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5
“저, 정말이십니까? 케, 케이트 양이 정녕 위대한 존재의 제자라는 말씀이십니까?”
국왕은 얼마나 당황했는지 말까지 더듬는다.
“그러합니다. 케이트 양은 골드 드래곤 제니스케리안의 제자가 맞습니다.”
“허어! 세상에 맙소사…….”
국왕은 다리에서 힘이 빠졌는지 털썩 주저앉는다.
“참! 제니스케리안은 드래곤 로드인 옥시온케리안 인터누스 지노타루이마덴의 쌍둥이 동생입니다.”
“네, 네에?”
국왕은 얼마나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뜬다. 그 결과 눈알이 반쯤 튀어나와 붕어처럼 보인다.
이 순간 국왕의 뇌리는 텅 빈 상태가 되었다. 그야말로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아르가니 후작님은 7서클에 오른 게 맞습니다.”
“세상에……!”
국왕은 말을 잇지도 못한다. 입만 딱 벌렸을 뿐이다.
위저드 로드가 한 말이다. 다시 말해 아르가니 후작이 진짜 7서클이 되었는지 확인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상황이다.
“공작이 되기에 충분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곧바로 공작으로 승작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마탑도 지어주실 거죠?”
“그, 그럼요! 그 또한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국왕은 자신이 무슨 말을 어떻게 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연신 고개만 끄덕인다.
“그럼 이만 물러가지요.”
“네! 사, 살펴서 가십시오, 로드!”
국왕은 허리를 깊숙이 숙여 예를 표했다. 저도 모르게 취하는 행동이다.
드래곤 로드를 오빠로 둔 골드 드래곤의 제자 케이트가 현수의 아내가 된다. 라이세뮤리안뿐만 아니라 또 다른 드래곤과 친분이 생긴다는 뜻이다.
마탑주 본인도 건드릴 수 없는 존재이지만 여기에 두 드래곤의 힘까지 합쳐지면 자칫하다간 제국도 망할 수 있다.
무시무시한 무력이 되기 때문이다.
“휴우∼!”
현수가 대전 밖으로 나가자 국왕은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쉰다. 너무도 많이 놀라 조금 늙은 듯한 기분이 든다.
잠시 후, 갈리아 공작과 할만 공작이 대전에 들어선다.
로니안 공작은 라수스 협곡으로 출발하기 위해 준비하는 중이라는 걸 알기에 부르지 않았다.
“소신들을 부르셨사옵니까, 전하!”
“네! 너무도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는지라.”
“그렇습니까? 대체 무슨 이야길 들으셨기에… 소신들에게도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지요. 조금 전 하인스 마탑주께서…….”
국왕의 이야기를 듣던 갈리아 공작과 할만 공작은 의자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다. 다소 우스꽝스런 모습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너무도 놀라운 이야기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자 갈리아 공작이 이마에 솟은 땀을 닦아낸다. 식은땀을 흘린 것이다.
“저, 정말 다, 다행이옵니다.”
“휴우∼! 정말 그렇습니다. 그간 아르가니 후작에게 너무 소홀했다는 생각입니다.”
할만 공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국왕이 입을 연다.
“하여 아르가니 후작을 공작으로 승작시키고, 원하는 곳에 마탑을 지어주어야 할 듯합니다. 경들의 의견은 어떠시오?”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옵니다. 뜻대로 하시지요.”
할만 공작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 이때 갈리아 공작이 한마디 거든다.
“저어, 전하!”
“말씀하시오. 공작!”
“로니안 공작과 아르가니 공작가의 세금을 당분간 면제해 주심이 어떨까 합니다.”
“세금을 면제해 줘요?”
갈리아 공작은 나라의 재정을 책임지는 재상이다. 그런 사람의 입에서 세금을 받지 말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공작가에서 내는 세금의 액수가 제법 크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다.
“로니안 공작의 경우는 전염병으로 주인을 잃은 세 영지를 추스르면서 그들을 규합하는 데 비용이 필요할 것입니다.”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데란 영지와 마인테 영지, 그리고 데라실 영지의 현 상황은 ‘피폐’라는 두 글자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전염병이 돌 때 거의 모든 가옥을 불태웠다. 게다가 너무 많은 영지민이 죽어 올해 농사는 포기해야 할 지경이다.
