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847화 (846/1,307)

# 847

현수는 애써 시선을 들었다. 그런 그의 어깨엔 아리아니가 앉아 있다.

“주인님, 왜 화구까지 가요? 실라디온 시켜서 이그니스더러 내려오라고 하면 되잖아요.”

“실라디온이 그러잖아. 이그니스는 화구 안에만 있다고. 그리고 지금은 내가 필요해서 가는 거잖아. 그러니 구경삼아 가보지, 뭐.”

“그럼 그러세요.”

아리아니는 딱히 반대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사랑하는 주인님 곁에만 있으면 모든 것이 충족되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마스터, 조심하세요. 지금부터 왼쪽은 낭떠러지예요.”

“그래? 알았어.”

실라디온이 바람으로 뭉실뭉실한 연기를 밀어내자 제법 깊은 계곡이 보인다.

“이그니스는 말이에요.”

가는 동안 불의 상급 정령 이그니스에 관한 이야길 한다. 성품이랄지 성향, 그리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등등이다.

둘은 오랜 동안 대화를 주고받았다. 다른 정령들은 없기 때문이다. 상급보다 아래인 샐러맨더가 있지만 일을 시키는 데만 쓸 뿐 대화 상대는 못 된다.

사람으로 치면 정신 연령이 낮아서이다.

“다 왔어요, 마스터.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시면 이그니스에게 마스터께서 오셨다는 이야길 하고 올게요.”

“알았어.”

말이 떨어지지 무섭게 사라진다. 현수는 유황 냄새 자욱한 화구 쪽으로 내려갔다. 화산이 분출한다 하더라도 앱솔루트 배리어가 막아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시간이 길어지면 블링크나 텔레포트로 옮겨 가면 그만이다. 그렇기에 구경할 겸 화구로 내려간 것이다.

예상대로 엄청나게 뜨겁다.

“마그마 온도가 몇 도라고 했더라?”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이 만날 수 있는 마그마의 온도는 1,600℃이다. 이는 수은 온도계를 넣어 측정한 값이 아니라 파장을 측정하여 간접적으로 계산된 것이다.

땅속의 마그마가 지표면으로 올라오면 급격하게 냉각된다. 이것을 용암이라 하며 하여 약 1,200℃이다.

현수는 열기로 이글거리는 용암을 보며 자신이 시전하는 헬 파이어의 온도를 생각해 보았다.

이것이 시전되는 시간을 그리 길지 않다. 그럼에도 멀쩡하던 땅거죽이 유리질로 변한다. 초고온이 작용한 탓이다.

짐작으론 10,000℃ 정도 되는 듯하다.

9서클 마법인 파이어 퍼니쉬먼트는 20,000℃ 정도 될 것이라 조심스레 예측해 본다.

12장 이그니스, 종속될래?

뜨거운 열기가 현수에게 해가 된다 여겼는지 전능의 팔찌와 켈레모라니의 비늘이 각기 한 겹의 앱솔루트 배리어를 형성시킨다. 그러자 즉시 뜨거운 열기가 사라진다.

사실은 이럴 필요가 없다. 신체가 먼저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랜드마스터가 되어 좋은 점 중 하나이다.

아주 뜨거운 열기, 혹은 더없이 혹독한 냉기를 접할 경우 단전의 마나가 뿜어져 방어막 비슷한 상태를 만들어낸다.

무협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호신강기와 비슷한 개념이다.

따라서 두 겹의 앱솔루트 배리어는 필요 없는 것이다.

아리아니는 뜨거움이나 차가움 같은 감각과 무관한 존재이다. 그렇기에 편한 표정으로 화구를 바라보고 있다.

“아이참, 주인님 기다리시는데 얘는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혼 한번 내야 하나?”

“난 괜찮아. 화산 구경하면 되니까 조금 더 기다려 보자.”

“네, 알았어요.”

현수는 잠시 더 용암을 살펴보았다. 온갖 암석이 녹은 액체이다. 당연히 엄청나게 뜨겁다.

지표로 올라온 용암은 빨리 식으므로 입자의 크기가 작은 화성암이 된다. 반면 땅속에서 서서히 식으면서 굳어진 것들은 입자가 큰 심성암이다.

화구로부터 밀려나온 용암은 천천히 흘러내리는 중이다.

상대적으로 온도가 낮은 공기와 접하면서 불꽃이 보이는 곳도 있지만 거죽은 대체적으로 검은색에 가깝다.

“아이참, 왜 이리 늦지?”

아리아니가 또 쫑알거린다.

“조금 진득하게 기다려 봐. 간 지 얼마 안 되었잖아.”

