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4
이실리프 군도를 떠난 장인이 당도하였거나 당도할 시각이다. 미판테 왕국은 고위 귀족들을 불러 모아 대대적인 승작 행사를 벌인다고 했다.
그렇다면 에튼엔 귀족들이 우글거려야 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수행하고 온 기사와 마법사, 그리고 행정관과 시종들도 엄청 많아야 한다.
그런데 썰렁해도 너무 썰렁하다. 하여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통 이해되지 않은 때문이다.
“카시발! 다시 한 번 물을게. 여기가 미판테 왕국의 수도 에튼인 게 정말 맞아?”
“에튼인 건 맞아요. 근데 수도는 아니에요. 저쪽으로 이사 갔거든요. 우린 거길 뉴에튼이라 불러요.”
“뉴에튼?”
“네! 어른들 말씀을 들어보면 한 삼십 년쯤 전이래요.”
현수는 이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좌표일람은 오래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니 뉴에튼에 관한 사항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 고맙구나. 자, 이걸로…….”
현수가 1실버짜리 은화를 꺼내 들자 카시발의 눈빛이 반짝인다. 정말 그걸 주려는 것이냐는 표정이다.
“맛있는 거 사먹으렴.”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얼른 은화를 받아 쥔 카시발은 연신 고개를 조아린다. 그리곤 후다닥 달려갔다. 현수는 천천히 구경하며 그 뒤를 따랐다. 그가 가려던 방향이기 때문이다.
에튼의 건물들은 지구와는 사뭇 다른 건축양식인데 상당히 독특하다. 빈집이 많아 낡기는 하였으나 예전의 모습이 충분히 그려진다.
한때 아주 번성했던 시가지인 것이 분명하다.
유심히 살펴보니 뒷골목 작은 집들은 사람이 살지만 큰 집은 거의 모두 비어 있다.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 그렇군.”
수도가 이전한 후 이곳에서 기거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빈민이다. 평민도 있겠지만 살기 힘들어진 영지를 탈출한 농노들도 있을 것이다.
이들은 귀족이 살던 큰집이 탐나지만 감히 들어가서 살 엄두를 못 내는 것이다.
뉴에튼은 에튼보다 고도가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기존의 에튼으로부터 4㎞ 정도 떨어졌지만 고도 차이가 있어 멀리서도 잘 보인다.
“흐음, 좌표를 수정해둬야겠군.”
멀찌감치 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은 전체가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텔레포트하기에 알맞은 장소이다. 하여 온 김에 좌표를 수정하기 위해 그쪽으로 이동했다.
이때 갑작스런 소리가 들린다.
“으앙! 누나! 누나! 눈 좀 떠봐. 누나! 누나! 먹을 거 사왔어. 어서 눈을 떠봐. 누나! 누나!”
“……?”
음성을 들어보니 조금 전에 은화를 받아간 카시발인 듯하다. 소리가 난 곳으로 가보니 다 쓰러져 가는 허름한 집이 있다.
집 안엔 넝마에 가까운 천 쪼가리를 덮은 여자아이를 카시발이 흔들고 있다. 그런데 의식을 잃었는지 헝겊인형처럼 흔들리기만 한다.
“카시발!”
“흐흑! 누나가… 누나가……! 흐흑! 아픈데 돈이 없어서 닷새를 굶었어요. 흐흑! 그래서 누나 주려고 이걸 사왔는데. 흐흐흑!”
카시발이 보여준 것은 딱딱한 빵이다. 테세린을 떠나 율리안 영지로 갈 때 처음 맛본 그것이다.
너무 단단하여 칼로도 잘리지 않는 것이다.
만들어진 지 무척 오래되어 거무스름한 곰팡이가 슬어 있다. 이걸 먹을 땐 먼저 겉에 핀 곰팡이부터 제거해야 한다. 그리곤 이빨로 갉아야 간신히 먹을 수 있다.
제대로 곰팡이를 제거하지 않은 상태라면 아무리 배가 고파도 이걸 먹으면 안 된다.
100이면 100 모두 배앓이를 하기 때문이다. 재수 없으면 식중독으로 목숨까지 잃을 수 있다.
껍질을 갉아내도 속도 단단하여 웬만한 인내력으론 배부를 때까지 먹을 수 없다. 침이 말라버리기 때문이다.
