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8
지독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더글라스는 분노를 이길 수 없는지 버럭 소리를 지른다.
“크으윽! 뭐, 뭣들 해? 어서 놈을 제압해! 어서!”
“네?”
대체 무슨 뜻인지 명확히 해달라는 반문이다.
“합공하란 말이야! 모두 달려들어 놈을 제압해!”
“네? 아, 알았습니다.”
“모두들 공격! 공격하라! 공격하라!”
“와아아아!”
기사는 명예를 몹시 중시한다. 그렇기에 어느 누구도 합공을 생각하지 않았다. 기사도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관의 명이 떨어졌다.
마땅히 보호해야 할 주군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거나 누구나 인정할 정도로 감당할 수 없는 적을 만났을 때에는 합공을 해도 된다. 물론 상부의 명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상명하복이 철저한 곳이 근위기사단이기에 모든 기사가 일제히 달려든다. 명이 떨어졌으니 이제부턴 명예에 흠집 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더글라스는 현수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보고 싶었다. 하지만 부하들에 의해 완전히 싸여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다.
챙! 퍽! 채챙! 퍼퍽! 채채채챙! 퍼퍼퍼퍽! 챙그랑! 와당탕! 챙! 퍼퍽! 채채채챙! 퍼퍼퍽!
“켁! 컥! 크윽! 으악! 헉! 컥! 커컥! 헉! 아악!”
요란한 금속음에 이어 격타음이 연이어 들려온다. 그와 동시에 기사들이 뒤로 자빠지거나 앞으로 엎어진다.
모로 쓰러지는 자들도 상당히 많다.
“으으! 이럴 수가……!”
더글라스는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60명이나 되는 기사 모두가 쓰러져 있다.
“으으으!”
“크으으으!”
“아아, 아아아!”
모두들 나직한 비명을 지른다. 다행히 검에 의한 상처는 없는지 붉은빛은 보이지 않는다.
“저, 저건……!”
더글라스의 눈이 또 한 번 커진다. 부하들이 걸치고 있는 아머가 움푹 찌그러져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뭐야? 겨우 이것밖에 안 돼? 이러고도 기사라고 할 수 있는 거야? 너희보다 허수아비 상대하기가 더 어렵겠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쓰러진 기사들을 바라보는 현수의 입가엔 조소가 머금어져 있다.
“너! 공격할 때 그렇게 무모하게 덤비면 어떻게 되는지 이제 깨달았어? 상대를 공격하려 할 때에도 최소한의 방어는 염두에 둬야 하는 거잖아. 그렇게 물불 안 가리고 덤비니까 당하는 거야, 그리고 너! 칼 휘두르는 법 누구에게 배웠어? 기본기가 영 꽝이야. 그러니 오늘부터 가로 베기 3,000번과 세로 베기 3,000번씩 해. 그리고 너……!”
현수는 쓰러진 60명의 기사에게 일일이 시선을 주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지적해 주었다. 아울러 그에 대한 처방도 곁들였다.
그런데 말투 때문인지 모두들 분노하는 표정을 짓는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그럼 난 들어가고.”
현수가 다시 왕궁 안쪽으로 두어 발짝 걷자 더글라스가 고함을 지른다.
“안 된다! 막아! 막으란 말이야! 놈이 안으로 못 들어가게 막아! 어서……!”
“네!”
쓰러졌던 기사들 모두 일어선다. 그런데 심한 통증 때문인지 비틀거리는 자가 상당하다. 어쨌거나 기사들은 다시 현수를 둥글게 에워쌌다.
“한 번 더 맞고 싶다고? 좋아. 몸이나 풀지. 덤벼!”
비아냥거리는 어투가 몹시 거슬렸는지 가까이 있던 자들이 검을 휘두르며 쇄도한다. 그야말로 일도양단할 기세이다.
“이이잇! 죽엇!”
“죽어라!”
“야아아압!”
나머지 기사들 역시 일제히 쇄도한다. 가히 검의 숲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퍼퍽! 챙! 챙그랑! 퍼퍼퍼퍽! 와당탕! 퍼퍽! 챙그랑! 와당탕탕! 퍼퍼퍼퍽! 챙! 챙! 챙챙챙!
“크윽! 케엑! 컥! 크악! 크헉! 으윽! 아악! 커컥! 크으윽!”
더글라스는 똑똑히 보았다.
기사들 사이사이를 교묘히 누비며 가격하고, 걷어찼으며, 이마로 들이받는 현수를!
