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1
혹시 있을지 모를 왕궁 난입을 차단하기 위함이다. 현수는 대결을 하여 흘깃 살펴보았다. 나머지 근위기사들도 총출동한 듯하다.
아무튼 상당히 많은 사람이 둘의 대결을 눈여겨보는 중이다. 한쪽은 왕국 근위기사단장인 소드 마스터이고, 다른 한쪽은 젊어 보이는 C급 용병이다.
둘이 일진일퇴를 거듭하자 모두가 놀란 표정이다. 말도 안 되는 대결이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기사와 병사들 모두 뒤로 조금씩 물러나 너른 공터를 만들었다.
구경하다 날벼락을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둘의 대결은 거의 10분간이나 유지되었다.
백작은 공격일변도이고 현수는 계속 방어만 했다.
그러다 간간히 허를 찌르는 공격을 시도하여 백작을 당황케 하였다. 하지만 상처를 입히진 않았다.
백작의 검에선 1m짜리 검강이 뿜어져 있다.
손잡이를 빼면 거의 2m에 가까운 길이이지만 현수의 것은 여전히 평범한 철검인 것으로 보인다.
이 모습에 모두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검강에도 견뎌내는 새로운 금속은 아닌 듯싶은데 어찌 이런 현상이 빚어지는지 이상했던 때문이다.
이러는 동안 백작은 본인이 시전할 수 있는 모든 수법을 썼다. 체력은 급격히 떨어지고 마나 역시 간당간당한 상태이지만 티내지 않으려 애써 호흡을 고르며 눈빛을 빛낸다.
“이번이 마지막이오.”
“얼마든지…….”
“야아아압!”
쐐에에에엑―!
백작의 검이 묘한 곡선을 그리며 현수의 어깨를 향해 짓쳐 든다. 긴 병장기의 이점을 살린 수법이다.
당연히 검을 마주쳐 갔다. 두 검이 격돌하는 순간 현수의 검에서 아주 잠깐 시퍼런 빛이 일렁였다.
필요할 때만 아주 잠깐 발현되는 플래시 오러 블레이드이다. 단장처럼 계속해서 검강을 발현시키고 있는 것은 마나의 낭비이다. 그걸 개선한 것으로 웬만한 소드 마스터들은 시전할 수 없는 수법이다.
채에에엥―!
“크흑! 헉……!”
쥐고 있던 검이 강력한 반탄력에 허공으로 치솟자 백작은 당황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액션은 취하지 못했다.
현수의 바스타드 소드가 어깨 위에 얹혀 있었던 때문이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누, 누구십니까?”
현수는 오러를 쓰지 않고 소드 마스터를 격퇴시켰다.
그런데 백작 본인은 스스로를 약하다 생각하지 않는다.
아르센 대륙에 여러 소드 마스터가 있지만 중급과의 대결을 해도 쉽게 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본인의 생각이다.
그만큼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름도 없는 C급 용병과의 대결에서 검을 놓치는 패배를 당했다.
전투 중이었다면 방금 목이 베어졌을 것이다.
믿을 수 없는 결과이다. 분하지만 상대가 누군지 궁금하다. 이런 실력자가 있다는 소문조차 들어보지 못했다.
하여 저도 모르게 물은 것이다.
“말했잖소. 국왕의 초청을 받은 사람이라고…….”
“저, 정말인 것이오?”
진짜인 듯싶다. 하여 백작은 말까지 더듬는다.
“내가 이렇게까진 안 하려 했는데… 쩝! 할 수 없군.”
현수가 스스로 이실리프 마탑주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이유는 남세스러워서였다. 자화자찬하는 기분이 든 때문이다.
또 그럴 경우 한바탕 소란이 빚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몹시 번거로워진다. 미판테 왕국의 거의 모든 마법사가 몰려들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초청장을 보여주고 여러 번 말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아 이런 지경이 된 것이다.
지이잉! 지이이이이잉―!
“헉……!”
“아앗! 저, 저건……!”
“헐! 저게 뭐야? 검강이 어떻게 저렇게 길어?”
“저건 말도 안 돼! 검강이 어떻게……!”
“허걱! 그, 그랜드 마스터이시다.”
“뭐어? 그, 그랜드 마스터? 세상에……!”
“세상에 맙소사! 지, 진짜 그랜드 마스터이시다.”
모두들 눈은 크게 뜨고 입은 딱 벌리고 있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완전히 넋이 나가 버린 것이다.
