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886화 (885/1,307)

# 886

자신의 딸인 다프네가 무엇을 요구할지 알 수 없으나 무조건 이기게 해주고 싶었다.

라세안은 현수와 동행하는 동안 투수의 구질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하루 종일 걷던 어느 날, 저녁식사 후 현수는 글러브와 야구공을 꺼내 들었다.

몹시 신기해하는 라세안에게 그걸 주고 캐치볼을 가르쳤다. 몹시 재미있어 했고, 점점 익숙해지면서 거리가 벌어졌다.

그런데 현수가 던지는 공이 마구 휘어져서 들어온다.

낙차 큰 커브도 있었고, 슬러브, 너클볼, 팜볼, 스플릿핑거 체인지업, 투심, 슬라이더 등이다.

라세안은 무척이나 신기했기에 어떻게 이런지를 물었다. 이에 현수는 노트북까지 꺼내 상세한 설명을 해줬다.

회전수와 그립, 바람의 영향 등을 이야기하면서 시범까지 보여주었다.

라세안은 몹시 신기해했다. 하여 몇 개의 공을 주었더니 심심할 때마다 캐치볼을 하자고 졸랐었다.

그런데 그걸 현수에게 써먹은 것이다.

딸이라서 이기게 해주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라세안은 현수에게 깨졌고, 이길 확률이 거의 없다고 판단한다. 게다가 등산배낭 속에 신문지를 구겨 넣은 걸 핵배낭으로 알고 있기에 은근한 공포감까지 느낀다.

드래곤으로서 인간에게 쫄았다는 것 자체가 창피한 일이다. 하지만 이를 내색치 않고 의연한 성품이기에 인간이지만 친구 삼아준다는 식으로 이야기한 것이다.

아무튼 다프네가 이기면 소원 한 가지를 빌 수 있다. 그녀가 아내로 맞아달라고 하면 현수는 사위가 된다.

그럼 구겨진 체면이 조금은 세워지는 느낌일 것 같다.

그런데 너무 강한 사위인지라 내심 조금 버겁다.

살면서 현수와 트러블이 생기면 손위 어른인 장인이니까 져준다는 핑계를 댈 수 있다. 하여 그렇게 던진 것이다.

드래곤이 인간에게 알아서 깨갱해 주는 역사적인 일이었다.

어쨌거나 현수는 내기에 졌다. 다프네의 소원 한 가지를 들어줘야 하는 것이다. 하여 다프네에게 소원이 뭐냐 물었는데 나중에 생각을 정리해서 대답하겠다고 했었다.

그리고 헤어지는 순간까지도 다프네는 본인의 소원을 이야기 하지 않았다.

“흐흑! 네에. 꼭 오셔야 해요. 아셨죠?”

“그래요. 그럼 잘 있어요.”

“흐흑! 네에.”

다프네는 현수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고, 눈물을 흘렸다. 한 달이 채 안 되는 기간이지만 동행하는 동안 정들었던 때문이다.

헤어질 때 라세안은 본인의 소변이 담긴 플라스크를 남겨두고 왔다. 혹시 있을지 모를 몬스터와의 조우 때 마개를 열어 조금만 뿌리라 하였다.

이 냄새를 맡는 순간 모든 몬스터가 꼬리를 말고 도망갈 것이라 하였다.

어쨌거나 현수는 천 년 만에 라수스 협곡을 가로지른 첫 번째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한동안 라세안과 동행하였다.

그때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친다.

“후훗!”

청국장을 끓였을 때 똥국이라면서 코를 틀어쥐던 둘을 떠올리고는 나직한 웃음을 지었다.

[라세안! 라세안! 어디에 있나?]

현수는 마나의 의지를 실어 멀리멀리 보냈다. 그리곤 한참을 기다렸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근처에 있다면 즉각 좌표를 확인하고 텔레포트했을 것이다. 바세른 산맥에선 그랬다.

이실리프 자치령 인근에 있던 몬스터들을 몽땅 브론테 왕국 쪽으로 몰고 갈 때 그랬다.

‘흐음! 근처에 없나?’

고개를 갸웃거릴 때 아리아니가 귀를 잡아당긴다.

“주인님! 여기까지 왔는데 거기 잠시 들르면 안 돼요?”

미혹의 숲에 있는 켈레모라니의 레어에 가자는 뜻이다.

“그럴까?”

지난 12월 21일에 호수 주변 약 80만 평 정도 되는 공터에 주신의 숨결이라는 뜻을 가진 포인세를 식재한 바 있다.

카이로시아의 집무실 화분에 심어져 있던 이것은 마나가 풍부한 곳에서만 증식하는 식물이다.

포인세의 향기는 세상 만물의 부패를 억제하고, 악취를 제거하는 기능뿐만 아니라 향기를 들이켰을 때 폐부를 튼튼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매우 달콤하고 청량한 기분이 드는 냄새가 나는 것이다.

“많이 자랐을까?”

“호호! 가보면 놀라실 거예요. 그러니 어서 가요.”

“그래! 알았어.”

현수는 켈레모라니의 유체가 잠들어 있는 호수 인근의 좌표를 확인했다.

“텔레포트!”

샤르르르르릉―!

“흐아암! 역시 여기가 최고예요. 보세요, 여긴 공기부터가 다르잖아요. 안 그래요?”

앙증맞은 날개로 유영하듯 날던 아리아니가 허공에 멈춘 채 심호흡을 한다. 마치 CF의 한 장면 같은 모습이다.

“흐아아아암! 휴우우!”

