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2
“그래!”
현수가 가만히 서 있자 실라디온이 형체를 흐트러뜨리며 현수를 통과한다.
“태고의 맹약에 따라 나 실리디온은 여기 있는 이분과 맺어지려 합니다. 마스터의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받들어 모실 것을 굳게 맹세합니다.”
샤르르르르릉―!
부드러운 마나가 살갗을 간질이는 듯하다. 기분 좋은 느낌이다. 그러나 그 순간은 아주 짧았다.
어느새 의식을 마친 실라디온은 현수의 바로 앞에서 눈빛을 빛내고 있다. 그러더니 이마에 키스하라고 손짓한다.
쪼옥―!
“이로써 나 실라디온은 마스터의 권속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마스터! 지금껏 늘 외로웠으나 이젠 외롭지 않아 행복해요.”
실라디온이 환히 웃는다. 그러자 몸에서 빛이 나는 듯하다. 아주 예쁜 모습이다.
“잘 부탁해.”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제가 필요하실 땐 언제든 제 이름을 불러주세요. 마스터를 위한 바람이 되어드릴게요.”
“고마워. 그나저나 아까 말한 거, 이젠 할 수 있는 거지?”
“네, 대신 주인님, 아니, 마스터. 근데 정령력이 더 필요해요. 제가 쓸 수 있도록 허락해주실 거죠?”
“그래? 물론이야. 원하는 만큼 가져가.”
“네, 그럼 가져가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켈레모라니의 비늘로부터 연유한 마나가 현수의 상단전으로 뿜어진다. 곧이어 상단전으로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이 실라디온에게 향한다.
아리아니를 거치는 것보다 효율이 더 좋다.
산지에서 생산된 채소가 도매상을 거쳐 소비자에게 공급되는 것보다 생산자가 소비자에게 직접 공급하는 게 싸다.
생산자는 적절한 가격을 받으니 좋고, 소비자는 싼 가격에 구입하니 좋다. 속칭 Win―Win이다.
“흐으음! 하아아! 흐으음! 하아아!”
마치 심호흡을 하는 것처럼 실라디온의 가슴이 부풀었다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그러면서 점점 더 형체가 뚜렷해진다.
조금 전까지 뿌연 유리 뒤에 있는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면 지금은 점점 더 투명해지는 듯한 느낌이다.
신기한 현상이기에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때 아리아니의 음성이 들린다.
“실라디온이 본연의 힘을 찾으려는 중이에요. 마스터가 생겼으니 존재의 이유가 뚜렷해진 때문인 것 같아요.”
“내가 있어 다행인 거지?”
“그럼요. 누구의 주인님이신데요.”
현수의 어깨 위에 앉은 채 아리아니는 한참을 쫑알거렸다.
주로 정령에 관한 이야기이다. 습성이랄지 능력 같은 것들인데 처음 듣는 이야기가 많았다.
대략 10여 분이 흐르자 마나 유출이 멈춘다.
그러나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다. 아주 가느다란 실처럼 길게 변한 상태로 연결되어 있는 상태이다.
마치 유동식을 공급 받는 튜브처럼 정령력이 필요할 때마다 공급 받기 위한 장치인 듯싶다.
“이건 제 스스로 마나를 정령력으로 변환시킬 능력이 되면 끊길 거예요.”
“그래, 알았어. 근데 어떻게 하려고?”
“마스터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서쪽의 공기는 그곳에 머물도록 할게요.”
“가급적이면 오래 머물도록 해줘. 발생된 오염물질들이 다 가라앉도록. 근데 그럼 바람이 하나도 안 부는 거야?”
“불길 원하시면 다른 쪽에서 공기를 가져올게요. 그런데 얼마나 원하세요?”
“그냥 공기가 순환되는 정도면 될 듯해.”
“알았어요. 그럼 시작할게요, 마스터.”
실라디온이 사라졌다. 잠시 후 바람이 잦아듦이 느껴진다.
스모그와 결합된 박무현상이 사라진 서울은 가시거리가 대폭 늘어났다.
“마음에 드세요?”
“응! 속이 다 시원해.”
현수는 피식 웃었다.
“근데 저쪽은 어때?”
“그쪽의 공기는 한동안 거기에만 머물 거예요.”
현수는 뿌옇다 못해 가시거리가 10m도 안 되는 북경을 떠올렸다. 아마 호흡하는 것조차 힘들 것이다.
