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6
둘은 박 사장으로부터 자리를 비운 동안 처리해야 할 것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부장 진급 후 은근히 언제 이사가 되나 생각하던 둘은 그 생각을 완전히 접었다. 가히 철인적인 체력이 없으면 안 됨을 깨달은 때문이다.
이날 밤, 박 사장의 아파트에선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물론 김주미 여사의 입에서 나온 소리이다.
김 여사는 밤새 여행준비를 했다. 출발하려면 일주일이나 남았는데도 그런다.
* * *
“아! 어서 오십시오.”
서류더미 속에 묻혀 있던 민윤서 사장이 환히 웃으며 일어선다. 세상에서 제일 반가운 손님이 온 때문이다.
“여전히 바쁘시네요.”
“암요. 그래야죠. 자, 자리에 앉으세요.”
말을 하며 인터컴을 눌러 커피를 주문한다. 현수가 커피 좋아하는 것을 알기에 다른 건 묻지도 않는다.
현수로선 뭘 마시겠느냐는 질문을 받지 않아 편하다.
“웬일이십니까, 바쁘신 분이? 참, 축구 잘 봤습니다. 그렇게 잘하시는 줄 몰랐습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민 사장은 정말 새로 봤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에구! 어쩌다 보니 운이 좋아 그런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바뀐다.
“아이고, 아닙니다. 그게 어떻게 운입니까? 호날두나 메시가 형님이라고 불러도 시원치 않을 실력이던데요. 집사람과 그 경기 보면서 고함을 얼마나 질렀는지 모릅니다.”
“쩝.”
뭐라 대꾸할 말이 없기에 나직한 침음만 냈다.
“대표팀에 들어가셔야죠? 그 실력이면 당연히 주전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이고, 무슨 대표선수요? 아닙니다.”
현수는 얼른 손사래를 치며 물러앉았다. 또 말도 안 되는 소릴랑 하지 말라는 표정을 짓는다.
“무슨 말씀을……. 회장님이 대표선수가 안 되면 누가 됩니까? 인류 최고의 축구선수가 되고도 남습니다.”
“에구, 축구 얘긴 이제 그만해요. 조금 불편해요. 이렇게 대놓고 칭찬하니까 조금 그러네요.”
“하하! 네, 그러죠.”
민 사장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축구 이야길 들으러 온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향남 제약단지 매입 건은 잘 마무리되고 있죠?”
“네, 거의 뭐…….”
말은 이렇게 했지만 몇몇 제약사가 팔려고 내놓았던 공장을 거둬들여 속을 끓이는 중이다.
헐값이라도 제발 팔아달라고 부동산에 내놨다는 걸 아는데 이제 와선 시가보다 비싼 값을 내놓으란다.
가급적 싼값에 사야 회사에 이익이다.
그런데 공장이 부족하다는 걸 눈치챈 상대가 수를 쓰고 있으니 속이 쓰린 것이다.
“어렵거나 잘 안 되는 일이 있나봅니다.”
“네? 아, 네. 뭐, 그런 게…….”
“팔려는 사람이 이제 와서 안 팔겠대요? 아님, 비싼 값을 불러요? 그런 거죠?”
“네? 아, 네. 사실은…….”
민 사장의 표정을 읽은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사세요. 우리 많이 벌잖아요.”
“네?”
“그걸 팔려고 내놓은 사람들은 얼마나 어려워서 그랬겠습니까. 급한 마음에 헐값에 내놓았는데 막상 작자가 나서니 사람 마음 변하는 게 정상입니다.”
“……!”
“그 사람들은 어려워서 내놓았는데 우린 조금 넉넉하잖아요. 그러니 그냥 돕는 셈 치세요. 돈은 또 벌면 되잖아요?”
“그, 그래도 됩니까?”
공장을 내놓은 사람들은 생판 모르는 이들이 아니다.
한때는 제약단지 사장단 모임 때 만나서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본인은 부친으로부터 회사를 물려받았지만 내놓은 이들은 모두 자수성가한 사람들이다.
극도로 침체된 국내 경기의 영향을 직격탄으로 받아 눈물을 머금고 공장을 내놓은 것이다.
‘그래, 돈은 또 벌면 되지.’
김현수라는 아주 든든한 거래처 메이커가 있다.
