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8
고오오오오오―! 쿠와아아아아앙―!
시뻘건 불꽃이 화구 전체를 메우면서 발생되는가 싶더니 주황색으로 변한다. 그리곤 이내 황색→황백색→백색→청백색으로 바뀌어간다.
불꽃은 온도에 따라 색깔이 달라진다.
불꽃 색깔을 보니 11,000∼25,000℃에 해당되는 듯하다.
당연히 어마어마한 열기가 끼쳐온다. 그러자 즉시 앱솔루트 배리어가 형성되면서 열을 차단한다.
이 순간 시커멓게 식어가던 용암이 붉은빛을 띠는가 싶더니 이내 맑은 물처럼 투명해진다.
하지만 그 시간은 매우 짧았다. 화염이 사라지자 다시 식기 시작한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에 화구 상단의 암석들은 유리질[Hyaline]로 변해 버렸다. 초고열에 녹으면서 일시적으로 마그마가 되었다가 갑자기 냉각되면서 이렇게 된 것이다.
“우와! 대단해요!”
실라디온이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표정을 짓는다. 아리아니는 당연하다는 듯 우쭐거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내 주인님이 이렇게 강하시니 앞으로 알아서 잘 받들어 모시라는 의도일 것이다.
“뭐야? 뭐야? 뭔데 이렇게 뜨거웠지? 뭐야? 뭐야?”
화구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것은 불새 형상을 한 이그니스이다. 어디서 이렇듯 어마어마한 열이 발생되었는지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듯 두리번거린다.
이때 실라디온이 나섰다.
“이그니스!”
“아, 실라디온. 조금 전에 여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엄청나게 뜨거웠는데 뭐지? 벼락이라도 떨어진 거야?”
“바보! 벼락이 떨어지면 그렇게 뜨거워져?”
“아니, 그건 아니지만…….”
이그니스는 고개를 젓는다. 벼락으로 인한 초고열은 그 시간이 매우 짧다. 조금 전과 같은 정도의 열을 내려면 수천 개의 번개가 한꺼번에 들이닥쳐야 가능하다.
그런데 그런 자연 현상은 빚어질 수 없다. 구름이 그만한 대전량27)을 가지긴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 그건 뭐였지? 넌 알지? 응? 말해봐, 말해봐.”
이그니스의 다그침에 실라디온이 살짝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연다.
“내가 조금 전에 나오라고 했지? 마스터께서 오셨다고.”
“마스터? 저기 저 뒤에 있는 인간? 응? 저기 저 쪼그만 날개 달린 건 또 뭐야?”
“이런 무식한 놈! 저기 계신 분은 내 마스터이셔. 그리고 그 곁에 계신 분은 모든 정령을 다스리시는 숲의 요정이셔. 다른 차원에서 오신 존재야.”
“다른 차원? 그럼 지구 말고 다른 데?”
“그래. 이야길 들어보니 아주 멋진 곳이래.”
“멋진 곳?”
“마나가 액체처럼 존재하는 곳. 빨리 가서 인사드려.”
“내가? 내가 왜?”
이그니스는 아르센 대륙에서도 불같은 성품과 더불어 고개 뻣뻣한 걸로 유명하다. 그 성향이 그대로인 듯싶다.
“잠시 전의 초고열은 마스터께서 만들어내신 거야. 너, 진화하기 싫어?”
“지, 진화?”
이그니스의 눈이 확연히 커진다.
“그래, 날 봐. 네가 조금씩 미쳐간다고 했던 나야. 그런데 지금의 나도 그렇게 보여?
“아니. 멀쩡해, 아주 멀쩡해 보여. 이거 어떻게 된 거야?”
“마스터께서 내게 각별한 은총을 베푸셨어. 그래서 아주 오래전의 힘을 회복했지. 아직 말씀은 안 드렸지만 마나 세례를 베풀어달라고 말씀드릴 거야. 그럼 금방 최상급 정령이 되겠지.”
“최, 최상급?”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그니스는 현수의 앞에 엎드린다. 그리곤 스스로 마스터로 모실 터이니 받아달라고 한다.
현수로선 마다할 일이 아니다. 하여 이그니스 역시 마스터라 부르도록 했다. 앞으론 아리아니의 지휘도 받는다.
모든 정령을 다스리는 존재로 받아들인 것이다.
“주인님, 이제 바이칼 호수로 가죠.”
“바이칼 호수?”
“네, 인간들이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을 하더군요. 기왕에 나오신 거니 거기 가서 엔다이론도 거두세요.”