뇌리가 텅 비어버린 듯 아무런 상념도 없는 무념무상의 상태는 잠시 지속되었다.
이런 상태를 깬 건 한 여인의 음성이었다.
“어머! 자기 왔어요?”
모두의 시선이 여인에게 향한다.
곧 후작이 될 로니안 자작의 딸 로잘린 영애이다.
아르센 대륙을 진동시킨 이실리프 마탑주의 부인이 될 여인으로 알려져 있다.
테세린의 번영을 탐낸 귀족들이 서로 며느리 삼으려던 여인이기도 하다. 빗발치듯 날아들던 청혼서가 뚝 끊긴 것은 로잘린이 왕실의 청혼까지 거절한 이후이다. 왕가에 대한 모독이 됨을 알면서도 정중히 거절했던 것이다.
하여 평생을 홀로 늙어갈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이실리프 마탑주의 부인이 될 예정이라 한다.
왕실에선 세상 모든 마법사의 수장인 마탑주에 대한 예의로 로니안 자작을 후작으로 두 계급이나 승작하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다.
하여 모두가 승작식에 참석하려 모인 참이다.
귀족 중엔 마법사들이 제법 있다. 이들에 의해 로잘린은 거의 여왕 대접을 받는 중이다.
어쨌거나 로잘린이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행복해하는 여인의 미소이다. 모두의 시선은 다시 현수에게 쏠렸다.
이십오 세 전후로 보이는 검은머리 청년이다. 이때 모두의 뇌리로 스치는 상념이 있었다.
그 순간 모두의 무릎 또한 저절로 꿇려진다.
쿠쿵! 쿠쿠쿠쿠쿠쿠쿵―!
“에, 에드가 롤랑 폰 갈리아가 위대하신 위저드 로드를 뵙습니다.”
6서클 마법사이자 미판테 왕국의 재상인 갈리아 공작이 가장 먼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린다.
“마스터시여! 소인, 할만 공작이옵니다.”
소드 마스터이자 미판테 왕국군 총사령관인 할만 공작 역시 털썩 무릎을 꿇는다. 20m짜리 검강을 보는 순간 아랫도리에서 힘이 빠져버린 결과이다.
“미판테 왕국의 2왕자 로덴이 로드를 뵙습니다.”
“3공주 데레사가 그랜드 마스터님을 알현하옵니다.”
“칼멘 후작이 그, 그랜드 마스터님을 알현하옵니다.”
“위, 위대하신 로드를 알현하옵니다.”
“검의 하늘이신 그랜드 마스터님을 뵙게 되어 일생의 광영이옵니다.”
미판테 왕국의 재상 갈리아 공작과 최고사령관 할만 공작을 위시하여 왕자와 공주, 그리고 후작들과 백작, 자작, 남작 모두의 고개가 조아려졌다.
이들을 수행하던 기사와 마법사들은 법열2)에 떨고 있다. 너무도 위대한 존재를 두 눈에 담고 있다는 희열이다.
고개를 숙이지 않은 사람은 딱 둘이다. 로니안 자작과 로잘린이다. 세실리아 부인은 동행하지 않아 자리에 없다.
“허흠! 모두 고개를 들으시오.”
“로드의 명을 받잡사옵니다.”
“마스터의 명을 따르옵니다.”
모두들 뭐라 뭐라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어 현수를 바라본다. 너무도 평범해 보이는 청년이다. 그런데 비범함을 훌쩍 뛰어넘은 위대하고 또 위대한 존재이다.
그렇기에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아지리이다.’ 같은 분위기가 되어 모두가 바라본다.
“국왕께서 초청하시어 이 왕국에 왔습니다. 마침 내 장인이 되실 분의 승작식이 있다는데 참석해도 되겠는지요?”
현수의 시선을 받은 갈리아 공작이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무, 물론입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씀이시옵니다.”
“연회 중이라 들었습니다. 배가 좀 고프군요.”
“아! 그렇습니까? 제,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갈리아 공작이 다시 한 번 고개를 조아린다.
미판테 왕국의 재상이자 실세인 공작이 이러니 다른 존재들은 어떠하겠는가!
모두들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다.
“허험! 그럼 가시지요.”
