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882화 (881/1,307)

# 882

협곡을 관통하는 지름길이 있지만 레드 드래곤 라이세뮤리안이 인간의 출입을 금한 때문이다.

상당히 먼 길을 이동하는 동안 로잘린은 낯선 잠자리와 입에 맞지 않는 음식 때문에 심한 고생을 겪었다.

이동하는 내내 엉덩이에 굳은살이 밸 정도로 지루했다.

뿐만이 아니다. 의복 세탁이 거의 불가능했고, 제대로 씻을 수 없는 불편함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하여 로잘린은 실제로 약 5㎏ 정도 살이 빠진 상태이다.

고생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뉴에튼에 당도해서도 과분한 대접 때문에 모든 것이 신경 쓰였다. 거의 제국의 공주 대접이었다. 매일 아침 왕자와 공주들이 식사하자고 찾아왔으니 얼마나 불편했겠는가!

그런데 현수와 함께 있게 되자 로잘린은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상당히 많이 먹는다. 먹보라는 소리가 목구멍 바로 아래까지 올라올 정도였다.

현수 역시 상당히 많은 양을 섭취했다. 로잘린을 배려한 것이다. 그러는 동안 국왕과 갈리아 공작, 그리고 할만 공작 등은 정중히 양해를 구하곤 자리를 비웠다.

긴급 어전회의를 개최하기 위함이다.

라이셔 제국에서 마탑주의 장인이 될 에델만 백작을 공작으로 승작시켰다는 때늦은 보고를 받은 때문이다.

제국에서 공작이라면 왕국에선 공왕으로 모셔야 함이 마땅하다. 그렇기에 긴급회동이 이루어진 것이다.

즉석에서 국왕과 두 명의 공작, 그리고 세 명의 후작이 모여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리곤 돌아왔다.

현수가 로잘린의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다정스레 닦아줄 때 국왕이 다가온다.

“험험! 잠시 실례했습니다. 로드!”

“아! 네에.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음식이 입에 맞네요.”

“그렇습니까? 그거 참 다행입니다.”

국왕은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현수와 적으로 만나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이라는 마음 때문이다.

“같이 드시지요.”

“그럼, 그럴까요? 그전에 건배 제의를 드리고 싶습니다.”

“아! 그래요? 그럼 그러시죠.”

국왕은 현수와 로잘린을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고는 나이프를 들어 주석잔을 두드렸다.

띵, 띵―!

두 번의 금속음이 들리자 곁을 지키고 있던 왕실 시종이 의전용 스태프로 바닥을 두드린다.

쿵, 쿵, 쿵―!

“귀족 여러분! 모두 정숙해 주십시오. 이제부터 존엄하신 국왕 전하의 말씀이 있으시겠습니다.”

“……!”

여기저기서 소곤대던 귀족과 그의 아내들, 그리고 수행원들 모두 입을 다문 채 상석의 국왕에게 시선을 집중한다.

이들을 잠시 둘러본 국왕이 낮으면서도 위엄에 찬 음성으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오늘 본국은 참으로 귀한 분을 손님으로 맞이하였다. 모든 마법사와 검사들의 정점인 위저드 로드이시며 그랜드 마스터이신 하인스 멀린 킴 드 셰울님을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진심으로 환영하여야 할 것이다.”

모두의 고개가 말없이 끄덕여진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다시피 마탑주께서는 테세린 영지의 로잘린 양과 미래를 함께하시기로 하셨다. 이에 짐은 우정의 뜻으로 테세린의 영주 데니스 로니안 드 테세린 자작에게 공작위를 제수하고자 한다. 이에 이의 있는 자 앞으로 나서라!”

마탑주가 빤히 바라보고 있는 이 상황에서 어찌 입을 벙끗하겠는가. 모든 귀족과 그의 부인들, 그리고 수행원들은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이는 로니안 자작 본인과 세실리아, 그리고 로잘린뿐이다.

잠시 말을 멈춘 국왕이 로니안 자작에게 시선을 준다.

“로니안 자작! 짐의 앞에 서게.”

“네, 전하!”

“자작 부인도 함께하시오.”

“네, 전하!”

세실리아 자작부인은 공손히 고개 숙이곤 남편을 따라 국왕의 면전으로 이동했다.