“그럼 그래 볼까? 너희도 같이 갈래?”
실라디온과 이그니스는 얼른 고개를 끄덕인다.
“네, 걔 본 지도 오래되었어요.”
이그니스가 한 대답이다.
물과 불이니 둘은 서로 상극이며 앙숙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도 않은 듯 반감이 전혀 섞여 있지 않다.
“좋아, 가지. 잠깐만 기다려 봐.”
현수가 노트북을 꺼내 좌표를 확인하는 동안 실라디온은 고개를 들이밀고 같이 화면을 살핀다.
“마스터, 방금 하신 건 뭐예요?”
“우리가 갈 곳의 좌표를 찾는 거야.”
“그래요? 알겠어요.”
실라디온이 별말 없기에 현수는 셋을 가까이 불러들였다.
이그니스에게서 뜨거운 열기가 뿜어졌지만 셋에겐 영향을 끼칠 정도가 못 된다.
“매스 텔레포트!”
샤르르르르르릉―!
클루드 화산 화구에 있던 현수 등의 신형이 사라졌다.
잠시 후, 일단의 무리가 위험을 무릅쓰고 화구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온갖 실험기재를 동원한 상태이다.
지진 활동을 조사하던 다국적 지진학자들이 파이어 퍼니쉬먼트로 인한 진동이 무엇이었는지를 조사하려는 것이다.
“흐음! 여긴 시원하군.”
용암이 넘실대던 화구에 있다 오니 온도 차가 확연히 느껴진다. 지금은 3월이고 이 시기의 이곳 평균 기온은 ―29.7℃이다. 당연히 엄청 시원하다.
바이칼 호수는 시베리아 남동쪽 이르쿠츠크(Irkutsk)와 브랴티야(Buryatia) 자치공화국 사이에 위치해 있다.
남북 길이 636km, 최장 너비 79km, 최단 너비 27km이며, 둘레는 2,200km에 이른다.
담수호이며 면적은 3만 1,500㎢(대한민국 전체 면적의 3분지 1)이고, 가장 깊은 곳은 수심 1,742m에 이른다.
담수량은 2만 2,000㎦로 전 세계 얼지 않는 담수량의 20%이고, 러시아 전체 담수량의 90%를 차지한다.
한마디로 무지막지하게 큰 호수이다.
이곳에는 스물두 개의 섬이 있다. 그리고 현수가 당도한 곳은 그중 가장 큰 길이 72km짜리 알혼(Olkhon) 섬이다.
“시원해서 좋지?”
“네, 근데 왜 이리로 오셨어요?”
실라디온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현재 바이칼 호수의 표면은 전체가 꽝꽝 얼어 있다.
참고로 얼음의 두께가 30cm가 넘으면 자동차가 다닐 수 있고, 70cm가 넘으면 커다란 트럭도 다닐 수 있다.
이곳은 11월 말이 되면 얼음이 얼기 시작하고 12월이 되면 전체가 얼음 덩어리로 변한다.
이때 얼음 두께는 80∼160㎝가 되며 1월부터는 주요한 교통로로 사용된다. 하여 얼음 위에 교통 표지판이 설치된다.
현수는 멀리 얼음 위를 이동하는 트럭들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상황일 것이라 예상치 못해 육지에 해당되는 알혼 섬의 좌표를 찾았던 것이다.
“이렇게 얼어 있을 거라곤 생각을 못했어. 그나저나 엔다이론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해?”
“일단은 얼음부터 깨든지 해야겠어요, 마스터.”
“근데 사람들이 많네요, 주인님.”
“뭐, 조금 저쪽으로 가보지.”
현수는 시선을 의식하여 투명은신마법으로 몸을 감추고 바이칼 호의 복판으로 이동했다.
“이쯤으로 하죠. 이그니스, 얼음 녹일 수 있지?”
“그럼요. 제가 할게요. 후우우웁! 후우우우우∼!”
자신만만하게 나선 이그니스가 뜨거운 숨결을 뿜어 얼음을 녹이기 시작했다. 제법 고열인지 돌멩이보다도 단단하던 얼음이 금방 녹는다.
“엔다이론! 엔다이론! 엔다이론!”
얼음이 녹은 구멍 위로 이동한 아리아니가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을 초음파를 물속으로 쏘아 보냈다.
그렇게 5분여가 지났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다.
“엔다이론! 엔다이론! 엔다이론! 이리 와봐!”
또다시 소리쳤지만 여전히 무소식이다.
“여긴 겨우내 얼음이 얼어서 수면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실라디온의 말에 아리아니가 어림도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곤 쏘아보며 말한다.