과도한 일손 부족 때문이다. 따라서 갈리아 공작의 말대로 추스를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
포인테스 영지의 경우는 지난 가을 이후 먹을 게 없어 오크를 잡아먹던 시절을 겪었다.
영지 내 거의 모든 짐승을 잡아먹은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잡아먹을 짐승이 없다. 게다가 가축을 사육해서 잡아먹는다는 개념이 없는 곳이다.
그런데 흉년이 들어 곡물마저 말라 버려 심각한 기근을 겪었다. 후작가에서 비축해 놓았던 곡식을 풀었지만 영지민 전체를 먹이기엔 양이 적다.
따라서 세금 면제라는 혜택을 주면 좋아할 듯싶다.
“그리해도 나라 운영엔 무리가 없겠소?”
“포인테스 영지는 토지가 황폐하여 원래부터 세금이 적었습니다. 테세린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지만 면제해 준다 하여 당장 타격을 입을 정도는 아니옵니다.”
“좋소! 그럼 그렇게 합시다. 한데 기간은 어느 정도가 괜찮겠소?”
“소신의 생각으론 향후 10년이면 어떨까 합니다.”
갈리아 공작의 말에 국왕이 고개를 끄덕일 때 할만 공작이 입을 연다.
“전하! 10년은 조금 짧은 듯 여겨집니다.”
“그래요? 그럼 공작의 의견은 어떠하오?”
“전하! 이실리프 왕국과의 우호와 위대한 존재와의 관계를 고려한다면 20년은 되어야 하지 않나 생각하옵니다.”
“흐음! 20년이라……. 괜찮겠소?”
국왕의 시선을 받은 갈리아 공작의 고개가 크게 끄덕여진다. 그 정도는 감당해낼 수 있다는 뜻이다.
“마탑주께서 몬스터 러시를 해결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겨집니다. 그리하시지요.”
“좋소! 그럼 그렇게 하십시다.”
“네, 전하! 현명하신 판단이옵니다.”
두 공작의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런 그들의 뇌리로 이색적인 상념이 스친다.
지금껏 둘은 명실상부한 2인자였고, 최고 권력자였다.
그런데 3인자 혹은 4인자로 밀려난 듯한 느낌이다. 아르가니 후작과 로니안 공작이 상전인 것으로 느껴진 것이다.
그러다 두 사람의 성향을 떠올렸다. 아르가니 후작은 공작이 되고 마탑주가 되더라도 정치에 간여할 인물이 아니다.
로니안 공작 역시 중앙의 정치에 가타부타할 인물이 아니다. 그만한 연륜도 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관계 및 나라 전체를 보는 안목이 아직은 부족하기 때문이다.
“갈리아 공작! 아르가니 후작에게 상경할 것을 명하는 칙서를 보내도록 하시오. 아울러 로니안 공작에겐 향후 20년간 세금이 면제된다는 것을 알려주시오.”
“그리하겠습니다. 전하!”
“참! 아르가니 후작이 상경할 때 가급적 케이트 양도 같이 오도록 하시오. 치하의 말을 해야겠소.”
“전하! 그건 아니 됩니다.”
할만 공작이 말을 끊자 국왕은 의아하다는 표정이 된다.
“왜요? 무슨… 아! 알겠소이다. 그럼 그 말은 빼시오.”
케이트가 올 때 제니스케리안이 동행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니 등에서 식은땀이 솟는다.
어찌 대해야 할지 실로 난감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국왕 스스로 제니스케리안의 아래쪽에 자리를 잡는 사태가 벌어져야 할 수도 있다. 위대한 존재이기에 당연한 일이지만 국왕의 위신을 생각하면 가급적 피해야 할 일이다.
사실 하인스 마탑주를 대할 때에도 그리했어야 한다.
국왕 또한 마나의 길을 걷는 자이다. 다시 말해 마법을 익힌 마법사이다. 화후는 4서클이다.
따라서 세상 모든 마법사의 정점에 있는 위저드 로드를 대할 때 스스로 아랫자리를 찾아야 했다.
그럼에도 그리하지 않은 이유는 첫 대면 때 전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현수가 보낸 것이고, 그냥 자연스레 맞이해달라는 뜻이었다. 국왕이 어찌 그럴 수 있느냐는 표정을 짓자 현수는 빙그레 웃으며 그게 편하다 대꾸했던 것이다.