자욱한 안개 같은 독성 스모그는 모든 학교로 하여금 휴교령을 내리게 할 것이며 회사들은 쉬어야 한다.
공기의 유동이 줄어들면서 AQI 수치가 계속해서 늘어나기 때문이다. 300이었던 숫자는 800, 900을 넘어갈 것이다.
AQI 수치는 500이 상한이다. 이 수치는 호흡하는 공기가 유독(有毒)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1,000이 넘어가면 어찌 되겠는가!
가만히 있어도 호흡 곤란으로 쓰러질 확률이 매우 높다.
그렇게 일주일이나 열흘 정도 지나면 대기오염의 심각성을 처절하게 깨닫게 될 것이다.
모든 공장을 세우고, 난방을 중지하며, 자동차의 운행을 극도로 자제하지 않는 한 대기오염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공기 유동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일련의 일들이 일어날 때까지 제법 많은 이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자업자득이다.
현수는 몇 십만 아니라 몇 백만 명이 죽었다는 기사가 나오더라도 실라디온에게 원상회복을 명하지 않을 생각이다.
자기밖에 모르는 지나인들의 극도의 이기심을 이참에 완전히 뜯어고칠 생각이다.
이런 교훈이 없으면 이기적인 지나인들은 결코 대기오염을 줄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한국은 비교적 청량한 공기로 호흡한다.
지나로부터 유입되던 독성 물질 섞인 황사나 미세먼지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수고했어. 그 상태로 딱 일주일만 유지해줘. 가능하지?”
“물론이에요.”
“일주일이 지나도 내가 따로 말하기 전까지는 절대 풀어주지 마. 알았지?”
“네, 그럴게요.”
실라디온이 생긋 미소 짓는다. 훨씬 예뻐 보인다.
“난 내려갈게. 여기서 쉬고 있어.”
“네, 마스터!”
현수는 둘을 남겨둔 채 집무실로 내려갔다. 아리아니가 실라디온의 군기를 잡을 시간이 필요하다 해서이다.
* * *
“엄 국장님!”
“네, 회장님!”
전화 속 엄규백 국장의 음성에 절도가 있다.
“이메일 보냈습니다. 확인하세요.”
현수가 보낸 것은 소치 동계올림픽 등 스포츠 경기에서 부당한 판정에 개입한 심판들을 조사하라는 내용이다.
소치뿐만이 아니다. 20년 전까지 소급하여 모든 스포츠 경기를 조사하라 명했다. 국내의 모든 경기 포함이다.
“네, 확인 후 보고드리겠습니다.”
“제게 보고할 사항은 없습니까?”
“전에 지시했던 것들은 정리하여 회장님께 보안 메일로 보냈습니다. 확인해 주십시오.”
“아, 그래요? 알겠습니다. 나중에 또 통화하죠.”
전화기를 내려놓고는 이메일 확인에 들어갔다.
엄 국장으로부터 온 메일을 열어보았다.
닭조2캐말5아7구동치5랄바소11그마이진9칼고탐영0도광소45구이4세철췌7이구퍽치2…….
어린아이가 자판을 마구 두드린 듯 뜻을 알 수 없는 문자들의 나열이다.
이것을 긁어 USB에 있던 프로그램에 넣고 실행시켰다. 그러자 다음의 내용이 나타난다.
『왜곡된 역사 교과서 집필진 명단 및 주소록』
제목을 보고 아래로 내려 보니 명단과 거주지 주소, 직장 주소, 그리고 잘 가는 곳의 위치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최근에 촬영한 스냅사진19)도 첨부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왜곡된 역사 교과서가 만들어지는 데 얼마만한 역할을 했는지도 기록되어 있다.
『역사 왜곡 교과서를 채택했던 고교 관계자 명단』
다음의 명단은 왜곡된 역사 교과서를 채택했다가 여론에 밀려 철회한 고교에 관계된 자들 명단이다.
대충 살펴보니 재단이사장부터 시작하여 교장, 교감 등이 망라되어 있다. 이들의 위치와 사진 역시 첨부되어 있다.
“왜놈에 빌붙어 일신의 영달을 꾀하려던 친일파 새끼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개 같은 인간들의 명단이란 말이지?”
괜스레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분노가 물밀듯 밀려듦이 느껴진다.
사회 전체에 악영향을 미치고도 남을 인간들이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들을 가르치는 위치 중 가장 높은 곳에 포진해 있다. 당연히 안 될 말이기 때문이다.
