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8
박 과장은 말도 안 되는 선택을 한 지윤을 어떻게든 말리고 싶은 모양이다.
“지점장급은 아니구요, 그것보다 조금 더 높은 직책으로 가라고 하셔서요.”
“뭐? 더 높은 직책? 뭔데? 은행에 무슨 직책이 있지?”
박 과장이 언젠가 들었던 은행의 직제를 떠올리려는데 지윤이 대꾸한다.
“은행장 대리 전무이사요.”
“뭐? 뭐어……?”
말꼬리가 올라간 뒤 박 과장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 은행장 대리라고 하면 실제적으론 은행장 일을 한다는 것이다.
“방금 뭐라고 했어?”
“김현수 은행장님을 대리하여 이실리프 뱅크 전체를 관리 감독하는 전무이사로 옮겨가래요.”
“헐! 전무이사라니! 말도 안 돼!”
그야말로 할 말을 잃었다.
직책은 전무이사지만 하는 일은 은행장이다.
이를 천지건설의 직제에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대리→과장→차장→부장→이사→상무이사→전무이사→부사장→사장→부회장→회장.
업무만 따지고 보면 한꺼번에 열 계급 승차이다.
이건 진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직장인의 신화라는 칭호를 달고 사는 현수도 못 이뤄본 초고속 승진이다.
이제부터 직장인의 신화는 현수가 아닌 지윤인 셈이다.
“월급도 더 많이 주신댔어요. 그러니 옮겨갈게요.”
“……!”
진영은 말릴 명분을 잃었다. 이실리프 뱅크는 무차입 경영을 하겠다는 곳이다. 다시 말해 망할 확률이 없다.
지분 전체를 현수가 가지고 있으며 단 한 주도 누군가에게 팔지 않은 상태이다. 경영권을 빼앗길 확률이 완전히 제로라는 뜻이다.
천지가 개벽을 해도 적대적 M&A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기업이다. 이곳의 은행장 대리 전무이사이니 천기기획 과장급 연봉보다 훨씬 높은 급여를 받게 될 것이다.
어찌 말리겠는가!
같은 순간, 아래층 계단을 딛고 있던 윤 차장의 입에서 나직한 침음이 흘러나온다.
“크으음! 바보, 바보였어.”
황금알을 낳는 거위보다도 더한 존재를 잃은 것에 스스로의 안목을 자책하는 중이다.
이래서 사랑은 조건을 보고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의 미래는 언제, 어떤 모습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서로를 아끼는 마음만 확실하다면 다른 것은 따질 필요가 없다. 어려움을 같이 극복해 나가겠다는 굳은 의지만 있다면 살면서 고통스러움은 있을지라도 늙으면 행복한 추억이 될 수도 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한국의 이혼율은 상승 중이다.
결혼 전에 상대방의 집안, 돈, 성격, 능력, 학벌, 외모 등등 정말 엄청나게 따진다. 이토록 신중하게 따지고 잰 뒤에 결혼했는데 왜 이렇게 많이 이혼하는 것일까?
참을성 부족과 상대에 대한 배려 부족이 큰 이유이다. 정말 중요한 사랑은 뒤에 놓고 먼저 조건만 따진 결과이다.
상대를 위해 목숨도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사랑이다. 그런데 이런 사랑은 요즘엔 영화에서나 볼 수 있다.
요즘 세대들의 결혼은 조건 따져 식을 올린 뒤 정자를 난자에 수정시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다.
일생에 딱 한 번뿐이라며 비싼 웨딩드레스와 꽃 장식, 웨딩 촬영, 고가의 예물 등을 고집하는 된장녀가 되지 말아야 한다.
남자 역시 얼굴만 예쁘다고 죽어라 쫓아다니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사전을 찾아보면 ‘순애보’라는 말이 있다. ‘순애라는 아가씨의 보자기’를 뜻하는 말이 아니다.
순애(殉愛)는 ‘사랑 때문에 죽는다’, ‘사랑 때문에 목숨을 바친다’는 뜻이다. 이루지 못할 사랑 때문에 너무도 안타까워 죽음을 택하는 것을 순애라고 한다.
보(譜)는 적는다, 기록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소설가 박계주의 장편소설 제목이기도 하다.
1938년에 발표된 소설로 박애주의와 낭만주의적 분위기, 그리고 저변에 깔린 민족적 감정이 인상적인 글이다.