갈리아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안쪽으로 들어가자는 손짓을 한다. 물론 매우 정중하다. 공작에게 있어 현수는 국왕보다도 우선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현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오른팔을 슬쩍 들어 올렸다. 그리곤 로잘린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심전심이 되었는지 냉큼 다가와 팔 아래에 어깨를 디민다. 아주 다정한 연인이라는 걸 모두에게 보여준 것이다.
현수가 오기 전, 로잘린의 미모에 혹해 어떻게 해보려던 왕자는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음을 크게 다행으로 여겼다.
만일 이전처럼 센트 오브 워머나이저나 실프의 눈물을 써서 욕심을 채웠다면 지금쯤 목이 베어졌을 것이라는 걸 실감한 것이다.
조금 전에 보았던 길이 20m짜리 검강을 보는 순간 하마터면 소변을 지릴 뻔했다. 튼튼하기로 이름 난 왕궁의 정문 따위는 일검에 박살 낼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닌 검강이다.
어릴 때부터 근위기사단장으로부터 수련을 받았고, 이제 막 소드 익스퍼트 초급에 접어들었기에 그것의 위력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바위를 무 베듯 하는 걸 여러 번 본 때문이다.
갈리아 공작의 안내를 받아 연회장 입구에 당도하니 미판테 왕국의 국왕과 왕비가 여러 왕자와 공주들을 대동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미판테 왕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먼저 고개를 숙인 건 국왕이었다. 위저드 로드는 제국의 황제조차 마주 예를 취해야 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랜드 마스터이기까지 하다. 보고받은 바에 의하면 근위기사단이 단체로 덤벼들었다가 모두 나가 떨어졌다.
소드 마스터인 단장 또한 패배했다.
이 정도면 일인군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갖출 수 있는 최상의 예를 보인 것이다.
“국왕 전하의 환대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실리프 마탑을 책임지고 있는 하인스 멀린 킴 드 셰울입니다.”
“네에, 환영합니다. 이쪽은 1왕비인 카다시안이라 하고, 이쪽은 2왕비…….”
국왕은 일곱 명의 왕비를 차례로 소개했고, 아홉 명의 왕자의 열한 명의 공주 또한 일일이 소개했다.
연후에 근위기사들이 분수도 모르고 달려들었던 것에 대한 정중한 사과의 말이 있었다. 이에 현수는 국왕의 재가도 없었는데 한 수 가르침을 주었다면서 가볍게 웃어주었다.
“자! 안으로 드시지요.”
“네, 그러지요.”
이번 안내는 국왕이 친히 했다. 국왕의 뒤를 따라 현수와 로잘린이 들어서자 왕비와 왕자, 그리고 공주들이 따랐다.
그들의 바로 뒤로 갈리아 공작과 할만 공작, 그리고 로니안 자작이 따랐다. 이들의 뒤로 후작, 백작, 자작, 남작 등이 줄지어 들어섰다.
안에 들어가 보니 여러 개의 탁자가 놓여 있고, 온갖 음식들이 차려져 있다.
“시장하시다 들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현수는 가장 상석으로 안내되었다. 국왕의 바로 옆자리이다. 모두가 착석하자 국왕이 입을 연다.
“연회를 계속하라!”
“예으이!”
악사들이 부드러운 멜로디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많이 드십시오. 로드!”
“하하, 네에. 감사히 먹지요.”
현수가 음식을 먹기 시작하였지만 어느 누구도 먹을 생각이 없는 듯 현수만을 바라만 보고 있다. 위대한 존재는 어떻게 음식을 먹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하하! 너무도 빤히 바라보니 민망합니다. 전하!”
“아……! 죄송합니다. 이봐……!”
국왕이 시종장에게 무어라 지시하자 금방 귀엣말로 갈리아 공작 등에게 전해진다.
그러는 사이에 로잘린이 재잘거린다.
“자기! 언제 왔어요?”
“언제는 조금 전에 왔지. 그러는 자기는 언제 당도했어?”
“그제요. 참 먼 길이었어요.”
바다로 오는 동안엔 뱃멀미로 심한 고생을 했고, 해적에 납치당하여 험한 꼴을 당하기 일보직전까지 몰렸었다. 육지에 올라서도 고생은 여전했다. 너무 멀고 지루했던 때문이다.
로잘린 입장에선 평생처음 엄청난 거리를 이동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약간 마른 듯싶다.
“그래? 오는 동안 고생이 많았나 보네.”
테세린에서 이곳으로 오려면 길고긴 라수스 협곡 아래까지 남행했다가 갔다가 북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