카시발의 곁에는 이런 빵들이 한 보따리나 있다. 가격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싸니까 몽땅 사온 것이다.
보아하니 1실버 전부를 쓴 모양이다. 누군가 어리다고 재고를 모두 떠넘긴 듯하다.
“카시발! 잠시 옆으로 비켜볼래?”
“흐흑! 네에.”
카시발이 옆으로 비켜서자 소녀의 손목을 잡았다.
“마나 디텍션!”
눈에 보이지 않는 마나가 소녀의 체내로 스며든다. 그리고 얼마 후 보고가 시작되었다.
폐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결핵인 듯싶다.
게다가 심한 영양실조이다. 그러고 보니 배는 불룩 나와 있지만 팔다리는 앙상하다. 전형적인 콰시오커 증상이다.
결핵으로 인한 폐 세포의 손상은 컴플리트 힐로 치료 가능하다. 하지만 콰시오커는 마법으로는 해결 불가능하다.
적절한 영양분이 공급되어야만 좋아지기 때문이다.
“컴플리트 힐!”
샤르르르릉―!
또 한 번 마나가 소녀의 체내로 스며든다. 부실했던 폐 세포들이 차츰 기력을 되찾는지 호흡이 한결 고르게 변했다.
“아공간 오픈!”
아공간을 열어 단백질 보충제를 꺼냈다. 그리고 인스턴트 죽을 꺼냈다. 휴대용 가스레인지와 코펠을 꺼내 이것을 덥히자 카시발의 눈이 퉁방울만 해진다.
너무도 간편하게 음식물을 만들어낸 때문일 것이다.
“카시발! 이걸 누나에게 먹이렴. 그럼 괜찮아질 거야.”
“저, 정말요?”
“그래! 오래 굶어서 속이 비어 있을 테니 천천히 먹이도록 해. 부족하다 싶으면 이걸 더 먹이고.”
현수는 이십여 봉지의 인스턴트 죽을 더 꺼내놓았다. 아울러 카시발이 먹을 빵과 우유 등도 주었다.
카시발 역시 영양실조 상태였기 때문이다.
“아저씨! 이렇게 많은 걸……!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흐흑!”
카시발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선행에 깊은 감동을 받았는지 눈물까지 그렁그렁한 모습을 보인다.
“카시발! 누나를 잘 돌봐주어라.”
“흐흑! 네에.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울지만 말고 누나에게 죽부터 먹이렴.”
“흐흑! 네에.”
현수가 건넨 숟가락으로 죽을 뜬 카시발은 누워 있던 누나의 상체를 받치고는 천천히 먹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굶었다는 것을 알기에 죽은 매우 묽었다.
마법 덕분에 정신을 차렸지만 아직 기력이 회복된 상태가 아닌지라 많은 양이 입가로 흘러내렸다.
그래도 절반 정도는 목구멍 너머로 사라졌다.
죽을 먹이는 동안 몇 가지를 물어 보았다.
카시발의 부모는 화전민이었다. 원래는 농노였는데 가혹한 수탈을 견디다 못해 야반도주하였던 것이다.
어느 날 오크들이 나타났다. 카시발의 부모는 아이들에게 도망치라 하고는 놈들을 가로막았다.
결국 둘은 오크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아직 어린 카시발과 누나는 어떻게든 먹고 살려고 했으나 곡식은 여물지 않았고, 양식은 거의 없다.
게다가 오크가 있기에 집으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하여 도시로 흘러들어 구걸로 연명했다.
수도에 가면 무슨 일이든 하여 먹고살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무작정 에튼으로 온 것이다.
문제는 이곳이 빈민촌이라는 것이다. 모두가 배를 곯는 상황이니 구걸조차 쉽지 않았다. 하여 며칠이나 굶은 것이다.
새로운 수도 뉴에튼은 빈민 출입금지인 곳이다. 다시 말해 멀쩡하게 옷을 입지 않은 사람은 들어가 보지도 못한다.
그래서 구걸조차 여의치 못해 닷새를 굶었다고 한다.
아까 현수와 만났을 때 카시발이 다소 까칠하게 군 것은 말할 기운도 없었던 때문이다.
“그러니까 애들이라도 옷만 깔끔하게 입으면 뉴에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거니?”
“네! 그렇대요.”
“그래? 그럼 잠시만.”