지구 사람이 아니라 슬로우비디오라는 말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기사들은 아주 느리게 움직이는 가운데 현수만 섬전처럼 그 사이를 파고들며 검을 쳐냄과 동시에 옆구리, 턱, 허벅지, 엉덩이, 아구창 등을 공격했다.
다음 순간 기사들은 또 한 번 일제히 나가떨어진다.
“이따위 실력으로 기사라고 폼 잡고 살았나?”
“……!”
그야말로 유구무언이다.
“어때? 한 번 더 기회를 줄까?”
현수의 시선을 받은 기사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인원은 월등히 많지만 상대의 솜털조차 건드려 보지도 못했다. 반면 자신들은 뻐근한 통증을 느끼는 중이다.
검면으로 따귀를 맞은 기사는 각도가 조금만 더 틀어졌다면 이 세상을 하직했을 것이라는 걸 생각하고 몸을 부르르 떤다.
하마터면 죽을 뻔한 걸 이제야 실감한 것이다.
명치 바로 아래를 맞은 자 역시 주먹이 조금만 더 위쪽으로 올라왔다면 관 속에 누워 있을 것이다.
허벅지를 맞은 자가 오금을 걷어차였다면 불구가 되었을 것이다. 아구창을 맞은 자는 관자놀이가 아닌 걸 천만다행이라 여기는 중이다.
“그럼 나는 간다. 참! 그거 내 놔.”
현수의 시선을 받은 더글라스는 고개를 젓는다. 그러면서 바닥에 떨어져 있던 초청장을 움켜쥔다. 근위기사로서 정체불명인 자가 안으로 들어가게 놔둘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글라스는 초청장을 아머의 틈새로 쑤셔 박는다. 가능하다면 힘으로 빼앗아 가라는 뜻일 게다.
현수가 보기엔 가소롭기만 하다.
하지만 힘써서 빼앗기도 뭐한 상황이다. 기사 60명은 쓰러져 끙끙거리면서도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있다.
더글라스를 제압하고 초청장을 끄집어내면 또 한 번 덤벼들 게 뻔하다.
“너희는 기사라 하기엔 아직 미흡하다. 실력이 너무 일천해! 그래 가지고 미판테 왕국의 근위기사라 할 수 있겠나?”
“……!”
모두들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다. 60명이 덤벼들고도 제압하지 못한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너희 모두의 문제점은 기본기에 충실하지 못하고, 겉멋만 잔뜩 들었다는 것이다. 하여 처방을 내린다. 향후 300일간 가로베기 3,000천 회, 세로베기 3,000회를 실시하라.”
“……!”
현수는 분명 무단으로 왕궁을 침범하려는 자이다. 그런데 마치 수하들에게 명을 내리듯 말을 한다.
기사들 모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대꾸하거나 꾸짖지 않았다. 또 맞기는 싫었던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의 말은 이어졌다.
“아울러 하체단련 또한 명한다. 매일 아침 외성 바깥을 한 바퀴씩 뛰도록! 뛸 때마다 시간이 단축되도록 조금씩 속력을 높이도록! 최종 목표는 1시간 이내 주파이다.”
미판테 왕궁은 외성과 내성으로 조성되어 있다. 외성의 둘레는 대략 20㎞ 정도 된다.
기사들은 외성의 바깥을 상상하며 고개를 저었다. 무거운 아머까지 걸친 채 달리라는 것으로 오해한 까닭이다.
한 바퀴 돌고나면 몇 시간은 널브러져 있어야 간신히 회복될 듯싶다.
기사들이 멍한 시선으로 이건 뭐지 하는 표정을 지을 때 현수의 입술이 달싹인다.
“홀드 퍼슨!”
샤르르릉―!
서늘한 마나가 스며들자 초청장을 빼돌리기 위해 도주하려 몸을 돌리던 더글라스의 몸이 그대로 굳는다.
“어, 어라……! 모, 몸이 왜 이래?”
더글라스의 입에서 당혹석이 터져 나온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더글라스에게 다가가 아머의 틈새에 박혀 있는 초청장을 끄집어냈다.
불과 몇 분이지만 고약한 냄새가 난다.
“크으! 더러운 놈. 좀 씻고 다녀라.”
현수의 나직한 중얼거림에 더글라스의 얼굴이 시뻘게진다.
그렇지 않아도 몸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중이다. 몸의 여러 부위에서 지독한 고린내가 난다. 씻어도 소용없고, 향기로운 것을 발라도 그때뿐이다.
