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4
기사단장의 보고대로라면 전멸할 우려가 있다. 그렇기에 저도 모르게 반문한 것이다.
아무튼 국왕의 반문에 근위기사단장은 얼른 고개를 끄덕인다.
“네! 드로렌 영지의 경우는 영주는 물론이고 그 가족까지 모두 목숨을 잃었다 하옵니다.”
“허어……!”
영주가 몬스터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함은 기사와 병사들이 전멸했음을 의미한다. 목숨으로 충성을 맹세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하여 모두가 입을 딱 벌렸다.
이에 기사단장이 재차 말을 잇는다.
“전하! 갈바란 영지의 마법사가 긴급히 구원요청을 하였사옵니다. 드로렌 영지의 남은 영지민들은 모두 폐광에 은신해 있다 하옵니다. 갈바란 영지는 현재 내성에서 몬스터들에게 대항하고 있으나 몹시 위험한 지경이라 하옵니다.”
“이런……!”
“속히 중앙군을 투입하셔야 할 듯하옵니다.”
더 이상 보고할 사항이 없다는 듯 단장이 입을 다문다.
“할만 공작!”
“네! 전하.”
“지금 즉시 중앙군 3개 군단을 투입하여 몬스터들을 소탕하십시오.”
“명에 따르옵니다.”
미판테 왕국의 1개 군단은 200명의 기사와 20,000명의 병사로 구성되어 있다.
영지에서 강제징집한 농노병이 아닌 정예병이다. 따라서 기사 600명과 병사 60,000명을 파견하면 몬스터들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갈리아 공작!”
“네! 전하!”
“협곡 내부에 무슨 문제가 발생한 듯싶소. 라수스 협곡 인근 영지마나 통신을 보내 경계를 단단히 하라 이르시오.”
“네, 전하!”
갈리아 공작이 고개를 끄덕일 때 시종장이 다급한 걸음으로 들어선다.
“전하! 전하!”
“왜 그러나?”
“큰일 났사옵니다. 협곡 서쪽 영지들에 몬스터들이 대거 난입하여 쑥대밭이 되고 있다 하옵니다.”
“무어라?”
협곡 서쪽이라면 라수스 협곡을 지나서이다. 아무리 긴급한 상황이 발생되어도 중앙군을 투입할 수조차 없는 곳이다.
그러려면 수천 ㎞를 이동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워낙 험하고 먼 길인지라 가는 동안 적어도 절반은 목숨을 잃을 정도이다. 피로와 질병, 그리고 몬스터들의 습격으로 인한 결과이다.
“어, 어느 정도라 하는가?”
순식간에 나라 전체가 엉망이 될 것이라 생각했기에 국왕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있다.
“마법사들의 보고에 의하면 라수스 협곡 서쪽의 거의 모든 영지로 작게는 수백, 많게는 수만 마리의 몬스터가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합니다.”
국왕과 3명의 공작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허어! 대체 왜……?”
영지마다 몬스터에 대한 대비는 어느 정도 되어 있지만 협곡 건너편 영지들이 입을 피해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이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레드문 현상 때문에 몬스터 러시가 일어나도 늘 출몰하는 지역이 정해져 있다. 이처럼 국가 전체로 번진 경우는 없었다.
그렇기에 국왕의 입에서 나직한 침음이 터져 나온다.
“끄으응!”
갈리아 공작과 할만 공작은 즉각적인 대처방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협곡 서쪽으로 파견할 병사가 없기 때문이다.
하여 이맛살을 좁힌 채 해결방안을 모색했다. 그러던 중 할만 공작의 눈이 크게 떠진다. 뭔가 생각났다는 표정이다.
“로니안 공작!”
“네, 공작님!”
“호, 혹시 마탑주님의 도움을 얻을 수 있을는지요?”
“네? 하인스 마탑주의 도움이요?”
마탑주가 가공할 능력을 지는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몸뚱이는 하나뿐이다. 특정 영지 하나를 구해달라는 정도의 청이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헬 파이어 같은 대단위 마법 한 방이면 오크 20,000마리 정도는 거뜬하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트롤과 오거가 오크보다 상위포식자라고는 하지만 이들 역시 헬 파이어로 모조리 제거될 수 있다.
