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0
이 영지의 수석마법사인 헤인즈는 4서클이다. 그의 곁에는 3서클 이하 마법사 여섯이 서 있다.
“자네와 수석기사는 날 따르고, 나머지 마법사와 기사들은 즉시 수색작업을 실시하도록!”
“네! 영주님.”
수석기사의 손짓에 따라 기사들은 네 방향으로 산개한다. 그들의 뒤에는 병사들이 따르고 있다.
마법사들도 알아서 기사의 뒤를 따른다. 평상시 훈련이 아주 잘 되어 있는 듯하다.
“침입자는 어디에 있나?”
“도서실 쪽으로 갔습니다. 영주님!”
현수가 영주 집무실일 것이라 생각한 곳이 어이없게도 도서실이었던 것이다.
수석기사의 보고에 백작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가지!”
백작의 뒤에는 헤인즈와 수석기사 란돌프가 따르고 있다.
셋의 힘만으로도 4서클 마법사 정도는 능히 찜 쪄 먹을 수 있기에 토 달지 않고 따르는 중이다.
같은 시각, 현수는 나직한 침음을 낸다.
“이런……!”
영주 집무실일 것이라 생각한 곳이 책만 잔뜩 꼽혀 있는 도서실이었으니 어찌 안 그렇겠는가!
“할 수 없지.”
뚜벅, 뚜벅, 뚜벅!
현수는 높고 긴 서가 사이를 걸어 문으로 이동했다.
끼이이익―!
자주 드나들지는 않는지 녹슨 경첩에서 소리가 난다.
뚜벅, 뚜벅, 뚜벅……!
책만 있는 곳인지라 경비근무자가 없는 듯 고요하다.
복도 양쪽엔 백작의 역대 조상들의 초상화가 가지런히 걸려 있고, 그들이 쓰던 갑옷과 병기도 잘 전시되어 있다.
마치 박물관에 온 듯한 느낌인지라 천천히 구경하며 걸었다. 덕분에 복식 변화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적당히 헐렁한 튜닉이 점점 더 몸에 맞는 쪽으로 변화되는 중이다.
아직 지구의 중세유럽처럼 다리에 달라붙는 레깅스 같은 옷까지는 변화되지 않은 상태이다.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거의 다 내려갔을 때이다.
끼익―! 쿵―!
자박, 자박!
“엇! 누, 누구… 누구냐?”
현수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란 것은 이제 겨우 열두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다.
그의 손에는 훈련용 목검이 쥐어져 있다. 검술 연마를 위해 거처를 나서던 모양이다.
끼익―! 쿵―!
후다닥!
“도련님, 마저 다 드시고 나가셔야… 헉! 누, 누구세요?”
황급히 소년의 뒤를 따라 나선 중년 여인 역시 계단을 내려서는 현수를 발견하고 놀라는 표정이다.
“……!”
현수는 대꾸 대신 소년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목검을 앞으로 내민 채 눈빛을 빛내고 있다. 무단을 침입한 자를 상대하겠다는 뜻이다.
“엠마! 가서 기사와 병사들을 불러와.”
“네에? 도, 도련님!”
“이자는 무단 침입자야! 어서……!”
“아, 알았어요. 근데 어떻게 하려고……?”
자신이 가면 소년은 침입자와 일대일인 상황이 된다. 하여 잠시 머뭇거리자 소년이 소리친다.
“어서! 빨리! 엠마는 있어 봤자 도움이 안 되잖아.”
“네……? 아, 네에. 아, 알았어요.”
들고 있던 음식 그릇을 내려놓고는 후다닥 뛰어간다. 하지만 소년은 중년 여인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척하려는 모양이다. 그런데 다리가 떨리고 있다. 저도 모르게 겁을 먹은 모양이다.
“꼬맹아! 네 이름은 뭐지?”
“네 이놈! 나는 이곳 콘트라의 영주 파이젤 백작의 차남이다. 보아하니 용병 같은데 어찌 반말을 하느냐?”
“그럴 만해서……. 아무튼 네 이름은?”
“나, 난 피터다. 그러는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난, 하인스! 그런데 네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지?”
현수의 너무도 태연자약한 모습에 뭔가 느껴지는 바가 있는지 흠칫거린다.
