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2
지금 오로지 자신을 호위하기 위해 기사 넷이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중이다. 이들이 전투에 가담하면 조금이라도 유리해질 상황이건만 자리를 피해줄 생각이 전혀 없는 듯하다.
카이젤 수염을 어루만지며 전황을 지켜만 볼 뿐이다.
“크하하하! 로켄의 용맹한 부하들아. 허접한 쓰레기들을 모조리 죽여라! 크하하하!”
“와아아! 모두 죽이라신다.”
“단 계집들은 예외이다. 알지?”
“크흐흐! 물론입니다. 두목!”
해적들은 입가에 괴소를 배어 문 채 속속 상선으로 옮겨 타는 중이다. 이번 해전에서 승리하면 막대한 양의 금괴와 미스릴괴를 약탈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아드리안 공국의 공작과 백작을 생포하면 만만치 않은 몸값을 지불받을 수 있다.
덤으로 많은 계집을 잡을 수 있다. 공작의 딸과 손녀, 그리고 백작과 자작, 남작의 딸들도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을 시중들기 위해 승선해 있는 시녀들까지 합치면 최하가 50명이다. 전투가 끝난 후 본인과 부하들의 노고를 치하해 줄 상품이다.
현재 상선에 승선해 있는 인원은 선저에서 노 젓는 노예들을 빼면 약 400여 명이다. 여자들을 빼고 나면 350명이다.
이 중 전투능력이 없는 일부 귀족들을 빼고 나면 340명만이 싸우고 있다. 그런데 해적은 약 5,000명이다.
약 15 : 1인 전투이다.
소드 마스터인 레더포드 백작과 소드 익스퍼트 중급인 기사 40여 명이 있어 간신히 호각지세를 이루고 있다.
원래는 레더포드 백작 혼자서 일당백을 하고도 남아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 전투는 해전이다.
심하게 요동치는 배 위에서의 싸움이기에 전투력이 평소의 1/3 정도로 줄어든 상태이다.
“야아아압!”
티팅, 티티팅! 티팅! 툭툭……!
집중된 쇠뇌공격을 받고 있는 레더포드 백작이 분전하고 있다. 그의 주변엔 300여 개가 넘는 볼트가 떨궈져 있다.
“저놈 먼저 죽여라! 저놈이다!”
로켄이 뽑아 든 검으로 레더포드 백작을 가리키자 쏘아져 가는 볼트의 수가 확연히 늘어난다.
전장의 지배자인 소드 마스터라 할지라도 체력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쇠뇌를 쏘는 해적들은 별 힘이 들지 않는다.
시위를 당겨 볼트를 올려놓고, 겨냥한 뒤 쏘는 정도는 하루 종일 지속할 수 있다. 하지만 백작은 아니다.
가일층 집중된 공격을 차단하느라 진땀이 나는 중이다. 전후좌우 중 후방만 뺀 나머지에서도 쏘아져 오기 때문이다.
쐐에엑―! 휘익! 쎄엑! 휘이익!
수많은 볼트가 레더포드 백작에게 집중되자 여유는 사라지고 무엇을 먼저 쳐내야 할지 혼란이 오는 듯 주춤거린다.
같은 시각 기사들 역시 쏘아져오는 볼트를 막아내느라 여념이 없다.
항해가 계속되는 동안 날씨가 너무 좋았다.
로레알 공작은 답답한 선실보다는 갑판에 머물기를 좋아했다. 하여 기사들 모두 갑판에 서 있어야 했다.
그런데 메탈 아머는 햇볕은 받으면 뜨겁게 달궈진다. 하여 모두가 레더 아머로 바꿔 입고 있던 상황이다.
오늘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해적선들이 나타나더니 삽시간에 상선의 진로를 막아섰다.
그리곤 빗발치듯 볼트가 쇄도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여유를 갖고 이것들을 떨궜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거리가 줄어들면서 속도가 빨라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방팔방에서 날아온다. 온 신경을 집중하여 볼트를 막아내곤 있지만 벌써 여럿이 당했다.
대부분은 막아냈지만 다 막을 수는 없었던 때문이다.
하여 열심히 검을 휘두르고 있는 기사들은 각기 하나나 둘씩 볼트가 박혀 있다.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왼쪽 팔뚝이나 허벅지지만 개수가 늘어나면 전투력에 지장을 줄 것이다.