이때 이후 순애는 ‘순결한 사랑’이나 ‘순수한 사랑’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순애를 눈 씻고 찾아보려 해도 찾을 수 없다. 남녀 모두 순수성을 잃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로지 상대의 조건만 보았기에 결점이 있어도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여 이혼율이 높은 것이다.
어쨌거나 조건 따지던 윤 차장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어 쓸쓸히 발걸음을 돌린다.
이러고도 정신 못 차리고 잘난 척, 부자인 척, 고고한 척하며 여자들의 조건을 따진다.
결국 윤 차장은 10년 후에야 평범한 여자와 결혼한다.
제자리로 돌아와 앉은 박진영 과장은 멍한 표정이 된다. 이제 곧 차장이 되어 사내 체면을 차린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현수가 그러했듯 하늘 높은 곳으로 훌훌 날아가 앉았다.
피똥 싸가며 매일 야근을 해도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높은 자리에 올라간 연인을 어찌 대해야 할지 난감한 것이다.
‘휴우! 포기해야 하나? 내가 너무 처지는데.’
진영은 찌푸린 이맛살을 좀처럼 펴지 못했다. 그러던 중 업무에 열중하고 있는 연희가 눈에 뜨인다.
‘부사장님은 강 대리를 먼저 선택했는데 왜 지윤 씨에게 그 일을 맡겼을까?’
업무에 열중해 있는 연희의 아름다운 모습을 잠시 바라본 진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생각지 말자. 어느 날 갑자기 이실리프 자치구 대표 대리라는 자리를 맡게 되었다고 할지도 모르니.’
대한민국보다도 큰 몽골 이실리프 자치구 대표 대리는 거의 총리급이다. 이실리프 뱅크 은행장 대리보다 당연히 높은 자리이다. 아무래도 그럴 것 같다.
그렇기에 골치 아픈 미래는 생각지 말자는 표정을 짓는다.
대신 현수가 지시한 일에 몰두한다.
열심히 일을 하다 보면 본인도 높은 자리에 발탁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한 것이다.
나중의 일이지만 실제로 연희는 이실리프 자치구 대표 대리가 된다. 박 과장의 예상과 달리 몽골이 아닌 콩고민주공화국에 있는 이실리프 자치구이다.
이리냐는 러시아 이실리프 자치구 대표 대리가 된다.
* * *
“늦었지만 너무 늦지 않았다고?”
인터넷 서핑을 하다 독일어로 쓰인 포스터의 글귀를 읽은 현수는 호기심에 스크롤을 내려 보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68년이 되어 가던 지난해 7월에 단 한 명의 나치 범죄자를 찾기 위해 독일 여러 도시에 걸려 있던 포스터 내용이라고 한다.
아래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 있다.
1945년 이후 68년간 우리는 청소를 한 번도 안 했다.
죄를 지은 사람, 범죄에 동조한 사람은 응분의 법적 처벌을 받거나 도덕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독일은 확실히 일본과는 다르군.”
일본은 자신들의 과오를 감추기에 급급할 뿐 진정한 사과를 한 적이 없다. 이것은 지금도 계속되는 일이다.
1970년, 폴란드 바르샤바 국립묘지를 방문한 독일의 수상 빌리 브란트(Willy Brandt)10)는 2차 세계대전 때 희생된 영혼 앞에서 사죄의 무릎을 꿇었다.
이 사진 한 장이 세계로 퍼지면서 독일은 더 이상 전범국가인 위험한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
독일은 지난 과오를 겸허히 인정하고 사죄하며 진실 되게 용서를 구했다. 그때 이후 독일은 유럽과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는 국가가 되었다.
그런데 한국의 옆 나라에 사는 게다짝11) 원숭이들은 이런 걸 보고도 느끼는 바가 없는 듯하다.
“기다려! 대가를 처절하게 치르게 해줄 테니.”
망언을 하였거나 앞으로 하는 자들은 전원 지옥도 예약이다. 수고스럽지만 쓰레기 분리수거하듯 데려다 놓을 것이다.
굶어 죽든 말든 지들 팔자이니 신경 써줄 이유가 없다.
다른 기사들을 읽던 중 ‘영어 몰입 교육’이란 마음에 들지 않는 구절이 있어 클릭했다.
사립초등학교에서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전 과목을 영어로 가르치다 적발되어 시정지시를 받았다는 내용의 보도이다.