“설마……! 암살자? 우리 아버지를……? 안 돼! 안 된다.”
피터는 목검을 다시 내밀며 공격할 자세를 취한다. 내심 실소가 터져 나온다.
“설마, 그걸로 날 어쩌려는 건 아니겠지?”
“우리 아버지는 절대 안 된다! 나를 먼저 베야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후후! 정말?”
말을 하며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잘 벼려진 바스타드 소드이다.
스으으으윽―!
시퍼런 날에서 느껴지는 예기 때문인지 주춤거린다.
자신의 목검보다 긴 바스타드 소드를 본 피터는 격한 긴장감을 느끼는지 마른침을 삼킨다.
“……! 꾸울꺽―!”
“내가 어른이니 선공은 양보하지. 공격해봐.”
“…그, 그러면 내가 겁먹을 줄 알고? 이잇!”
피터는 자신이 겁먹었다는 걸 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싫다. 늘 형과 비교되는 삶을 살아서 더하다.
형은 늘 피터보다 앞서 나갔다. 그래서 늘 풀죽은 모습만 보였다. 백작은 그런 피터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지만 피터는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아직 어리지만 본인이 부족하여 그런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도서실에서 내려온 사내는 아버지를 암살하러 온 어쌔신인 듯싶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든 것이다.
낳아주고, 길러준 아버지를 베러온 사내를 그냥 보낼 수는 없다. 일분일초라도 저지해야 기사와 병사, 그리고 마법사들이 준비할 것이다.
아버지를 구할 수만 있다면 자신은 죽어도 좋다. 하여 굳은 눈빛으로 현수를 노려본다.
상대는 어서 공격하라는 듯 검을 까닥이고 있다. 그간 배운 바에 의하면 허점투성이이다.
“……!”
하지만 피터는 쉽게 목검을 들이대지 못한다. 완전한 맹탕이거나 진짜 강자 중 하나일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전자라면 다행이지만 눈앞의 사내는 어쌔신이다. 당연히 후자에 속할 것이므로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어쌔신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존재이니 어리다고 봐주지 않기 때문이다.
“어서 덤비지 않고 뭐해? 사내가 검을 뽑았으면 썩은 호박이라도 찔러 봐야 하는 거 아닌가?”
“그, 그건 그렇지만… 야아압!”
휘이익―! 서걱―!
“헉……!”
바스타드 소드에 의해 마치 종잇장 갈라지듯 목검의 가운데가 잘려 나가자 피터는 대경실색하며 물러선다.
하지만 그 시간은 짧았다. 피터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다시 짓쳐 든다.
“야아압! 죽엇―!”
휘익! 서걱―! 툭―!
“헉! 이, 이런…….”
이번에도 목검이 맥없이 잘려 나갔다. 이제 손잡이만 남았을 뿐이다.
피터는 자신이 대적할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곤 주춤거리며 물러선다. 이러다 죽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목검이라 불리했나? 그럼 이걸 받아라. 아공간 오픈!”
“마, 마법사……?”
피터가 대경실색할 때 현수는 레이피어 한 자루를 꺼내서 건넸다. 아직 어리기에 비교적 가벼운 검을 고른 것이다.
“자아, 이제 공평해졌지? 그럼, 다시 공격해 봐라.”
얼떨결에 레이피어를 받았지만 피터는 공격할 의사가 없다. 감당할 수 없음을 인지한 때문이다.
“…차라리 날 죽이세요. 난 당신의 상대가 못됩니다.”
“정말……? 정말 죽여도 돼?”
모든 처분을 순순히 맡긴다는 듯 피터는 몸에서 힘을 뺐다. 들고 있던 레이피어도 밑으로 내린다.
“네! 대신 우리 아버지와 형은 죽이지 마십시오.”
“……!”
“약속하시면 순순히 죽어드릴게요.”
두어 발짝 다가선 피터는 현수의 바스타드 소드를 잡고는 자신의 심장 부위에 대준다. 찌르기만 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다.
“진심이냐?”
“네! 대신 약속 꼭 지켜주십시오. 이건 사내 대 사내의 약속입니다. 아직 어리지만 저도 사내거든요.”