아공간을 열어 아동복을 꺼냈다. 못 먹고 자라서 열두 살이나 되었지만 열 살짜리 옷도 클 것 같다.
눈짐작으로 카시발과 누나의 옷을 꺼내자 또 한 번 눈이 휘둥그레진다.
귀족가의 아이들이나 입을 법한 너무도 좋은 옷이었기 때문이다. 양말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르센엔 양말 문화가 없기 때문이다.
이어서 어린이 운동화가 나왔다. 가급적 수수한 것으로 꺼내놓았지만 형광색에 눈이 가는 모양이다.
누나에게 죽을 모두 먹인 후 워싱과 클린마법으로 카시발을 씻겼다. 그리곤 모든 의복을 입혔다. 다듬어지지 않은 머리카락을 대충 정리하고 나니 야위긴 했지만 멀끔하다.
시키는 대로 옷을 갈아입고 양말과 운동화까지 착용한 카시발은 할 말이 있는지 한참을 머뭇거린다.
“저어……!”
“왜? 할 말 있어?”
“마법사시죠? 제게 이런 거 주지 말고 마법을 가르쳐 주시면 안 될까요?”
“마법을……?”
무슨 의도냐는 표정을 짓자 카시발을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고는 입을 연다.
“오크들에게 복수하고 싶어요. 엄마, 아버지가 놈들에게… 흐흑! 흐흐흑! 우리를 구하려고… 흐흐흑!”
카시발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나온다. 아르센에는 이런 아이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동정심이 절로 인다.
“알았다. 울지 마.”
“정말이요? 정말 제게 마법을 가르쳐 주실 거예요?”
“그래! 대신 열심히 배워야 한다. 꾀부리거나 게으르게 굴면 내쫓을 거야. 알았어?”
“흐흑! 네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흐흐흑!”
카시발을 손으로 눈물을 훔친다. 새 옷을 더럽힐 수 없기 때문이다.
“일단 가자. 그런데 근처에서 수레를 빌릴 데가 있을까?”
“수레요?”
“그래, 누나가 못 걷잖니.”
“잠깐만요. 알아볼게요.”
카시발은 언제 울었느냐는 듯 벌떡 일어서 당장에라도 튀어 나가려 한다.
“카시발! 이 정도면 수레를 살 수 있을 거다.”
10실버짜리 은화를 받아 든 카시발을 잠시 말이 없다.
오늘 처음 만나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것밖에 없다. 그런데 너무도 큰 신세를 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마법사님!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카시발은 무릎을 꿇고 공손히 고개까지 숙인다. 본인이 취할 수 있는 최상의 예를 표한 것이다.
“그래! 어서 다녀오너라.”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카시발이 나간 후 꾀죄죄한 누나를 워싱과 클린마법으로 깨끗이 하였다.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는 고맙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이름을 물어 보니 루시라 한다. 나이는 열셋이라는데 아홉 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못 먹어서 그럴 것이다.
카시발이 돌아온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죄송해요. 마법사님! 가다가… 흐흑! 가다가…….”
“왜?”
카시발은 연신 눈물을 훔쳐낸다.
“어떤 나쁜 어른들이… 흐흑! 주셨던 돈을 빼앗아갔어요.”
“…흐음!”
이곳은 빈민촌이다. 부랑자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런 걸 헤아리지 못하고 어린 카시발에게 돈을 준 자신이 잘못되었다 느껴 내쉰 한숨이다.
“흐흐!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흐흐흑!”
“괜찮다. 괜찮아. 그나저나 루시, 일어날 수 있겠니?”
“네, 저 일어날 수 있어요. 끄으응!”
루시나 카시발에게 있어 10실버는 엄청난 거금이다.
그런데 그걸 동생이 누군가에게 강탈당하고 왔다. 너무 면목이 없기에 억지로 일어나려는 것이다.
털썩―!
“으으, 으으으!”
버텨내지 못하고 쓰러진 루시는 안간힘을 쓰며 다시 일어서려 하지만 기력이 다한 듯 신음만 토한다.
13장 겨우 후작?
“괜찮아. 애쓰지 마. 플라잉 브랜켓!”
마법을 구현시키자 희뿌연 원반이 나타난다.
오래전 세정파에 의해 납치되었다가 야쿠자에 의해 몸을 더럽힐 뻔한 이수연을 구할 때 썼던 마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