길이 20m짜리 검강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힘센 몬스터라 할지라도 바위마저 두부처럼 베어버리는 검강을 견뎌낼 수는 없다.
심지어 마법의 조종, 위대한 존재, 중간계의 조율자라 불리는 드래곤조차 그랜드 마스터와의 대결에서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
다시 말해 그랜드 마스터는 충분히 드래곤 슬레이어가 될 수 있다. 그러니 이 세상 어떤 몬스터라도 현수를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몸이 하나인지라 여러 영지를 동시에 구원할 수는 없다. 하여 로니안 공작은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할만 공작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입수한 첩보에 의하면 마탑주께서 라수스 협곡의 지배자인 라이세뮤리안님과 친분이 있다 하오.”
“아! 그건…….”
로잘린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기는 하다.
레드 드래곤 라이세뮤리안 옥타누스 카로길라아지바랄과 골드 드래곤 제니스케리안 인터누스 지노타루이마덴은 사위가 될 하인스와 아주 긴밀한 관계이다.
하여 현수가 보살펴야 하는 아드리안 공국의 수호룡으로 선포를 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공작! 하인스 마탑주께 청을 한번 해보시오.”
“……!”
국왕과 갈리아 공작 역시 로니안 공작에게 시선을 준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할만 공작의 말처럼 사위에게 부탁해 달라는 뜻이다.
“알겠습니다. 말을 해보지요.”
“그럼, 다녀오세요.”
국왕의 말에 로니안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곤 일어섰다.
다른 사람 같으면 불러서 이야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실리프 마탑주는 오라 가라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무엇을 이야기하든 세상에서 가장 정중히 청해야 할 사람이다. 그렇기에 공작이 직접 발걸음하게 한 것이다.
“아! 그래요? 알겠습니다. 가보지요.”
로니안 공작의 이야기를 들은 현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위! 갈 때 우리도 같이 갔으면 하네.”
“왜요?”
몬스터들을 처리하러 가는데 로니안 공작은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검법 또는 마법 어느 것도 대성한 바 없기 때문이다.
하여 현수는 무슨 의도냐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라수스 협곡을 지나갔으면 좋겠는데 불가능할까?”
테세린으로 가려면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너무도 멀고, 험난하다.
라수스 협곡을 지나고 못 지나고는 순전히 라이세뮤리안의 의지에 달려 있다. 그런데 현수가 그와 친분이 있다 하니 가는 길이라도 조금 쉬웠으면 하는 뜻이었던 것이다.
“아! 네에. 알겠습니다. 같이 가시지요.”
“고맙네. 그럼 준비하라 이르겠네.”
“네! 그러세요.”
5장 드래곤의 제자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로니안 공작은 얼른 물러간다. 한시라도 빨리 영지로 되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공작이 되어 권력 실세가 되었지만 매우 불편하다. 줄을 대려는 여러 귀족들 때문이다.
가만히 살펴보니 이해득실에 따라 오른쪽에 붙었다 왼쪽에 붙었다는 반복하는 박쥐같은 자들이 대부분이다.
로니안 공작은 이런 자들이 해대는 갑론을박을 듣고 있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하여 핑계를 대고 수도를 떠나려는 것이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지? 아무튼 할 일은 해야지.”
“국왕 전하! 조금 전 로니안 공작님으로부터 몬스터 러시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네! 우리 미판테 왕국이 위기에 처한 듯싶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마탑주님!”
국왕은 정중히 고개 숙인다. 로니안 공작이 자리를 뜬 이후 계속된 보고에 머리가 지끈거리던 중이다.
라수스 협곡을 중심으로 좌우의 거의 모든 영지로부터 몬스터 러시에 관한 긴급한 보고가 계속된 때문이다.
보고받은 영지의 수만 현재 21개나 된다. 서로 먼저 구원해 달라는 요청을 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
대부분의 영지가 중앙군이 파견되기 힘든 지역에 있기 때문이다.