콩고민주공화국과 에티오피아 천지약품만으로도 매출 걱정과는 영영 이별이다. 게다가 드모비치 상사도 있고, 이제 곧 우간다와 케냐에도 천지약품이 생길 것이다.
주문이 너무 많아서 생산성 걱정을 해야 할 판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콩고민주공화국, 러시아, 몽골, 에티오피아에는 이실리프 자치구가 생긴다. 셋은 대한민국 전체보다 크고 에티오피아는 절반쯤 된다.
그곳에서 필요로 하는 약품을 어디에서 구입하겠는가!
이 모든 곳에 대한의약품 공장이 자리 잡을 수도 있다.
그리고 필요로 하는 양을 채우려면 공장의 크기가 어마어마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다른 거래처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아도 된다.
앞으로 돈은 어마어마하게 벌 팔자인가 보다. 그렇기에 쉽게 마음을 정했다.
“알겠습니다. 우리도 어려울 때가 있었습니다. 싸게만 사려던 건 제 욕심이었구요. 그 사람들 마음 아프지 않게 적당한 값을 치르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현수는 기분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민 사장 역시 시름을 덜어 홀가분하다는 표정이다.
“참, 일전에 주문 받은 콜레라와 말라리아, 그리고 홍역 백신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잘 준비되고 있는 거죠?”
“그럼요!”
“죄송합니다. 우리더러 하라고 가져오신 일이었는데 일을 줘도 못한다고 해서.”
“아닙니다. 백신 주문은 더 있을 텐데요, 뭐.”
현수의 말은 사실이다. 아프리카는 전염병이 창궐해 있고, 이를 예방할 백신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런데 2009년 12월 9일 싱가포르 연합조보(聯合早報)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지나인 여섯 명은 가짜 말라리아 백신을 제조해 나이지리아로 수출, 나이지리아인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에 따라 지나 법원은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내렸고, 최근 집행했다.
인도 정부 역시 나이지리아로 가짜 말라리아 백신을 수출한 자국인을 체포해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이렇듯 지나와 인도에선 아프리카를 돈을 벌기 위한 시장으로만 생각한다. 아프리카 사람들도 지나와 인도의 이런 만행을 알고 분개하고 있다.
그렇기에 값은 약간 높지만 질 좋고, 약효 확실한 한국산 의약품이 환영받는 것이다.
앞으로 콩고민주공화국과 우간다, 그리고 케냐의 백신 수요는 천지약품이 담당할 확률이 매우 높다.
당연히 품질 확실한 백신이 보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프리카 전역을 커버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아프리카 대륙 전체의 의약품 시장을 천지약품이 장악하게 된다. 그때가 되면 이번에 포기한 백신들은 대한의약품에서 제조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아주 편한 얼굴이다.
“공장 매입 건 이외엔 특별한 거 없는 거죠?”
“아뇨, 있습니다. 연구소 김지우 소장이 말하길 미라힐 제조 원료가 다 떨어져 간다고 합니다.”
지구엔 없는 두 가지 효소를 뜻하는 말이다.
대한의약품에선 현재 기적의 치료제 미라힐Ⅰ과 미라힐Ⅱ의 원액을 제조하고 있다. 아르센 대륙에서 사용하는 상급 회복포션과 동일한 것이다.
이 밖에 광범위 통증 치료제인 홍익인간과 CRPS 환자용 NOPA의 원료 역시 제조하는 중이다.
이것들의 공통점은 식약청으로부터 신약 승인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제약 및 의료 관계자들의 조직적인 방해 때문이다.
하지만 미래를 위한 준비 차원에서 소량 생산을 지속하면서 각종 실험 및 임상을 지켜보는 중이다.
식약청에서 요구한 수준에 맞춘 임상실험이지만 제대로 된 결과를 얻는다 해도 신약으로 승인될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덩치 큰 다국적 제약사들의 강력한 견제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아디스아바바에 공장을 짓는 중이다.
나머지는 그곳에서 제조하려는 것이다.
다만 군에서 사용할 가칭 ‘프라이벳 리메디’만은 완제품으로 생산하는 중이다.
미라힐Ⅰ과 미라힐Ⅱ는 향후 100년간 어떠한 일이 있어도 대한민국 의료계에 공급하지 않을 계획이다.
굴러들어 온 복을 차는 것이 어떤 건지를 톡톡하게 경험하게 하기 위함이다.
