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7
1장 이놈! 너 가짜지?
“이, 이런 개 같은……! 이이잇!”
바닥에 쓰러졌던 더글라스가 벌떡 일어나며 다시 한 번 검을 휘두른다.
현수에게 선공을 양보했던 건 완전한 실수였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빠른 공격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두어 차례 막아냈다. 그런데 그 뒤부터는 하나도 막을 수가 없었다.
현수의 검면은 더글라스의 볼기짝을 갈기고, 뺨을 때렸으며, 어깨를 두들겼고, 등짝을 후려 갈겼다.
검날을 사용했다면 아마도 지금쯤 잘게 베어진 고깃덩어리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더글라스는 아홉 번이나 자빠졌고, 일곱 번이나 엎어졌다.
현수는 공격을 하면서 ‘어깨가 비었어’, ‘검을 너무 세게 잡고 있으니 공격방향을 바꾸기 어렵잖아’ 등등 비꼬는 말을 연속적으로 해댔다.
자존심이 상한 더글라스는 온 힘을 다해 양패구상의 수까지 썼다. 비장의 한 수로 감추고 있던 수법이다.
지금껏 이 수법으로 많은 적을 패배시켰다. 하지만 이번엔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살을 주고 뼈를 깎는 수법이었지만 현수는 너무도 쉽게 피해내곤 반격했다.
그런데 아주 치욕스런 반격을 받았다. 아주 세게 엉덩이를 걷어차인 것이다.
공교롭게도 항문을 가격당해 더글라스는 두 손으로 엉덩이를 감싼 채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어오르는 추태를 보여야 했다. 견딜 수 없는 통증 때문이다.
이를 악물고 다시 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현수의 목을 기어코 베어내고야 말겠다는 생각으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바보! 그런 수를 쓰려면 하체의 힘을 더 길러야지!”
“어이구, 멍청하기 이를 데 없구만! 엉덩이를 빼고 그러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
“아이구, 두야! 이럴 땐 허리의 반동을 이용해야지. 너 생각 없이 살지? 혹시 저능아 아냐?”
“헐! 이것도 검이라고 휘두른 거야? 너 어깨 위에 있는 그건 머리가 아니라 짱돌이지?”
현수가 내뱉는 말들은 더글라스의 분노를 자극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수학적 표현을 쓰자면 필요충분조건이 완벽하게 갖춰진 말이었다.
분노한 더글라스는 성난 멧돼지처럼 온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현수의 신형은 검과 불과 1∼2㎝ 차이로 번번이 빗겨 나가곤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다리를 걸거나, 여기저기를 걷어찼다. 싸대기를 때리기도 했고, 뒤통수도 여러 번 가격했다.
더글라스는 너무도 화가 나 머리에서 김이 날 지경이었지만 상황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체력고갈 현상이 빚어졌다.
“이, 이런 개 같은……!”
“성질 나? 그러게 평상시에 수련을 게을리하지 말았어야지. 이러고도 기사 소리를 들으니 좋아? 갑옷이 아깝다. 쯧쯧! 더 망신당할래? 수련에 힘쓸래? 나 같으면 하루 종일 연무장에서 살겠는데, 안 그래?”
“이이이익―!”
콰당―!
분노에 겨워 소리를 지르려던 더글라스가 뒷목을 잡고 자빠져 버린다. 성질을 못 이겨 혼절한 것이다.
“쯧쯧! 성질머리하고는……. 기사라는 놈이! 쯧쯧쯧!”
검을 거두며 한마디 하는데 누군가 끼어든다.
“보아하니 용병인 것 같은데 감히 우리 조장님을 모욕하고도 괜찮을 것 같은가?”
“……?”
고개를 들어보니 더글라스가 인솔해 가던 기사들이다.
인원은 정확히 60명이다. 모두가 성난 눈빛으로 현수를 노려보고 있다.
조장에게 견딜 수 없는 치욕을 선사한 것에 대한 공분을 느끼는 모양이다.
“쯧쯧! 여기 자빠져 있는 이자의 수하들인 것 같군. 명색이 기사이니 한꺼번에 덤비진 않을 것 같고…….”
현수는 잠시 말을 끊고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너희의 의중은 어떠하냐는 표정이다.
당연히 기사들은 합공할 마음이 없다는 듯 일제히 한 발짝씩 물러선다. 하지만 딱 한 명만은 그러하지 않다. 신장 195㎝에 몸무게는 150㎏ 정도 되어 보이는 근육질이다.
“그쪽이 이 오합지졸의 부두목인 거야?”
