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6
필요한 정보를 모두 얻었으니 더 머물 이유가 없다. 하여 상점을 나와 왕궁으로 향했다.
빈민의 출입이 금지되어 그런지 어느 도시든 보이는 소매치기나 부랑아 등이 없다. 수년 간 계속된 풍작 덕분에 모두들 먹고살 만한지 표정도 밝다.
“멈춰라! 용무는?”
왕궁 수문위병이 엄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현수는 대답 대신 품속에 있던 양피지를 꺼내서 건넸다.
지난 4월, 미판테 왕실은 코리아 제국의 하인스 멀린 백작이 주인인 하인스 상단으로부터 후춧가루와 연막탄을 구입한 바 있다.
당시 왕실 시종은 금박 입힌 초청장을 남겼다.
스크롤처럼 만들어 끈으로 묶어놓은 것이다.
본인이 아니면 열어보지 말라는 뜻으로 밀랍으로 봉인되어 있었고, 미판테 왕실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
이것엔 미판테 왕국의 국왕을 알현해 달라는 정중한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미판테 왕국을 이동하는 동안 불편함을 겪지 않도록 어느 영지든 이 초청장을 보면 정중히 접대하라는 내용도 쓰여 있다.
아르센 대륙에는 없는 후춧가루와 연막탄에 호기심을 느낀 때문이다.
현수가 건넨 초청장을 펼쳐 든 수문위병은 몸을 부르르 떤다. 국왕의 문장이 새겨진 초청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손해지지는 않는다.
“네 이놈! 이거 어디에서 났느냐? 어서 말하지 못할까?”
수문위병의 음성이 커지자 초소 안쪽에 있던 기사가 튀어 나온다.
“병사! 무엇 때문에 그러나?”
“기사님! 마침 잘 나오셨습니다. 이자가 이걸 가져왔습니다. 한번 보십시오.”
병사가 건넨 양피지를 받아든 기사 역시 부르르 떤다.
국왕이 다른 제국의 고위귀족에게 정중히 초청하는 내용의 문서이기 때문이다. 이동하는 동안 만나게 될 귀족들에게 배려를 아끼지 말라는 지엄한 명까지 써져 있다.
기사는 현수의 아래위를 눈여겨 훑어본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초청장의 주인 같지 않다. 백작이라 하기엔 너무 입성이 초라하고, 나이도 어려 보인다.
손엔 굳은살도 배겨 있지 않다. 검을 잡지 않은 손이다.
“네 이놈! 이걸 어디에서 얻었느냐?”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하거나 도주하려는 기미가 보이면 즉각 베겠다는 듯 검의 손잡이를 쥔 채 노려본다.
“가서 전해라! 초청받은 하인스 멀린 백작이 왔다고.”
“네 이놈! 어디서 감히……. 함부로 귀족을 사칭하면 목이 베어진다는 걸 모르느냐?”
스르릉―!
검을 뽑아 들었지만 기사는 그걸로 위협을 가하진 않았다.
현수가 검을 뽑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나름 기사도를 지키려 애쓰는 자인 듯싶다.
“안다! 그러니 가서 전하라. 코리아 제국의 하인스 멀린 백작이 왔다고.”
“이놈이……!”
기사는 함부로 지껄이면 벨 수 있다는 듯 강렬한 시선으로 노려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안쪽을 살폈다.
기사들이 줄지어 이동하고 있다.
“하나, 둘! 하나, 둘! 하나, 둘! 하나, 둘!”
누군가의 구령에 맞춰 일정한 보폭으로 절도 있게 이동하는 기사들의 모습은 보기에 괜찮았다.
“뭘 봐? 그리고 이거 어디에서 난 거냐고 묻잖아? 훔쳤어? 아님 시체에서 가져온 거야, 뭐야?”
기사는 현수가 귀족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진 듯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할 말을 했다.
“가서 내가 왔다고 전하라 했다. 근데 자네 이름은 뭔가?”
“뭐어? 자네……? 이런 미친놈이? 안 되겠다. 검을 뽑아라. 버릇을 고쳐주마.”
기사가 눈을 부라리며 위협을 가한다.
보아하니 소드 익스퍼트 초급을 간신히 넘긴 초급 기사이다. 그러니 위병근무 조장을 맡았을 것이다.
왕궁은 수시로 귀족들이 드나드는 곳이다.
