 만든 권력기반은 붕괴되는 중이다. 국내 팀이 이실리프 기계공업단지에 투입되는 것으로 결정된 이후의 일이다.
어쨌거나 천지건설의 거의 모든 일이 현수로부터 시작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이 일이 최우선 과제인 것이다.
최 부장에게서 시선을 거두곤 지윤에게 시선을 준다.
“참, 김 대리.”
“네, 사장님!”
“회사에 사표는 냈습니까?”
“네? 아, 아직…….”
사표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최 부장과 윤 차장의 시선이 쏠린다. 아무래도 권고사직인 듯하기 때문이다.
윤 차장은 대체 뭘 잘못했기에 잘리느냐는 표정이다.
“오늘 중으로 사표 내세요.”
“네? 네, 알겠습니다.”
지윤이 고개를 숙이자 윤 차장이 불쌍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래도 한때마나 좋아했던 연인이라 이런 듯하다.
이때 현수의 말이 이어진다.
“사표를 내고 곧장 역삼동 이실리프 빌딩으로 가세요. 거기 가면 이실리프 뱅크 임시 본점이 준비되어 있을 겁니다.”
“……?”
예상과 다른 이야기가 나오자 이게 대체 무언지 궁금한 듯 최 부장과 윤 차장이 둘에게 번갈아가며 시선을 준다.
“오늘부터 김 대리가 이실리프 뱅크의 은행장 대리 전무이사입니다. 저 대신 잘 부탁합니다.”
“네? 아, 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김지윤 대리가 공손히 고개 숙여 예를 갖춘다.
지윤은 전혀 당황한 표정이 아니다. 그렇다면 사전에 조율이 끝나 있었다는 뜻이다.
윤 차장은 지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얼굴 예쁘고 몸매 착하다. 학창 시절 공부도 엄청 잘한 재원이다. 침착한 성품인데다 유머도 있고 모나지 않은 인격의 소유자이다.
그런데 본인이 찼다.
지윤네 집이 자신의 집에 비해 조금 처진다 싶은 때문이다. 그리곤 있는 집 딸들과 선을 보러 다녔다.
그런데 얼굴이 예쁘면 몸매가 꽝이거나 아둔했다. 된장녀들은 왜 그렇게 많은지 치가 떨릴 지경이다.
다시 말해 하나가 마음에 들면 다른 한구석이 마음에 들지 않는 여인들이 계속되었는지라 아직 싱글이다.
“지금 바로 사표 제출할까요?”
“그러세요. 즉각 수리되도록 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지윤이 다시 한 번 예를 갖추고 부사장실 밖으로 나간다.
윤 차장은 복잡한 눈빛으로 뒷모습을 보고 있다. 지윤이 박진영 과장과 연애하고 있음을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두 분, 방금 전에 부탁드린 일, 서둘러 주세요.”
“네? 아,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윤 차장이 얼른 고개를 숙인다.
“참, 리우데자네이루 건도 성사시켜야 하니까 일정표 작성해서 제출해 주세요. 요즘 제가 일이 많아서 일일이 기억하는 게 조금 번거롭습니다.”
“알겠습니다. 즉시 작성하여 보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최 부장은 또 한 번 고개를 숙인다.
방금 전 지윤을 보고 깨달은 바가 있기 때문이다.
최 부장도 김지윤 대리를 안다. 윤 차장이 과장 시절에 사귀었던 직원이다.
좋은 학벌, 탁월한 일 처리 능력, 발랄한 성품 등이 마음에 들어 처조카에게 소개하려던 재원이다.
그런 김 대리가 현수 곁에 잠시 머물렀다. 그리고 거대 은행인 이실리프 은행장 대리 전무이사가 되었다.
능력만 인정받으면 직급에 관계없는 초고속 승진이 가능한 신세계가 앞에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부사장실을 나선 최 부장은 해외영업부 전 직원은 물론이고 업무지원팀과 견적실, 설계팀까지 달달 볶는다.
그리곤 현수가 예상치 못한 속도로 보고서를 작성해 올린다. 확실하게 박준태 전무에서 김현수 부사장 쪽으로 줄을 바꿔 선 것이다.
7장 저, 전무하래요
한편, 해외영업부의 브레인 윤 차장은 천지기획 사무실을 방문하기 위해 계단으로 오르고 있다.
33층을 지나 34층으로 올라가려는데 위층 계단참에서 지윤의 음성이 들린다.
“자기야, 나 오늘 사표 내요.”
“사표? 자기가 왜? 뭐 잘못했어?”
“아니, 사장님이 사표 내라고 하셔서.”
“사장님? 누구? 신 사장님? 아님 김 사장님?”
“그야 김현수 사장님이죠. 난 거기 소속이잖아요.”
“근데 왜? 자기 뭐 잘못했어? 그리고 잘못했다고 해도 김 사장님은 그럴 분이 아닌데 왜?”
아무런 예고나 조짐이 없었기에 박진영 과장의 음성은 상당히 높아져 있다.
“으응, 사장님이 내게 이실리프 뱅크로 자리를 옮기라고 하셔서. 그러려면 천지기획 그만둬야 하잖아요.”
“이, 이실리프 뱅크? 자기더러 은행원 하래?”
박진영 과장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내용에 당황한 듯 말을 더듬는다. 요즘 지윤과 매일 얼굴 마주하는 것이 너무도 즐겁고 행복한 때문이다.
“네, 은행으로 자리를 옮겨 일해 볼 의향이 있느냐고 해서 그러겠다고 했어요.”
“헐! 이제 곧 정식으로 과장 진급할 건데 꼭 그래야 해? 뭐야? 설마 일반 행원으로 가는 거야, 아님 지점장이라도 시켜준대?”
감정이 뒤틀린 듯 음성이 날카롭다.
“아뇨, 지점장은 아니구요.”
지윤은 부러 낙심한 듯 조그맣게 말한다.
“그런데 왜 옮겨, 그냥 있지? 이실리프 뱅크가 대단한 은행이 될 거라는 건 인정해. 하지만 지점장급으로 가는 것도 아니라면 천지그룹에 있는 게 낫잖아. 지윤 씨 나이에 과장이면 꽤 높은 거라고. 안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