다른 상선들을 보니 몇몇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가 해적들에게 제압당해 손을 머리에 얹은 채 무릎을 꿇고 있다.
‘일단 위기는 벗어나야겠지.’
눈빛을 빛낸 현수는 열심히 볼트를 쏘아대는 해적들을 눈여겨보았다. 최대한의 효과를 내기 위해 몰려 있는 상황이다.
“체인 라이트닝! 체인 라이트닝! 체인 라이트닝……!”
순식간에 십여 번의 마법이 구현되자 사방이 환한 빛으로 번쩍인다.
번쩍! 번쩍! 번쩍! 번쩍! 번쩍! 번쩍! 번쩍! 번쩍!
콰르릉! 콰르르릉! 콰르르릉! 꽈꽈꽈꽝……!
해적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 비명은 작렬하는 벼락 소리에 묻혀 버렸다. 그리곤 전장은 일순 침묵 속을 빠져들었다.
“……!”
모두의 시선은 느닷없는 번개를 누가 일으켰는지 찾느라 분주하다. 해적에겐 마법사가 없다.
아드리안 공국의 상선에도 마법사는 동승하지 않았다.
언제 올지 모를 마탑주를 기다려야 했기에 아무도 따라오지 않은 것이다.
요즘 아드리안 공국의 마법사들은 귀족들이 요구해도 제대로 응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실리프 마탑주가 등장한 이후 벌어진 일이다.
귀족들은 불만이 있으나 감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다.
전쟁에 패하면 작위는 물론이고 전 재산을 잃게 된다. 뿐만 아니라 노예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마탑주의 등장과 더불어 전쟁의 위험성이 제로에 수렴된 때문이다.
현재 아드리안 공국의 마법사 대부분 수도인 멀린에 머무르고 있다. 언제 나타날지 모를 현수를 만나기 위함이다.
귀족들이 영지에 급한 일이 있다 해도 차일피일 미루며 가지 않는다. 영지의 일보다는 위저드 로드와의 만남이 훨씬 더 중요하다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번 상행에는 단 한 명의 마법사도 동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느닷없는 번개로 해적 오십여 명이 기절한 채 바르르 떨고 있다.
하여 대체 누가 마법을 난사했는지를 찾으려는 것이다.
같은 순간, 현수의 신형은 다른 상선으로 옮겨 가고 있었다. 해적이 선원들을 죽이려는 모습을 본 때문이다.
“체인 라이트닝! 체인 라이트닝!”
번쩍, 번쩍!
콰르릉! 콰르르릉!
“아악! 케엑! 끄윽! 커억!”
생김생김과 덩치가 다른 것만큼이나 다양한 비명이 터져 나오며 쓰러진다. 해적들은 모두 금속 성분이 있는 병장기를 들고 있다. 반면 엎드린 채 목숨을 구걸하던 선원들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렇기에 번개는 해적들만 노려 작렬하였다.
“누, 누구십니까?”
당하지 않은 해적들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두리번거린다. 그 순간 현수의 신형은 또 다른 상선으로 향하고 있다.
칼을 휘둘러 선원을 죽이려는 녀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라이트닝!”
번쩍!
“케에엑!”
단숨에 반항하던 선원의 목을 베고야 말겠다고 힘껏 치켜들었던 시미터(Scmiter)를 통해 들어간 전류는 해적의 모든 근육을 단숨에 수축시켰다.
와당당탕―!
벼락 맞은 놈이 쓰러지면서 곁에 있던 커다란 통을 자빠뜨리자 큰 소리와 함께 물이 쏟아져 나온다.
쓰러진 놈의 몸에선 뿌연 연기와 함께 고기타는 냄새가 난다. 번개가 너무 강력하여 죽어버린 것이다.
“……!”
이번에도 모두가 눈을 크게 뜬다.
해적들의 모든 움직임은 멈췄으며 두려움에 고개조차 제대로 돌리지 못하면서 눈알만 굴린다.
어디에 마법사가 있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모두 무기를 내려놓고 무릎을 꿇어라! 아니면…….”
“……!”
챙그랑! 텅! 와당탕! 챙그랑!
말을 마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무기 떨어뜨리는 소리가 들린다. 벼락 맞아 죽고 싶은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선원들은 모든 해적을 제압하도록!”
“네!”