하여 원래는 귀족의 예절에 대해 잘 아는 남작 내지 준남작 기사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번 연회에 참석할 인원이 다 왔다 판단하였기에 안으로 들어가 있는 상태이다.
현수는 화내는 기사를 무심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검을 뽑으면 그건 고철이 될 텐데?”
“이런 육시랄! 어서 뽑아. 오늘 네놈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지. 입을 함부로 놀렸으니 각오해야 할 거다.”
기사는 눈빛에 흉포함을 담고 있다.
분노의 강도가 심해졌다는 뜻이다. 하긴 한낱 C급 용병이 왕실기사를 업신여겼으니 이럴 만도 하다.
“그래? 너도 안목이 없음을 후회하게 될 거다.”
“헛소리 그만하고 검이나 뽑아라.”
국왕을 만나면 진짜 위저드 로드인지 여부를 확인하려 할 것이다.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으며 마법을 구현하는 건 쑥스러운 일이다.
하여 여기서 능력의 일부를 드러내는 것도 괜찮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좋아! 근데 너 혼자로는 안 되니 저기 저 기사들도 불러오는 게 좋을 거다.”
“미친 놈! 어디서 감히……! 왕실근위대를 뭐로 보고 그딴 소리를 지껄이느냐? 시끄럽다, 시끄러우니 검이나 뽑아!”
고함 소리에 이동하던 기사들의 시선이 쏠린다.
스르르릉―!
허리춤의 바스타드 소드를 뽑자 기사의 기세가 달라진다.
조금 전까지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랐다면 지금은 냉정해진 상태이다. 목숨이 오가는 대결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동하며 시선만 주던 기사단의 발걸음이 멈춘다.
“덤벼!”
“그러지.”
기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현수의 신형이 움직였다.
기사의 좌측으로 이동하자 검이 쇄도한다. 즉시 소드를 등 뒤로 돌리면서 왼 주먹으로 녀석의 복부를 가격했다.
챙! 퍼억―!
“크윽!”
기사의 검은 현수의 소드에 의해 가로막혔다. 그 순간 생각지 못한 충격에 신음을 토하며 뒤로 물러선다.
“이런 치사한……!”
검으로 승부하지 않음을 지적하려는 모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 녀석의 좌측으로 이동했다.
이번에도 소드는 등 뒤로 돌렸다.
챙! 퍼억―!
“크윽!”
방금 전과 똑같은 상황이다. 달라진 게 있다면 통증의 강도가 조금 더 진해졌다는 것뿐이다.
“네 이놈!”
또 노성을 터뜨리려 할 때 한 번 더 왼쪽으로 파고들었다.
챙! 퍼억―!
“크윽!”
이번에도 상황은 같다. 기사의 검은 현수의 등 뒤에 있는 소드에 가로막혔고, 복부에서 충격이 느껴진다.
“으으! 이것밖에 없느냐? 솜방망이 같군.”
기사는 진한 통증을 애써 참으며 노려본다.
“그래? 그럼 다른 걸 보여주지. 덤벼!”
“죽엇!”
쐐에엑―!
전력을 다해 휘두르는 검이 쇄도했지만 현수는 움직일 생각이 없는 듯 바라만 본다. 그러다 검이 허리 어림을 베려는 순간 슬쩍 발을 빼는가 싶더니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이때 기사의 발이 옮겨졌다. 공교롭게도 현수의 발 바로 뒤쪽이다.
서로의 발이 엉키는 순간 현수의 몸이 약간 뒤로 젖혀졌다 앞으로 나온다.
“윽! 어어어!”
쿠웅―!
“으윽!”
발이 걸려 자빠진 기사가 오만상을 찌푸린다. 손으로 짚지도 못하여 온 체중이 걸렸던 때문이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건가?”
“이놈―!”
통증을 털어내고 벌떡 일어선 기사가 다시금 공격 자세를 취한다. 현수는 덤빌 테면 덤벼 보라는 듯 검끝을 까딱거렸다. 입가엔 비릿한 조소가 배어 있다.
“죽엇!”
쉐에엑―!
단칼에 요절내겠다는 듯 달려드는 기사를 본 현수는 소드로 검을 막음과 동시에 다시 한 번 발을 걸었다. 그리곤 슬쩍 뒤로 밀었다.
“어어어!”
우당탕―!
“크으윽!”
이번 엉덩방아는 제법 강도가 셌다. 그래서 그런지 나직한 신음을 토한다.