그러는 동안 국왕은 시종으로부터 예식용 검을 받아 들었다. 작위 수여식 때에만 사용되는 것으로 초대 국왕의 애병인지라 상징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테세린의 영주 데니스 로니안 드 테세린은 미판테 왕국의 근본인 짐과 왕실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겠는가?”

“네, 전하! 충성을 다하겠나이다.”

“데니스 로니안 드 테세린은 짐을 위한 검이 되겠는가?”

“물론이옵니다. 전하!”

“좋다! 나 미판테 왕국의 국왕 홀랜드 커드버리 폰 미판테는 데니스 로니안 드 테세린의 깊은 충성심을 받아들이며 본국의 공작위에 제수하는 바이다. 이는 선대 국왕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에 따라 대대손손 이어질 것이다.”

말을 마친 국왕이 예식용 검으로 로니안 자작, 아니, 로니안 공작의 두 어깨와 정수리에 가볍게 얹어졌다 떨어진다.

모든 행위가 끝날 때까지 로니안은 붉게 상기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믿어지지 않는 현실 때문이다.

곁에 있던 세실리아 공작부인 역시 얼굴이 붉어져 있다. 미판테 왕국의 고위귀족이 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다음 순간 국왕의 음성이 이어진다.

“짐은 승작을 축하하는 의미로 로니안 공작에게 루데란과 마인테, 그리고 데라실 영지를 내리노라.”

방금 언급된 세 영지는 얼마 전 창궐했던 전염병 덕에 영주 일가가 모두 죽은 곳이다.

하여 얼핏 생각할 땐 척박한 영지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는 위생관념이 없어서 벌어진 일일 뿐이다.

루데란 영지엔 철광산이 있고, 마인테 영지엔 구리광산이 있다. 마지막 데라실 영지는 뜨끈뜨끈한 온천수가 뿜어져 나오는 곳이다. 아울러 비옥한 토지 또한 넓은 곳이다.

테세린과 합쳐지면 명실상부한 공작령이 되며, 상당한 상승효과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하옵니다. 전하!”

로니안 공작이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추자 국왕의 입이 다시 열린다.

“로니안 공작에겐 따로 수도에 거처를 마련해 줄 것이니 부디 짐의 곁에 머물기를 바라노라.”

공작이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제 미판테 왕국의 대소사를 결정할 때 로니안 공작은 막강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다시 말해 권력의 핵심에 있다. 그 책무를 다하려면 당연히 수도에 머물러야 한다.

“네! 전하. 감사하옵니다.”

로니안 공작이 고개를 숙일 때 세실리아 부인의 입가엔 미소가 어려 있다.

남편은 이제부터 공작이다. 어떤 사교계에 발을 들여놓더라도 감히 왕따시킬 수 없는 존재가 된 셈이다.

테세린에 있을 때는 인근 귀족들과의 모임에 참석할 때마다 약간씩 짜증이 났다. 빼어난 미모를 시기한 다른 귀족가 여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견제가 있었던 때문이다.

로니안 자작이 귀족으로선 거의 유일무이하게 부인을 하나만 둔 것도 크게 작용되었다.

다른 귀족가에서 흔히 벌어지는 여인들 간의 암투와 모략을 겪지 않으니 스트레스 받을 일이 거의 없다. 하여 피부와 미모가 또래에 비해 좋았던 것도 질투의 대상이었다.

최근엔 현수가 준 각종 화장품의 은혜를 입어 더욱 고운 피부를 갖게 되었다. 하여 은근한 질시를 많이 받았다.

국왕은 세실리아 부인에게 시선을 주었다.

“짐은 공작부인의 태중에 있는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고자 하는데 받아들이시겠소?”

“…지극한 영광이옵니다. 전하!”

국왕이 태중의 아이에게 이름을 내린다 함은 왕위를 내놓는 그날까지 후견인이 되어주겠다는 뜻이다.

또한 로니안 자작이 죄를 지어 치죄를 당하더라도 세실리아 부인과 아이는 용서하겠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세실리아는 당연히 더욱 상기된 표정이 된다.

“사내라면 알렉산더, 여아라면 비앙카라 부르시오.”

알렉산더는 아르센 대륙에선 ‘강철처럼 강한 사내’라는 의미를 가졌고, 비앙카는 ‘더없이 고결하다’는 의미를 가진 이름이다. 하여 세실리아 부인은 감읍할 지경이다.

“저, 전하. 감사하옵니다.”