홍익인간과 NOPA는 한동안 고가로 공급될 예정이다.
해외에서 제조하여 국내로 수입하는 모양새를 갖출 것이기 때문이다. 일부 식약청 직원과 제약 및 의료 관계자들의 행위가 괘씸하다 여긴 때문이다.
하지만 프라이벳 리메디는 다르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국군 전력 보호를 위해 필요로 하는 양만큼만 소량 생산할 예정이다.
어쨌거나 지구에 없는 물질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 그거요. 알겠습니다. 곧 준비시키지요.”
“근데 그건 대체 어디에서 가져오는 겁니까? 김 박사 말에 의하면 지금껏 그런 물질은 보고된 적이 없다고 하는데.”
“핼리혜성24)이요.”
“네? 그게 무슨…….”
갑자기 웬 뜬금없는 소리냐는 표정이다.
“하하, 지금껏 알려진 바 없으면 지구에 없는 건데 그럼 우주에서 가져와야 하잖아요. 안 그래요?”
“…하하! 알겠습니다.”
민 사장은 깊이 캐묻지 않는다. 궁금한 건 김지우 박사지 본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수와 민 사장은 에티오피아와 콩고민주공화국 양국에 이실리프 제약을 설립하는 것으로 의견 합일을 보았다.
투자금 비율은 50 : 50으로 정했다. 그리고 운영 등에 관한 모든 업무는 민 사장이 책임지는 것으로 이야기되었다.
“주인님, 이제 가는 거예요?”
“그래, 가야지. 근데 어디라고 했지?”
“인도네시아 자바섬 클루드 화산이라고 했잖아요.”
“알았어. 좌표 확인할게.”
따라다니는 경호원들이 있기에 아무 곳에서나 텔레포트하면 안 된다. 하여 일단 귀가한 상황이다.
일단 의복부터 갈아입었다. 자바 섬은 더운 기후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곤 좌표 확인을 했다.
활화산이므로 화구 상공으로 가면 분출물에 의한 직격을 받을 수 있다. 앱솔루트 배리어를 세 겹이나 두를 능력이 되니 피해는 입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뭐하러 그런 위험을 감수하겠는가! 하여 목적지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을 찾았다.
“자, 가자. 텔레포트!”
샤르르르르릉―!
우미내 집 서재에서 현수의 신형이 사라졌다.
“헐! 배리어!”
현수가 화산 인근 지역에 당도한 후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낮은 탄성이다.
시커먼 안개가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데 계속해서 무언가가 떨어진다. 자갈 크기의 화산재이다. 인적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인도네시아 당국이 주민 소개령25)을 내린 듯하다.
“실라디온!”
“네, 마스터.”
“주변 공기 좀 어떻게 해봐. 너무 자욱하잖아.”
“네, 마스터! 잠시만요.”
실라디온은 자욱한 안개 사이에 길을 냈다. 바람의 힘으로 화산재와 연기를 밀어낸 것이다.
바닥을 보니 화산재가 몇 십㎝는 쌓인 듯하다.
“헐, 이래서야 어떻게 사람이 살아?”
이번 분출로 주변 공항 일곱 곳이 임시 폐쇄되었다. 승객 모두 발이 묶인 것이다.
당국은 분화구로부터 반경 10㎞ 내에 있는 서른여섯 개 마을 주민 20만 명을 대피시킨 상태이다.
분화구로부터 100여 km나 떨어진 인도네시아 제2도시 수라바야까지 화산재가 쌓이고 있으니 당연한 조치이다.
자연재해인 데다가 분출이 이어지고 있어 손을 쓸 수도 없는 상황이라 보고만 있는 듯하다.
“대단하네.”
실라디온이 뚫어놓은 공기 터널 밖은 온통 뿌연 연기로 가득하다.
투툭! 투투투투툭! 투투툭! 투투투투툭!
머리 위에 형성시킨 배리어로 계속해서 시커먼 화산재가 떨어져서 그런지 어둡다는 느낌이다.
“라이트!”
스팟―!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환한 광구 하나가 현수의 전면에 나타난다.
“자, 그럼 가볼까?”
“네, 마스터! 여긴 제가, 아니, 길 안내는 제가 할게요.”
“그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실라디온이 앞장서서 걷는다. 벌거벗은 모습이기에 둔부 실룩이는 모습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