“이봐! 그러고 있을 거야? 안 덤벼? 그나저나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기사가 된 거지? 미판테 왕국의 근위기사들은 다 이러나?”
“뭐라? 이놈이 어디서 감히……. 얕은 수나 쓰는 주제에……. 그리고 선임기사들을 욕하다니 죽어랏!”
쉐에엑―!
이번엔 목을 노리고 달려든다. 가만히 보고 있다 슬쩍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췄다. 그 순간 기사의 허점이 훤히 드러난다. 목표물을 잃고 휘둘러지는 검의 관성 때문이다.
옆구리에 주먹 한 방을 먹임과 동시에 또 다리를 걸었다.
“커억! 으으으!”
콰당탕―! 챙그랑!
충격이 컸기에 놓친 검이 바닥의 돌과 충돌하면서 금속음을 토한다.
“뭐야? 기사라면서 계속 쓰러져? 진짜 근위기사라면서 이것밖에 안 되는 거야? 쳇! 이거야 원, 수준이 낮아서 어디…….”
현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성이 터져 나온다.
“네 이놈!”
바닥에 쓰러진 기사 녀석이 아니다. 기사단을 이끌고 이동하던 자가 성난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다.
“누구지?”
“왕실 근위기사단 3조장 더글라스다! 네놈이 방금 우리 근위기사단을 욕했느냐?”
“욕……? 내가? 난 욕한 적 없다.”
“어린놈이 어디서 감히……! 정정당당하지 못하게 얕은 수나 쓰는 용병 주제에……. 네놈은 누구냐?”
“나? 나는 하인스. 그리고 얕은 수라니? 내가 사정을 봐줘서 저만한 거다. 본격적으로 이걸 썼다면 벌써 죽었을 거야.”
현수가 쓰러진 기사를 바라보는 눈빛엔 조소의 빛이 어려 있다. 어찌 이걸 눈치채지 못하겠는가!
“이런 미친……! 감시 왕실 근위기사를 희롱하다니…….”
“희롱? 희롱이 아닌데? 난 검은 그렇게 쓰는 게 아니라는 걸 가르쳐 주는 중이야. 앞뒤 안 가리고 무작정 덤비는 못된 버릇도 고쳐줄 겸 말이야.”
“이, 이런……! 누, 누가 누굴 가르쳐?”
근위기사가 C급 용병에게 검술을 배운다고 하면 모두가 배를 잡고 웃을 일이다.
“왜? 너도 배우고 싶어?”
“무어라?”
“배우고 싶으면 덤벼! 한 수 가르쳐 줄 테니.”
“이, 이런……!”
미판테 왕실근위기사단 단장은 소드 마스터로 백작이다.
그의 휘하엔 8명의 부단장이 있다. 모두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이다.
이들 여덟에겐 각기 상급에 해당하는 팀장 4명과 중급 정도 되는 실력을 가진 평기사 60명이 배속되어 있다.
팀장급 32명과 평기사 480명이 있는 것이다.
방금 전 현수에게 혼난 기사는 소드 익스퍼트 초급을 간신히 넘겼기에 아직은 근위기사단에 배속되지 못하였다.
아무튼 더글러스는 왕실근위기사단 서열 20위쯤 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야심만만한 사내이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상급자와의 혹독한 대련을 하며 장차 단장이 되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
당연히 자존심이 엄청 강한 사내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한낱 용병에게 치욕스런 말을 들었다. 당연히 분통이 터진다. 하지만 인내심을 갖고 견뎌낸다.
“좋아! 가르쳐 준다니 한 수 배우지. 그런데 검에는 눈이 없다는 걸 아나?”
뭔가 말을 더 이으려는데 현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물론!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덤비기나 해라. 한 수 톡톡히 가르쳐 줄 테니. 자빠지지 않게 조심이나 하고.”
“네 이놈……!”
현수의 비아냥거리는 듯한 어투가 이성의 끈을 풀어버린 듯하다. 더글러스의 눈에서 분노의 빛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그래도 기사로서의 법도는 지키겠다는 듯 나직이 대꾸한다.
“덤벼라! 오늘 하늘이 얼마나 높은 보여주마. 덕망 높은 기사로서 용병 따위에게 선공할 수는 없으니 먼저 덤벼라.”
“그래? 그럼 나야 좋지.”
『전능의 팔찌』 37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