“그리고, 이것은 짐이 하사하는 예물이라오.”

국왕이 시종으로부터 건네받아 준 것은 커다란 요람이다.

왕자와 공주가 태어났을 때 병에 걸리지 말고 영특하게 자라라는 의미로 신관의 축복을 받은 것이라 아주 화려하다.

요람의 겉에는 왕가의 문장까지 장식되어 있다. 따라서 아이가 요람 안에 있다면 어느 누구도 해를 끼치지 못한다.

아이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이 곧 왕실에 대한 도전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어미로서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참으로 감사하옵니다. 전하!”

세실리아 부인은 크게 고개를 숙인다. 정말 마음에 드는 선물이었던 때문이다.

현수와 로잘린의 얼굴에도 미소가 어려 있다. 기분 좋은 일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잠시 흐뭇한 표정으로 시선을 주던 국왕이 다시 한 번 신하들을 둘러보곤 입을 연다.

“오늘 본국은 큰 경사를 맞이했다. 짐은 새로 창설된 로니안 공작가를 기념하기 위해 향후 7일간 축하연을 베풀 것인즉 모두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주기를 바란다.”

“네, 전하!”

모든 귀족이 허리를 접는다.

4장 다시 라수스 협곡으로

국왕은 왕비와 함께 퇴장했다. 로니안 공작 부부가 귀족들의 하례를 받을 환경을 조성해 주기 위함이다.

가장 먼저 왕자들이 다가와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왕족이지만 국가의 대소사는 물론이고, 차기 왕위 결정에도 관여할 위치가 되었기 때문이다.

공주들 역시 공손히 예를 갖춘다. 왕가의 여자들은 의례히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

공작들은 자신들의 혼처를 추천하거나 결정하는 데 관여한다. 그렇기에 평소와 달리 조신한 모습을 보였다.

공작들에게 밉보이면 아주 나이 많은 사람의 열 번째 부인쯤이 된다. 그러면 금방 과부가 되고 평생을 외롭게 살게 된다. 하여 좋은데 시집가게 해달라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왕족의 하례가 끝난 후에 갈리아 공작과 할만 공작이 다가와 경하의 말을 건넸다.

갈리아 공작은 재상으로서 내치에 힘쓰는 자리에 있었고, 할만 공작은 총사령관으로서 국방을 책임지고 있다.

둘은 로니안에게 외교를 맡아달라 하였다.

이실리프 마탑주가 파이렛 군도를 정벌하고 이실리프 왕국으로 선포할 것이라는 귀띔을 받은 바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식으로 선포되면 대륙의 이목은 집중될 것이다. 거의 모든 마법사가 한 번쯤 방문하려 할 것이고, 기사들 역시 수없이 발걸음을 옮기게 될 것이다.

이실리프 왕국은 이런 방문객들이 뿌리는 돈만으로도 충분히 유지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대륙의 어느 나라도 이실리프 왕국과 척지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실리프 왕국과의 관계를 가장 잘 조율할 수 있는 인물은 당연히 로니안 공작이다.

로잘린은 이실리프 왕국의 2왕비가 된다.

미판테 왕국이 위기 상황에 처하면 도우려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아주 오랫동안 평화를 구가할 수 있기에 외교의 책무를 떠맡긴 것이다.

어쨌거나 로니안 공작과 세실리아 부인은 미판테 왕국의 주요귀족 전원의 인사를 받았다.

대륙 최강인 이실리프 마탑의 마탑주이자 위저드 로드이고, 그랜드 마스터이기까지 한 현수를 사위로 두었으니 얼마든지 고개를 뻣뻣하게 들어도 된다.

하지만 공작과 공작부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천성이 그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사하는 모든 귀족에게 진심 어린 웃음을 보이며 앞으로 잘 지내기를 먼저 청했다.

참으로 기품 있어 보이는 모습이다.

현수는 둘을 보면서 괜찮은 장인, 장모를 만나게 되었다 생각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국왕의 선포대로 매일매일 연회가 베풀어졌다. 제한 없이 술과 고기, 그리고 각종 음식이 만들어졌다.

모두 최고급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는 동안 로니안 공작과 세실리아 부인, 그리고 로잘린 등은 국왕이 하사한 저택에 머물렀다. 권력의 실세가 된 사람에게 걸맞은 화려하면서도 웅장한 대형 저택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