“얼마 안 되긴요? 벌써 오고도 남을 시간이란 말이에요.”

아리아니가 쫑알거릴 때 사라졌던 실라디온이 나타난다. 그런데 뭐라 말하지 않고 우물쭈물한다.

“왜 이리 늦었어?”

“죄송해요. 이그니스가 안 오려고 해서요.”

“뭐? 안 와? 내가 오라는데? 이걸 정말!”

당장에라도 쫓아가서 패주기라고 하려는지 아리아니의 쌍심지가 솟는다.

“이그니스가 오기 싫대요. 지금 노에스와 전쟁 중이래요.”

“뭐? 노에스? 땅의 상급 정령 노에스는 마리아나 해구26)아래에 있다고 하지 않았어?”

현수는 어찌 된 일이냐는 표정이다.

“네, 늘 거기에 있었지요. 근데 지금은 노에스랑 전쟁 중이래요.”

“그게 무슨 소리야? 정령끼리 전쟁이라니! 빨리 소상히 말해봐. 주인님 궁금해하시잖아.”

아리아니가 살짝 째려보자 실라디온은 손을 가슴에 얹고 잠시 숨을 고르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사람들도 가끔 이러하기에 말없이 기다려 주었다.

“노에스는 땅의 상급 정령이고, 이그니스는 불의 상급 정령인 건 아시죠?”

“그래, 당연히 알지.”

“그럼 땅속 마그마는 누가 관장할까요?”

“마그마?”

느닷없는 말에 현수는 뭐라 대꾸할 수 없었다. 실라디온은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다음이 그 내용이다.

지구의 내부는 지각, 맨틀, 그리고 외핵과 내핵으로 구분된다.

각각의 경계면은 모호로비치치 불연속면, 쿠텐베르크면, 리만이라 칭하고 있다.

학계에 보고된 바에 의하면 외핵은 액체 금속인 것으로 추정된다. 지진파 중 S파가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맨틀 내부는 암권(암석권), 연약권(암류권), 상부맨틀, 하부맨틀로 구분된다.

마그마는 하부지각과 상부맨틀에 존재한다.

상부맨틀은 전체적으로 고체인데 이 중 일부가 열이 집중되는 곳에서 여러 이유로 액화되어 마그마가 형성된다.

이것은 주로 현무암 등을 형성하는 염기성 마그마이다.

두꺼운 대륙지각(히말라야 산맥, 안데스 산맥 등)의 하부에서도 암석의 일부분이 녹아 마그마가 형성된다. 이때에는 화강암 등을 형성하는 중성―산성 마그마가 만들어진다.

마그마는 액체이고 뜨겁다. 하여 전통적으로 불의 정령인 이그니스의 영역으로 여겼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이스니스가 마그마의 범위를 넓혔다.

노에스의 기준에서 보면 암석이던 자신의 영역 중 일부가 마그마가 되면서 이그니스의 영역이 되어가는 상황이다.

하여 이에 둘 사이에 분쟁이 발생되었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것이 오랫동안 이어져 온 전통이다. 그런데 이그니스는 노에스가 멀리 있다는 걸 알고 영역 침범 및 파괴를 시도한 것이다.

마리아나 해구의 아래는 인간이 단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곳이다. 그렇기에 태고의 모습이 보존되고 있다.

노에스는 해구 아래를 돌아다니며 마나를 모았다. 그러던 중 일각에서 영역 파괴 현상이 빚어짐을 느꼈다.

하여 멀고 먼 인도네시아 자바 섬까지 온 것이다. 그리곤 탐욕스런 이그니스와 전쟁 아닌 전쟁을 벌이는 중이다.

화구에 틀어박혀 마구 정령력을 사용하던 이그니스와 해구 아래에서 마나를 모으던 노에스는 전력 차이가 있다.

당연히 노에스가 훨씬 더 강하다.

노에스를 퇴치할 수 없자 분노한 이그니스가 난동을 부렸다. 불같은 성품이 작렬한 것이다.

그 결과가 지난 2월에 있었던 대규모 폭발이다.

“그래서 주인님께서 부르시는데 안 온다는 거야, 못 온다는 거야?”

아리아니의 분노 섞인 다그침에 실라디온이 눈치를 살피다 입을 연다.

“그게… 삐쳐서 안 온다고……. 죄송해요, 마스터.”

“아니야. 실라디온이 잘못한 건 없지. 이그니스가 안 온다고 하는 거니까. 그럼 노에스는? 오라고 했어?”

“아뇨. 노에스는 말씀이 없으셔서 말하지 않았어요.”