“이놈들은 징벌도에 있는 모기나 개미, 그리고 말벌 가지곤 부족하지. 더 있어야 해.”
이때 분노한 현수의 뇌리로 스치는 상념 하나가 있다.
“맞아, 휘문고등학교에 친일파 동상이 있었지.”
이 학교를 설립한 민영휘는 한일합병 지지 공로로 일제로부터 자작위를 받았다. 이 밖에 은사공채 5만 원을 받은 대표적인 친일 자본가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한국엔 친일파들의 동상이 즐비하다.
영훈초등학교와 영훈고등학교 교정엔 일제 때 당진군수 등을 역임한 고위 친일 관료 김영훈의 동상이 있다.
고려대와 중앙고에는 ‘국민총력동원 조선연맹’ 이사 등을 역임한 친일파 김성수의 동상이 버젓이 세워져 있다.
추계예술대학엔 자기 제자들을 종군위안부로 보냈던 황신덕의 동상이 있으며, 상명대학엔 ‘조선임전보국단’ 간부를 지낸 배상명의 동상이 있다.
연세대학엔 ‘조선장로교 신도 애국기 헌납기성회’ 부회장을 지낸 백낙준과 유억겸의 동상이 있다.
이화여대엔 ‘국민총력조선연맹’, ‘국민동원총진회’, ‘임전보국회’ 등 친일 단체 간부를 맡았던 김활란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인덕대 설립자 박인덕, 서울여대는 설립자 고황경, 서울예대 설립자 유치진, 성신여대 설립자 이숙종도 친일파이다.
각각의 학교엔 이들의 동상이 서 있다.
일본에 충성 혈서를 쓰고 ‘다까기 마사오’로 창씨개명을 하였으며, 만주육군학교,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만주군 보병 중위를 역임한 독재자 박정희의 동상은 여기저기 널려 있는 상황이다.
특히 경북 구미엔 높이 5m짜리가 서 있다. 그 앞에 엎드리거나 우러러 볼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다.
구미시장은 이 동상의 제막식에 참석하여 박정희를 ‘반인반신’으로 지칭하여 구설수에 오른 바 있다.
그러고 보니 최근 언론에 보도되었지만 주목받지 못한 기사가 있다. 분명 사회적인 공분을 살 기사였지만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권력의 손이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2008년 1월 1일부터 2014년 1월 1일까지 서울지역 도시가스 요금은 44.61%나 인상되었다.
특히 정권이 바뀐 2013년엔 도시가스 요금이 세 번이나 인상되었다. 지금껏 이런 적이 없었다.
왜 이렇게 자주, 그리고 많이, 도시가스 요금이 오르는가를 조사하던 중 의외의 사실이 발견되었다.
서울과 경기 지역에 도시가스를 공급하는 회사는 예스코20)라는 곳이다. 이 회사는 2011년과 2012년에 두 차례나 ‘박정희 기념사업회’에 기부금을 냈다.
이를 조사한 국회의원은 구체적인 액수를 밝히라 하였다.
하지만 예스코는 정확한 금액과 세부적인 항목은 기부금이라는 이유로 밝히지 않았다.
이것은 에너지 복지사업과 관련 없는 기부이며 적절치 못하다. 저소득층을 지원하는 기부금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회적 동의 없이 죽은 친일 독재자의 기념사업회에 돈을 냈다는 것은 공분을 살 일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현수는 상당한 불쾌감을 느꼈다.
하여 러시아로부터 들여오는 천연가스를 수도권에 직접 공급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예스코가 지불한 기부금은 사용자들의 동의 없는 지출이다. 그리고 이 돈은 인상된 가스요금에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해 독재자 기념사업회에 기부하고자 가스 값을 올린 것이다.
언제 또 이런 뻘짓을 할지 아무도 모른다. 기부금의 액수조차 밝히지 못하는 걸 보면 정권과 야합이 있을 수도 있다.
따라서 예스코는 적절한 징벌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회사를 징벌도에 가져다 놓을 수는 없다.
러시아 차얀다 가스전으로부터 오게 될 가스에 대한 소유권은 대한민국 정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번 계약에 정부가 한 일은 사업허가를 내준 것뿐이다. 공사비 역시 대한민국 정부가 지출하는 것이 아니다.
현수는 ‘이실리프 천연가스’라는 법인을 새로 설립하여 반입될 가스 전량을 매입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