“알겠사옵니다. 전하!”
갈리아 공작의 고개가 크게 끄덕여질 때 현수는 로니안 공작을 만나고 있었다.
“장인어른! 먼저 출발할 터이니 뒤따라오시지요.”
“그래도 되겠는가?”
“네, 몬스터들부터 퇴치해야 하잖습니까.”
공작이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현수에게 있다. 그리고 몬스터가 퇴치되면 그 공의 일부가 자신에게 돌아온다. 장인이 있기에 마탑주가 돕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천히 가는 것보다는 빨리 가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 그렇기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먼저 가시게. 우리도 짐이 다 꾸려지는 대로 곧바로 출발하겠네.”
“그러십시오. 혹시 제게 긴급히 연락할 일이 있거든 롤랑 마법사가 가진 수정구로 통신을 하면 될 것입니다.”
“알겠네, 그리하지. 먼저 가시게.”
로니안 공작이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 * *
“흐음! 오랜만이군.”
눈앞의 오두막은 지난 9월 4일, 미혹의 숲을 통과했을 때 잠시 머물렀던 곳이다. 다프네가 살던 마을을 떠나 25일 만에 당도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다프네는 3개월간 언니들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때 간이침대를 꺼내주었다. 그리곤 12월 초까지 사용할 침구류도 내놨다. 두툼한 매트리스와 순면 패드, 그리고 오리털 이불과 베개 등이다.
창고엔 식재료를 넣어두었다. 비금도 천일염과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내복과 스웨터, 그리고 구즈다운 점퍼 등이다.
이중바닥 양말과 어그 부츠도 잔뜩 꺼내줬다.
거의 모든 생필품이 턱없이 부족한 다프네 마을 사람들을 위함이고, 이곳에서 석 달을 홀로 지내야 할 가여운 다프네를 생각해서였다.
삐이꺽―!
오두막의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예상대로 먼지만 쌓여 있다. 현수가 줬던 모든 것을 다 가져간 모양이다.
문을 닫고 나오려는데 헤어질 때 했던 말들이 생각난다.
“흐흑! 정말 고마워요. 흐흑!”
현수가 꺼내놓은 물건들을 보고 다프네는 굵은 눈물을 흘렸었다. 현수의 호의가 너무 고마웠던 때문이다.
“에구, 울지 말아요.”
겸연쩍은 웃음을 지으며 다프네를 달래려는데 품으로 무너져 내렸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과의 이별 장면인 듯싶다.
“흐흑! 이제 가시면 언제 또…….”
“내가 내기에 졌으니 한 번은 꼭 들를게요. 그러니 울지 말아요.”
현수와 다프네는 내기를 했다.
다프네는 활쏘기에 숙달되려면 최하 10년은 수련해야 한다고 했고, 현수는 한 달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하여 상대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내기는 이루어졌고 꼭 이기겠다 생각했던 현수는 졌다.
아공간에서 연습을 많이 했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온 건 심판이었던 라세안의 횡포 때문이다.
내기는 50보 떨어진 곳에서 던져지는 오크 머리통만 한 나무둥치를 화살로 맞추는 것이었다. 기회는 세 번이고, 한 번이라도 맞추면 현수가 승리하는 내기였다.
단, 화살이 박혀야 했다.
현수의 실력이라면 이보다 훨씬 작은 콩알이라도 백발백중시킬 수 있다. 보우마스터이니 당연한 일이다.
다프네가 신호하자 라세안은 첫 번째 시도에서 시속 150㎞짜리 슬러브를 던졌다.
야구로 치면 슬라이더와 커브의 중간 꺾임으로 횡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종적인 변화가 큰 변화구이다.
당연히 못 맞췄다. 직진만 생각했던 때문이다.
두 번째는 시속 150㎞짜리 커브였다.
워낙 낙차가 컸기에 목표를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세 번째는 시속 110㎞짜리 스플릿핑거 체인지업이었다.
포크볼의 변형 체인지업으로 횡적인 변화와 떨어지는 변화를 보이는 것이다. 갑자기 속도가 확 떨어지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쳐 실패하고 말았다.
라세안은 둘이 내기하는 것을 지켜본 장본인이다. 하여 이 내기에 소원 들어주기가 걸려 있음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