“내가 부르는 소리는 수면기에 있더라도 들을 수 있어.”
“그래요? 근데 왜 안 오죠?”
“이그니스처럼 땡깡 부리는 건가?”
아리아니의 말에 이그니스가 펄쩍 뛴다.
“아리아니님, 그땐 제가 땡깡 부리는 게 아니라 노에스가 싸가지 없이 하고 가서 화가 나서…….”
이그니스의 말은 이어질 수 없었다. 수면 아래에서 불쑥 솟아오른 여인 때문이다.
“누가… 절 부르셨나요? 이런 부름은 처음이에요. 혹시 태고의 창조신이 오신 건가요?”
“…엔다이론, 나야! 실라디온!”
“아! 실라디온, 오랜만이야. 어머, 이그니스도 있네? 우리 오랜만이지? 그동안 잘 지냈어?”
엔다이론은 놀란 표정으로 이그니스와 실라디온을 바라본다. 같은 정령이지만 이렇듯 한자리에 모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분은 누구셔?”
강력한 정령력을 느꼈는지 아리아니에게 시선을 준다.
“나는 모든 정령을 다스리는 숲의 요정 아리아니야. 이쪽은 내 주인님이시고.”
“모든 정령을 다스리시는 분의 주인님이시라고요?”
아주 많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래. 어서 인사드려.”
“…엔다이론이 창조신을 뵈어요. 저를 창조해 주셔서 고마웠어요. 그런데 이제 저를 소멸시켜 주셨으면 좋겠어요.”
“왜지?”
“이렇게 있는 게 이젠 지겨워요. 아무도 저를 기억해 주지 않아요. 세상의 물은 너무나 많이 더러워졌고요.”
“그래도 아직 맑은 물이 많이 있잖아.”
“그것들도 머지않은 미래에 모두 더러워질 거예요.”
엔다이론은 인간에 의한 수질 오염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미안. 인간을 대표해서 사과할게.”
“네? 인간이시라고요? 인간이 어떻게……?”
현수는 아리아니의 사전 귀띔을 참고하여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래야 자연스레 굴복할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던 것이다.
하여 엄청난 아우라를 뿜어내는 중이다. 그렇기에 엔다이론의 입에서 태고의 창조신이라는 어휘가 튀어나온 것이다.
“내 주인님은 이곳의 인간이면서 아니시기도 해. 네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하신 분이지.”
“……!”
엔다이론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아리아니가 현수의 귀를 잡아당긴다. 사전에 약속된 대로 하라는 의미이다.
조금 남세스럽지만 어쩌겠는가!
손바닥을 아래로 하며 두 팔을 뻗었다.
“워터 크리에이션(Water Creation)!”
츄와아아악―!
손바닥 아래에서 맑은 물이 뿜어진다.
마치 한여름에 소낙비 내리듯 그렇게 쏟아진 물은 잠시 흐르는가 싶더니 금방 얼어붙는다. 몹시 낮은 기온 때문이다.
그런데 얼어붙은 건 물뿐만이 아니다. 엔다이론의 입이 딱 벌어져 있다. 눈은 더 이상 최대한 부릅뜬 상태이다.
이 상태로 얼어붙은 듯 꼼짝도 않고 있다.
방금 전의 행위는 물을 창조한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물은 엔다이론이 관장한다.
그런데 방금 전 물의 전체 질량이 조금 늘어났다. 이는 공기 중의 수분이 응결되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세상에 없던 물이 새롭게 창조된 것이다. 그런데 더없이 순수한 물이다. 물의 정령인 자신조차 할 수 없는 행위이다.
“창조신 맞는군요. 엔다이론이 다시 한 번 인사드려요.”
“인간이라니까.”
“인간은 물을 창조해 낼 수 없사옵니다. 그러니 당연히 창조신이시지요. 엔다이론 또한 주인님으로 모시겠사옵니다.”
‘얘는 말투가 조금 특이하네.’
사극 투의 엔다이론을 볼 때 아리아니가 끼어든다.
“아냐. 주인님이라 부르지 말고 마스터라 불러.”
“네? 왜 그러시나요?”
“주인님이라는 말은 나만 할 수 있는 거야.”
“…네, 아리아니님의 뜻을 따르겠사옵니다.”
아리아니는 현수의 어깨 위에 앉아 있다. 창조신이 그만큼 귀히 여긴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토 달지 않고 끄덕인다.
이때 아리아니의 전음이 들린다.
[주인님!]
[왜?]
[나중에 얘부터 마나 세례를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