현수는 슬쩍 상대를 도발하는 말을 했다.
당연히 모두들 분노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아직 아무도 검을 뽑지는 않았다.
“너는 무엇보다도 명예를 중시하는 기사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을 주었다. 나는 우리 팀의 부팀장으로서 네게 도전한다. 받아들이겠느냐?”
“부팀장? 팀장도 졌는데 겨우 부팀장이……? 나야 뭐……! 좋아, 도전을 허락한다.”
스르릉!
말 떨어지기 무섭게 검을 뽑아 든다. 형형한 눈빛을 빛내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방금 전 상대했던 더글라스와 최소 호각지세는 이룰 실력은 가진 듯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말을 이었다.
“단! 져도 울지 마라. 나는 덩치 큰 사내가 찔찔거리는 건 못 봐주거든.”
“…그러지! 미리 말하지만 내 검엔 눈이 없다. 각오해라.”
“오케이! 아니, 알았다, 그럼 덤벼 봐.”
“검을 뽑아라! 나는 무기가 없는 자를 상대하지 않는다.”
부팀장이라는 이 사내는 본인이 기사라는 걸 꿈에서도 잊지 않은 듯싶다.
“그건 니가 걱정 안 해줘도 돼! 덤벼!”
현수가 둘째손가락을 까딱까딱거리며 도발하자 부팀장은 잠시 망설이는 듯한 표정이다. 어디를 어떻게 공격할 것인지 생각한 것이다.
“네놈이 자초한 일이다. 받아랏!”
쉐에에엑―!
단숨에 왼팔을 베어 내겠다는 듯 횡으로 쓸어온다.
제법 빠르고 기세도 강하다. 하지만 사정권 안에 들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도 없는 수이다.
현수는 슬쩍 뒤로 한 걸음 빠지는 듯하다 다시 앞으로 숙였다. 부팀장이 휘두르는 검의 바로 뒤를 따라 안으로 파고든 것이다.
부팀장은 상대가 이토록 쉽게 검을 피할 것이란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얼른 검을 멈춰 반대로 쓸어버리려 했다. 하지만 현수가 누구인가!
찰싹―!
부팀장의 뺨따귀를 갈긴 현수가 뒤로 물러서는 순간 진행방향을 반대로 바꾼 검이 쇄도한다. 이번엔 슬쩍 주저앉았다가 일어섰다. 그리곤 왼 주먹으로 부팀장의 복부를 갈겼다.
느닷없는 충격에 순간적으로 호흡이 끊긴 바로 그 순간 다시 주저앉은 현수의 다리가 바닥을 쓸었다.
퍼억―!
콰당탕! 챙그랑!
갑작스런 충격에 모로 쓰러진 부팀장은 들고 있던 검을 놓친다.
“크으윽!”
“뭐 별거 아니네. 근데 그 수법이 먹힐 거라 생각했나? 이렇게 쉽게 피하고 반격할 수 있는데. 봐, 난 검도 안 뽑았잖아. 안 그래? 그 실력이면 부팀장이 되는 거야?”
“이이잇!”
얼른 검을 주워 든 부팀장이 이번엔 세로로 베어온다.
반보 옆으로 비켜섰다가 원위치하는 사이에 검은 허공을 벤다. 그와 아울러 부팀장의 상체 전부가 허점으로 드러난다.
현수는 이번엔 돌려차기를 시도했다.
휘이익―! 퍼억―!
“크으윽!”
콰당탕―!
“으으으으!”
턱을 제대로 가격당한 부팀장은 일어서려다 다시 주저앉는다. 제법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쯧쯧! 이 실력으로 부팀장을 하다니. 그럼 너희는…….”
당장에라도 검을 뽑아 달려들 기세를 보이던 기사들은 현수와 시선이 마주치자 움찔거리면서도 물러서진 않는다.
“보아하니 제대로 된 스승이 없어 실력들이 일천한 거 같군. 좋아, 내가 친히 지도해 줄 테니 생각 있으면 덤벼 봐.”
“뭐라고? 한낱 용병 따위가……!”
“이이잇!”
화는 나지만 팀장과 부팀장 모두 형편없는 몰골이 되어 쓰러져 있다. 허접하고 유약해 보이는 용병이 의외의 실력자라는 건 인정된다.
하지만 기사 체면에 물러설 수는 없다. 그리고 팀장과 부팀장의 체면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이 용병에게 패했다는 소문이 번지면 왕궁 근위기사단의 명예가 실추된다.
따라서 현수는 반드시 제압해야 할 인물이다. 그런데 누가 먼저 덤벼들 건지에 대한 건 결정된 바 없어 서로 눈치를 본다.