피터는 눈빛을 빛내며 시선을 마주친다. 제발 아버지와 형을 죽이지 말라는 간절한 뜻이 담긴 눈빛이다.
“그럼, 이제 네 목숨은 내 것이다.”
“네! 찌르십시오. 저항하지 않겠습니다.”
피터는 아무런 욕심도 없다는 듯 눈까지 감는다.
이때 일단의 무리가 황급히 달려온다. 그중 선두에 선 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피터! 안 된다! 피해!”
“…아, 아버지! 안 돼요. 어서 피하세요.”
피터는 암살자가 어떤 실력을 가졌는지 모르는 아버지가 다가오자 당황하는 표정이다. 소드 익스퍼트 상급인 부친과는 여러 번 검을 섞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목검이 망가졌다. 하지만 방금 전처럼 말끔하게 베어진 적은 없다.
암살자는 최하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일 것이다.
게다가 아공간 마법까지 구사한다. 이건 4서클에 이른 영지 마법사의 실력으로도 구사할 수 없는 고위마법이다.
말로만 듣던 마검사인데 너무 강하다.
그걸 모르는 아버지가 달랑 기사단장 란돌프와 수석 마법사 헤인즈만 달고 왔다.
인원은 많지만 이쪽이 필패이다. 아직 어리지만 이 정도는 판별한다. 그렇기에 얼른 돌아가라는 손짓을 했다.
하지만 백작은 이를 무시하고 달려온다.
“피터! 어서 피하라니까.”
백작이 고함을 질렀지만 피터는 도망가지 않는다. 대신 현수에게 시선을 준다.
“…우리 약속… 지켜줄 거죠? 그럼……!”
피터는 자신이 죽으면 아버지가 무사할 것이라 생각하는지 앞으로 달려들었다.
현수가 가만히 있으면 심장이 찔려죽을 판이다.
“안 돼!”
백작이 고함을 지르며 다가섰지만 피터의 움직임을 막을 수는 없었다.
같은 시각, 현수는 피터의 몸이 앞으로 쏠리자 검을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빼버렸다. 이제 겨우 열두 살 먹은 꼬맹이를 죽이려는 마음은 애초부터 없었던 때문이다.
그러면서 슬쩍 검을 움직여 겨드랑이 사이로 빠지게 했다.
“홀드 퍼슨!”
“……! 으읏, 치사하게.”
피터는 갑작스레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원망 어린 표정으로 현수를 바라본다. 검술을 연마하고 있지만 마법에도 관심이 많아 홀드 퍼슨 정도는 알기 때문이다.
같은 시각, 백작은 검이 둘째 아들의 몸을 꿰뚫은 것으로 생각했다. 피터가 망토를 두르고 있었던 때문이다.
또한 아들의 움직임이 멈췄던 때문이기도 하다.
“이, 이런! 네 이놈! 죽엇!”
스르릉―! 쉐에엑―!
아들이 죽었다 생각하여 이성을 잃은 백작의 검이 현수에게 쇄도하였다. 하지만 검은 현수에게 해를 끼치지 못했다.
채에엥―!
전능의 팔찌가 생성시킨 앱솔루트 배리어가 백작의 검을 막아버린 때문이다.
묵직한 반동에 화들짝 놀란 백작이 눈을 크게 뜬다.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막이 검을 막은 때문이다.
“이, 이건……!”
“아버지, 오지 마세요. 이 사람 마법사예요.”
“피, 피터!”
검에 꿰뚫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의 말에 백작은 화들짝 놀라며 물러선다.
“아버지! 어서 피해요. 이 사람 마검사란 말이에요.”
피터는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백작을 물러서게 하기엔 아직은 조금 부족한 듯하다.
“너, 너는 누, 누구냐?”
백작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있다.
소드 익스퍼트 상급자의 검을 이처럼 쉽게 무력화시킬 수 있는 쉴드는 4서클 마법사라면 생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파이젤 백작이신가?”
“네 이놈! 평민 주제에 어디서 감히 하늘같은 백작님께 말을 함부로 하느냐?”
버럭 소리를 지른 이는 영지의 기사단장 란돌프이다.
뽑아 든 검을 보아하니 간신히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에 발을 걸치고 있는 듯하다.
“누, 누구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