더글라스의 몸에는 약 20개의 피지낭종이 있다.
표피낭종이라고도 불리는 이것은 몸 안에 염증이 생겼거나 피지를 분출하지 못해서 발생되는 것이다.
짜내면 악취 나는 피지가 나오고 며칠 지나면 또 짜낼 만큼 생겨난다. 짜내지 않아도 조금씩 냄새가 배어 나온다.
병원에 가면 낭종이 있는 부위를 외과적으로 절제하여 주머니를 제거하거나 작은 구멍을 통하여 껍질까지 제거하는 핀홀(Pin―Hole)법으로 처치한다.
어쨌거나 더글라스가 초청장을 아머 틈새로 쑤셔 박자 그 압력으로 고린내 나는 피지가 나왔다.
이게 초청장에 묻은 것이다.
“안 씻어서 그런 게 아냐. 하루에 적어도 세 번은 씻어!”
“……?”
“가만히 있어도 몸에서 냄새가 난단 말이다.”
“으으! 이놈이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눈여겨보니 귀 밑과 입술 아래쪽 등 불룩 솟은 낭종이 보인다. 그 순간 예전에 읽었던 의서의 내용이 뇌리를 스친다.
‘수술밖엔 답이 없는 거군. 쩝! 안 되었네. 가만! 이건 피지가 외부로 배출되는 도중에 굳어서 이런 거잖아.’
현수가 눈빛을 빛내며 낭종들을 살피자 더글라스는 하려던 말을 삼켰다.
이것 때문에 신전을 찾아가 봤었다. 그때 만난 신관은 상처가 있는 게 아니라서 치료해 줄 수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왕궁을 드나드는 마법사들도 만나봤다. 그래 봤자 6서클 이하들이다. 마법사들도 고개를 흔들었다.
힐이나 큐어 같은 치료마법으론 고칠 수 없다는 뜻이다. 비싼 돈을 들여 포션을 사서 발라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효과 없었다.
벌써 몇 년째 아내와의 동침이 없었다.
냄새난다며 잠자리를 거부한 때문이다. 하여 적지 않은 나이가 되었지만 아직 자식을 보지 못했다.
이런저런 스트레스를 견뎌내기 위해 수련에 몰두했지만 땀이 나면 냄새만 심해질 뿐이다.
동료와 상관, 그리고 부하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기에 웬만해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진짜 심각하게 냄새가 풍길 때 슬쩍 이맛살을 찌푸리는 정도이다.
어쨌거나 더글라스에게 있어 네 몸에서 냄새난다는 말은 역린을 건드리는 것과 같다. 또한 핫 버튼(Hot―Button)1)이 눌러지는 것이기도 하다.
하여 발작적으로 뭐라 하려 할 때 현수의 입술이 먼저 달싹인다. 가장 가까이 있는 더글라스가 아니라면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로 나직한 음성이다.
“마나여, 모든 걸 원상으로 회복시켜라. 리커버리!”
샤르르르르릉―!
서늘한 푸른빛 마나가 더글라스의 체내로 스며든다.
“……!”
같은 순간 더글라스의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떠졌다. 언젠가 있었던 마법사와의 대화 때문이다.
2장 왕궁에서 벌어진 일
“더글러스! 안타깝게도 자네의 병은 내 능력으로도 치료할 수 없네.”
미판테 왕궁 궁정마법사로 재직하다 얼마 전에 은퇴한 5서클 마법사의 말이다.
더글라스는 오랫동안 그가 머물던 연구실 경비를 책임진 바 있기에 배웅하면서 말 몇 마디를 나눈 것이다.
그때 그 마법사는 말을 조금 더 길게 이었다.
“자네의 병은 7서클 이상 고위 마법사가 오셔야 해결될 수 있을 것 같네. 7서클 중에서도 마스터급에 도달해야 시전할 수 있는 리커버리라는 마법만이 해결책이네.”
“7서클 마스터요?”
“그래!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르센 대륙의 마법사 가운데 가장 화후 깊은 분이라도 7서클 유저에 불과하시네. 그러니 포기하게.”
“그럼, 7대 마탑 탑주님들도 안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안타깝지만 그러하네. 그분들 능력으로도 리커버리는 불가능하니 말이네.”
그날 이후 더글라스는 악취를 제거하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해봤자 소용이 없다는데 어쩌겠는가!
그런데 방금 눈앞에서 리커버리 마법이 구현되었다. 그러니 어찌 눈을 크게 뜨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