“아아! 서로 눈치 볼 거 없어. 그냥 덤벼. 너희쯤은 한 손으로도 충분하니까.”
현수가 또 도발하자 모두들 발작적으로 이를 악문다.
“아! 안 덤빌 거야? 그럼 난 들어가고.”
말을 마친 현수가 발을 떼어 왕궁 안쪽으로 움직이자 기사들이 일제히 앞을 가로막는다.
이곳은 왕궁이다.
신분이 확실치 않으면, 그리고 그럴 만한 자격이 없으면 아무나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는 곳이다.
그리고 왕궁의 근위기사는 이런 행위를 막는 것이 임무이다. 그렇기에 현수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네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어디긴? 미판테 왕국의 왕궁 아닌가?”
“그런 걸 알면서도 이런단 말이냐?”
“국왕이 보내온 초청장이 있으니 당연한 거 아냐?”
현수의 말에 모두들 흠칫거린다.
“국왕께서 보내신 초청장이라니 그, 그게 무슨 말이냐?”
기사들 중 제법 나이 들어 보이는 사내의 말이었다.
“저기 저놈 곁에 나뒹굴고 있는 저게 이 나라 국왕이 내게 보낸 초청장이지. 확인해 봐.”
“…자, 잠시 기다려라.”
나이든 사내가 모두들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뜻으로 손을 번쩍 들었다. 이에 모든 기사가 뽑아 들었던 검을 집어넣는다. 사내의 뜻을 단번에 알아차린 것이다.
모두가 멈추자 나이 든 사내가 성큼성큼 걸어 팀장의 곁에 떨어져 있던 스크롤을 집어 든다.
잠시 내용을 살핀다. 그리곤 현수에게 시선을 준다. 모두의 시선이 쏠려 있다.
“네가… 아니, 당신이 하인스 백작님이신 겁니까?”
상대가 귀족이라면, 그것도 백작위를 가진 고위귀족 본인이라면 기사가 함부로 대할 상대가 아니다.
그렇기에 말을 올린 것이다.
“그래! 그러니 안에 기별을 하든지, 아니면 안내해.”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가 현수의 아래위를 훑어본다. 그런데 똥이라도 씹은 표정을 짓는다.
“으음! 믿을 수 없다! 솔직히 말해. 이거 어디에서 났지?”
사내 역시 팀장과 다를 바 없는 시선으로 현수를 노려본다. 아무리 봐도 백작위를 가진 귀족 본인으로 보이지 않은 때문이다.
“허어! 나, 이거 참! 이것 봐! 날 안으로 안내해. 그럼 저절로 알게 될 일 아닌가?”
“그건 안 될 말이지. 이곳이 어디라고 감히! 모두들 놈을 포위해라!”
“네! 알았습니다.”
모든 기사가 현수를 포위한다.
60명이 겨우 한 명을 에워싼 채 노기 등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상황이다. 하지만 팀장과 부팀장을 차례로 쓰러뜨린 실력자라는 걸 잊지 않았기에 함부로 덤벼들진 못하고 있다.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현수를 노려만 볼 뿐이다.
“뭣들하나? 안 덤벼? 안 덤빌 거냐고?”
두어 번 반복해서 물었으나 아무도 대꾸하지 않고, 아무도 덤벼들지 않는다.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현수가 발걸음을 옮겨 왕궁 안쪽으로 옮기자 기사들은 같은 걸음 수만큼 뒤로 물러난다. 물론 모두들 검을 뽑아 들곤 있지만 아무도 공격할 생각은 없는 듯하다.
그렇게 이십여 발자국을 걷던 현수가 그 자리에 멈춘다.
“허어, 이거 참 거치적거리네. 앞을 가려서 아무것도 안 보이지 않나? 안 덤빌 거면 길이나 비켜라!”
말을 마치곤 더 이상 봐주지 않겠다는 듯 성큼성큼 걸었다. 이번에도 다가간 만큼 물러선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다.
“모두 비켯! 야아압!”
혼절의 나락에 떨어져 있던 더글라스가 기합성을 터뜨리며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현수에게 달려든다.
“쯧쯧!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그렇게 하면 허리가 빈다니까. 야압!”
쉐에엑! 채엥! 퍼억―!
“크흑!”
와당탕탕!
더글라스는 달려들던 속도보다 더 빨리 뒤로 나뒹군다.
단숨에 머리를 두 쪽 내겠다고 내려친 검을 막은 뒤 옆구리를 사정없이 걷어찬 결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