그걸 알면서도 왕궁에 지원을 요청한 이유는 인근 영지의 도움을 받아도 견뎌내기 힘들 정도이기 때문이다.
지금껏 보고된 내용을 확인해 보면 라수스 협곡 안에 있던 몬스터 거의 전부가 쏟아져 나오는 모양이다.
머리 한 번 숙인다고 돈 나가는 것 아니다.
몬스터 러시를 잠재울 수 있다면 국왕이지만 체면 따윈 버릴 수 있다.
안 그러면 나라의 존립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제가 가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네! 마탑주님만 믿겠습니다.”
“출발 전에 전하께 드릴 말씀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십시오.”
“우선 파이렛 군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곳은…….”
현수는 이실리프 왕국의 건국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국왕은 당연히 선린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국가가 되겠다는 뜻을 표했다.
다음은 아드리안 공국의 왕국 선포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것 역시 흔쾌히 받아들여졌으며 두 나라와의 교역과 친분에 각별히 신경 쓰겠다는 대답을 들었다.
다음은 로잘린과의 결혼식 이야기이다.
원래는 테세린에서 할 예정이었으나 이실리프 왕국이 건국되므로 코리아도라 명명한 본섬에서 치러질 예정임을 알렸다. 그때 와서 축복해 달라고 하였다.
국왕의 고개는 몇 번이나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당연합니다. 우리 왕국의 수뇌부 전원을 이끌고 참석토록 하겠습니다.”
“참! 미판테 왕국 동단에 있는 아르가니 에이런 판 포인테스 후작의 손녀 케이트 에이런 판 포인테스 양도 저의 신부가 될 것입니다.”
“네에?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국왕의 눈이 또 커진다. 처음 듣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포인테스 후작이 7서클에 오른 것 같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왕국의 모든 영지를 돌아다니며 첩보를 수집하는 왕립정보원에서 올라온 보고이다.
이는 반역하는 무리 또는 흑마법사들을 색출해 내기 위해 조성된 기관이다.
하여 아르가니 후작을 왕궁으로 불러 확인과 함께 치하의 말을 하려 하였다.
미판테 왕국엔 7서클에 이른 마법사가 없어 마탑을 조성시킬 수 없었다. 아르가니 후작과 갈리아 공작 모두 6서클에 불과하였던 때문이다.
그런데 마탑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전력도 전력이지만 나라의 체면과도 관계가 있다. 따라서 아르가니 후작이 7서클인 것이 확인되면 마탑을 지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후작은 오지 않았다. 7서클에 오른 것 같기는 한데 완벽한 깨달음을 얻으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핑계였다.
에이런가는 미판테 왕국에서 가장 유서 깊은 가문이다.
가주인 후작은 현자로 불렸으나 정치엔 관심 없는 마법사였다.
그렇기에 국사에 대한 의견을 청해도 변변한 대답이 없었다. 그때마다 연구실에 짱 박혀 있느라 아무도 만나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여 후작이지만 제쳐놓고 있는 중이다.
다른 마법사들과의 교류 또한 없기에 고서클 마법사이면서도 휘하에 마법사들이 별로 없다.
그런데 느닷없이 후작의 손녀가 이실리프 마탑주의 부인이 된다고 한다.
왕국으로선 경사스런 일이긴 하나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인지라 국왕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케이트 양은 골드 드래곤 제니스케리안의 제자가 되었음도 알려드립니다.”
“네에……?”
국왕의 눈알이 튀어나오려 한다. 인간이 드래곤의 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구전되어 오는 옛날이야기 속에 드래곤의 제자였던 사람에 관한 것이 있다.
수천 년 역사 동안 딱 하나뿐이다. 라이셔 제국의 초대 황제 알렉산더 폰 라이셔가 그 인물이다.
세상 사람들은 드래곤으로부터 마법과 검법을 전수받은 위대한 인간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는 알렉산더 에머리어스 카르테로사라는 이름을 가진 드래곤이 폴리모프한 인물일 뿐이다.
따라서 케이트는 아르센 대륙 역사상 초유의 상황에 처한 여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