“으이그, 멍충이! 주인님께서 엔다이론과 노에스도 만나셔야 한다는 거 몰랐어? 봤으면 오라고 했어야지. 다시 가서 말해봐. 이리 오라고.”

“네, 잠시만요.”

실라디온이 사라지자 아리아니가 나직이 혀를 찬다.

“쯧쯧! 최상급들은 안 그러는데 상급들은 가끔 저렇게 멍청해요. 빨리 진화를 시키던지 해야지.”

“진화?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건 소드 마스터가 되는 거나 다름없어요. 여기에 플러스 마나지요. 고농도 마나에 의한 세례가 필요해요.”

“고농도 마나 세례?”

“네, 아주 진한 마나 세례를 얻으면 한 등급 위로 진화될 수 있어요. 그러려면 주인님 같은…….”

잠시 말을 끊은 아리아니는 현수의 가슴에 시선을 준다.

켈레모라니의 비늘엔 1분 1초도 쉬지 않고 마나심법을 1,500년간 운용해야 모일 마나가 응축되어 있다. 그것도 불순한 기운이 섞인 마나가 아니라 순수하게 정제된 것이다.

켈레모라니의 비늘은 일회용이 아니다. 갖고 있던 마나가 모두 소진되면 그 즉시 마나 유동을 일으켜 다시 채운다.

“나 같은 뭐?”

“주인님이 마나를 퍼부어 주시면 다들 하나씩 업그레이드될 거예요. 다들 상급이 된 지 엄청 오래되었다고 하니 깨달음은 얻고 있을 테니 말이에요.”

“그래?”

자신의 능력으로 바람의 상급 정령 실라디온을 최상급인 실라디아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물의 상급 정령인 엔다이론은 최상급 엘리디아가 된다. 전설의 용과 비슷한 모습이다.

이그니스는 두 쌍의 날개를 가진 거대한 불새 이그드리아가 되며, 노에스는 성인 남성 모습을 한 노에디아가 된다.

겨우 한 단계 진화이지만 능력의 차이는 대단하다.

사람으로 치면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과 그랜드 마스터의 격차와 비슷하다. 1 : 100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건 주인님만 가능할 일이에요.”

아리아니는 옛 주인 켈레모라니를 떠올렸다. 고룡이니 그녀 역시 정령을 진화시킬 능력이 있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그런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드래곤 하트의 마나가 소모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현수의 경우는 켈레모라니의 비늘에 마나가 하나도 남지 않아도 여전히 그랜드 마스터이며 10서클 마법사이다.

소모된 것은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채워지니 굳이 수면기를 갖지 않아도 된다.

따라서 정령들에게 있어 현수는 세상에 딱 하나뿐인 업그레이더가 될 수 있다.

이런 걸 모르고 뻗대고 있는 이그니스가 어리석은 것이다.

“흐음, 나만 가능하다고?”

현수가 턱을 고이려 할 때 실라디온이 다시 나타난다.

“왜 또 혼자야? 안 온대?”

“네, 죄송해요. 지금 화가 났다고 안 나오겠대요.”

“그럼 노에스는? 노에스도 안 온대?”

“아뇨. 노에스는 마리아나 해구로 돌아갔대요.”

“헐! 천고의 기회였는데.”

마리아나 해구가 어떤 곳인지를 짐작하기에 현수가 나직한 탄성을 낸다.

이때 아리아니가 쨍쨍한 음성으로 소리친다.

“주인님, 이 녀석 안 되겠어요! 갈기세요!”

“갈겨? 뭘?”

“화구에다 대고 8서클 헬 파이어나 9서클 파이어 퍼니쉬먼트(Fire Punishment)를 갈기시라구요! 이 녀석은 뜨거운 걸 엄청 좋아하니까요!”

“정말?”

믿어지지 않는 말이기에 현수가 반문하자 실라디온이 먼저 대꾸한다.

“맞아요. 이그니스는 뜨거울수록 좋아해요. 근데 헬 파이어나 파이어 퍼니쉬먼트는 대체 얼마나 뜨거운 거예요? 여기 있는 용암만으로도 충분히 뜨거운데.”

“그건 보면 알아. 자, 우린 뒤로 멀찌감치 물러서 있자. 주인님, 기왕이면 큰 거로 한 방 부탁해요.”

“…알았어. 한번 해볼게.”

현수는 마법 구현 범위를 가늠하곤 뒤로 물러섰다. 화구는 물 없는 한라산 같은 모습이다.

다시 말해 중앙부가 움푹 파여 있는 형상이다.

“마나여, 초고열의 불꽃으로 세상을 다스려라. 파이어 퍼니쉬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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