교육청은 시정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이후에도 ‘영어 몰입 교육’은 계속되었다. 학부모들의 거센 반발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학교가 서울에만 30개가 있다고 한다.
이들 가운데 한 사립초등학교는 교육당국의 시정지시를 막아달라며 가처분 소송을 냈다.
교육당국은 즉각 항고했지만 헌법소원까지 내며 맞서고 있어 최종 결론은 법원에서 가려지게 되었다.
현수는 즉시 서핑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 학교 명단을 확보했다.
학교가 문제가 아니라 학부모들이 문제인 학교이다.
이런 학부모들은 차별받아야 마땅하다.
현수는 이들 학교 명단을 기록해 두었다.
이실리프 정보 요원들로 하여금 조사케 하여 교육청 시정지시에 반대한 학부모 명단을 입수케 할 것이다.
그들의 자식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실리프 그룹사, 또는 협력사에 입사하지 못하도록 할 계획이다.
아울러 학부모들에 대한 조사도 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들 역시 어떠한 경우에도 이실리프 그룹과 관련된 일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싸가지 없는 것들은 안 보는 게 제일 편해!’
현수는 다소 독선적인 결정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뜻을 철회하지 말자고 기록해 두었다. 이런 것들이 골수 친일파가 되고 친미파가 되는 족속이라 판단한 때문이다.
다음으로 검색한 뉴스는 섬 노예 사건이다.
지난 2월 언론에 통해 보도된 내용을 모두 읽었는데 분노가 절로 솟는다.
개만도 못한 인간에 관한 보도였기 때문이다.
“으음, 노예가 있던 섬에 대한 조사도 지시해야겠군.”
노예를 부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도움을 주지 않는 것도 공범이다. 그런데 섬 노예가 탈출하지 못하도록 주민들끼리 서로 알려주는 암묵적인 카르텔이 형성되어 있다고 한다.
따라서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모든 주민까지 징벌도 내지는 벌레도에 데려다 놓을 생각이다.
100명이든 10만 명이든 모두 데려다 놓을 것이다.
100살이 다 된 늙은이라도 하나도 빠짐없이 데려가야 한다. 늙었다고 범죄행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죽도록 고생하는 것이 뭔지를 톡톡히 경험하게 할 것이다. 용서는 절대로 안 한다. 그곳에서 굶어 죽거나 악어나 아나콘다의 먹이가 되도록 할 것이다.
‘인원이 너무 많으면 수용할 공간이 부족할 텐데 어디 좋은 곳 없을까?’
징벌도와 벌레도를 떠올린 현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데려다 놓을 인간은 너무나 많고 장소는 한정된 때문이다.
“굶어 죽는 걸 허용해야 하나? 쩝! 그러기 싫은데. 그렇다면 최악의 고통을 겪도록 준비하는 수밖에.”
생각이 떠올랐으면 즉각 실천하는 것이 정상이다.
“텔레포트!”
현수의 신형이 공간 속에서 사라진다.
지옥도에 도착하자마자 바람의 정령 실라디온의 도움을 얻어 총알개미 중 일부를 징벌도로 옮겨놓았다.
연옥도에선 타란툴라 호크 일부를 징벌도로 옮겼다.
두 섬 모두 아비규환12) 상태였다.
아소 다로 부총리는 현수를 보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그의 뒤에는 기시다 후미오 외무상이 있고, 신도 요시나타 총무상과 야마모토 이치타 영토 문제 담당상은 뒤쪽에 무릎 꿇은 채 애걸복걸한다.
총알개미가 주는 고통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며칠 사이에 바싹 마르고 늙은 듯하다.
“내가 왜 너희를 용서해야 하지? 한국을 상대로 온갖 망언을 퍼부을 때 우리 기분은 생각 안 해봤지? 나도 니들이 얼마나 고통당하는지 알고 싶지 않아. 그러니 계속 고생해.”
“김현수 사마!”
“사마 좋아하네. 시끄러, 이 새끼들아!”
퍼억―!
“캐액!”
“텔레포트!”
떠나기 직전 울며불며 매달리는 아소 다로의 턱주가리를 걷어찼다. 이빨이 서너 개쯤 부러졌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이다.
다음에 나타난 곳은 연옥도이다.
“으윽! 마, 마법사님, 제발, 제발 살려주십시오! 다, 다시는 나쁜 짓 안 하고 살겠습니다! 제발, 제발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