명이 떨어지자 무릎 꿇고 있던 상선 선원들이 달려들어 해적들을 포박한다. 누군지 모르지만 자신들을 도우러 왔으니 찍소리 않은 것이다.
해적들은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응한다. 벼락을 맞을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잠시 상황을 눈여겨본 현수는 다른 상선으로 날아갔다. 이번엔 파이어 마법으로 한 녀석을 지져주었다.
시녀의 의복을 찢고 욕심을 채우려던 녀석이다.
의복에 불이 붙자 뜨겁다며 펄펄 뛰더니 바다로 뛰어내렸다. 해적들 모두 겁먹은 표정이 되어 현수를 바라본다.
허공에 둥둥 떠 있으니 자연스레 우러러보는 형국이다.
“무기를 버리는 자만이 자비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터텅! 챙그랑! 챙그랑! 텅! 와당탕! 챙그랑!
이번에도 순순히 무기를 내려놓는다.
선원들에게 같은 명령을 내리곤 해적선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접근했다. 물론 플라이 마법으로 이동했다.
“온다! 지금이야. 전원 사격!”
휘휙! 쒜에엑! 씨익! 슈악! 피이잉!
현수가 다가가자 누군가 명을 내렸고, 기다렸다는 듯 수십 발의 볼트가 쏘아져 온다. 현수는 허공에 멈춘 채 상대를 살폈다. 그러는 동안에도 볼트들이 쏘아져 온다.
“배리어!”
팅! 티팅! 티티티팅! 티팅! 티티티티팅!
10서클 마스터가 구현시킨 배리어를 뚫은 볼트는 단 하나도 없다. 끝이 뭉개진 채 바다로 떨어질 뿐이다.
이를 바라본 해적들의 낯빛이 창백해진다. 감당 불가능한 마법사를 건드렸음을 직감한 때문이다.
“체인 라이트닝! 체인 라이트닝! 체인 라이트닝!”
번쩍! 번쩍! 번쩍!
콰쾅! 콰콰콰쾅! 쿠와앙!
와장창! 우당탕탕! 챙그랑! 와당탕!
“……!”
쇠뇌를 들고 있던 삼십 명의 해적 모두 이리저리 쓰러지며 요란한 소리를 낸다.
“네놈이 두목이냐?”
“그, 그러하오. 대, 대체 뉘시오?”
아드리안 공국에서 파견한 상선엔 마법사 없다고 했다.
마법사가 있으면 교전 시 어려움을 겪게 되기에 출동하기 전에 몇 번이고 확인한 정보이다.
그런데 허공에 멈춘 채 마법을 구현시키는 자가 나타났다. 플라이는 4서클 마법이다. 그런데 더블 캐스팅을 한다.
최하가 6서클이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겁먹은 표정이다.
5,000여 해적을 이끌고 있지만 마법사를 감당할 능력은 없기 때문이다.
“모두 들어라!”
갑자기 현수의 음성이 커지자 모든 배의 선원과 해적들의 시선이 쏠린다.
“나는 이실리프 마탑의 제2대 마탑주이다.”
“헉……!”
가까이 있던 해적들의 입에서 일제히 경악성이 터져 나온다. 평범한 마법사가 아니라 위저드 로드라 한다.
모든 해적이 다 덤벼도 감당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간이 쪼그라드는 느낌을 받고 있다. 이제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말을 이으려던 현수의 눈이 커진다. 바다 저쪽으로부터 뭔가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지? 엄청 큰데. 해양 몬스터인가? 뭐더라?’
현수의 이런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해적선 마스트 위에 있던 견시수의 입에서 당혹성이 터져 나온 때문이다.
“아앗! 크, 크라켄이다. 크라켄이 다가온다!”
“뭐, 뭐어? 크, 크, 크라켄……?”
해적은 물론이고 상선의 선원들까지 낯빛이 창백해진다.
땡, 땡, 땡, 땡, 땡!
“모, 모두 선실로 들어가라! 모두 선실로!”
누군가 요란하게 종을 치며 소리 지르자 우르르 선실 안으로 들어간다.
“아앗! 아아앗! 사, 사람 살려! 사람 살려!”
누군가의 비명에 시선을 돌려보니 커다란 촉수가 배위로 올라와 해적 하나를 휘감고 있다.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치지만 강력한 힘을 이겨낼 수 없는지 비명만 지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