잠시 아리아니에게 시선을 빼앗겼던 현수의 눈에 무성한 초록이 들어온다. 그 순간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우와! 어떻게 이렇게…….”

현수는 말도 맺지 못하고 주변을 휘휘 둘러본다.

호수가로부터 약 200m는 나무 없이 풀만 자라고 있었다. 그나마 무성하지도 않았다.

이곳에 잎사귀 무성한 나무가 있으면 호수로 낙엽을 떨구게 된다. 그것들이 레어 입구에 쌓이는 것이 싫어 자라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6장 포인세 솎아내기

포인세는 기는줄기 식물이지만 높이 1.5m까지 자라난다. 이리저리 엉킨 줄기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위로 솟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줄기엔 무성한 잎이 달려 있다.

달콤하면서도 청량하고, 그윽한 향기를 내뿜는 것은 꽃이 아니라 잎사귀이다.

어쨌거나 현수는 호수 주변 80만 평 가득 향기를 뿜어내는 포인세를 보고 입을 딱 벌렸다.

카이로시아의 집무실에서 가져온 것을 심고 현수는 가이아 여신의 축복을 내려주었다.

그때 현수의 손에서 뿜어진 신성력은 포인세 주변 토양으로 스며들었다. 겉보기엔 전혀 변화가 없다.

하지만 가이아 여신의 축복은 식물에게 있어 최상의 환경을 제공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축복을 받은 즉시 포인세의 뿌리는 엄청난 생장력을 보였다. 물론 땅 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덕분에 튼튼하고 길어진 뿌리는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가며 기름진 토양의 영양분을 쭉쭉 빨아댔다.

이때 숲의 요정인 아리아니의 축복이 더해졌다.

이는 가이아 여신의 축복과는 약간 다르다.

식물이 생장함에 있어 최상의 환경을 제공함은 같지만 방향이 다른 것이다.

이 땅에선 포인세 이외의 다른 식물의 씨앗은 발아되지 않는다. 또한 인근 수림의 뿌리들도 접근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제공된 토양의 양분과 햇볕을 오롯이 독점하는 효과가 부여되는 것이다.

게다가 켈레모라니의 사체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진한 마나는 포인세의 생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 녀석은 뿌리에서 빨아들인 각종 양분과 수분, 잎사귀에서 받아들인 햇볕보다도 마나를 먹고 자란다.

그 결과가 눈앞에 펼쳐져 있다.

넓이 80만 평인 이곳에 포인세가 1.5m 높이로 자라 있다.

너무도 빽빽하여 강하게 힘을 주지 않으면 통과할 수 없을 지경이다.

발돋움하여 가장자리를 바라보니 맹렬한 속도로 주변 숲 속을 파고드는 중이다.

그러고 보니 포인세 자생지는 80만 평이 아니다.

초지였던 곳 바깥까지 뻗어 나가고 있다. 눈대중으로 살펴보니 대략 200m 정도이다.

현수는 넓어진 면적을 계산해 보았다. 약 2.89㎢, 한국식으로 따지면 87만 5,700여 평이다.

합계 167만 5,700여 평 가득히 포인세가 자생해 있다.

“세상에……!”

현수는 저도 모르게 또 한 번 감탄사를 터뜨렸다.

한눈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넓은 면적이기 때문이다.

“주인님! 이 녀석들 잎사귀가 필요하다 하지 않으셨어요?”

“응? 그, 그래! 잎사귀가 필요하지.”

“보니까 다 자랐네요. 그냥 놔두면 오래된 잎사귀는 떨구니까 지금 솎아주면 좋을 것 같은데요?”

“솎아줘?”

“네, 그럼 새로운 잎사귀를 내놓거든요.”

어느새 현수의 어깨에 내려앉은 아리아니는 얼마만큼 잎사귀를 솎아줄 건지 계산하는 모양이다.

“정령들에게 부탁하면 될까?”

“네! 먼저 물의 최상급 정령 엘리디아를 불러 잎사귀에 묻은 먼지부터 닦아내라고 할게요.”

“그럼 다음엔?”

“다음은 바람의 최상급 정령더러 물기를 말리하고 하죠.”

아리아니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듯 척척 대답한다.

“그럼 잎사귀는 누가 따?”

“바람의 하급 정령 실프들을 왕창 불러서 잎사귀를 따라고 하면 되요.”

“부탁해도 되지?”

현수의 시선을 받은 아리아니는 뭘 이런 걸 부탁하느냐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다 생각났다는 듯 환한 웃음을 짓는다.

“대신 제겐 식혜와 당근주스를 주시고, 정령들에겐 여기서 실컷 놀다가게 하는 정도면 될 거예요.”

“그래? 아……! 여기 마나가 풍부해서?”

“네! 정령도 마나 좋아하거든요. 헤헷!”

아리아니가 너무도 깜찍한 표정으로 웃는다. 식혜와 당근주스의 달달한 맛이 떠오른 때문이다.

“좋아! 부탁할게.

“네! 보존마법이 걸린 컨테이너부터 꺼내세요.”

“잠시만!”

현수는 아공간에 담긴 컨테이너들을 꺼냈다. 보존마법과 공간확장마법진이 적용된 것이다.

“자아! 부탁해!”

“호호! 네에. 그럼 시작할게요. 엘리디아, 실라디아! 나 아리아니야. 어서 나타나!”

화아아악―!

말 떨어지기 무섭게 두 존재가 아리아니 앞에 나타난다.

실라디아는 지구의 그녀처럼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런데 엘리디아는 지구의 그것과는 약간 모습이 다르다.

굳이 표현하자면 해양 몬스터 씨 서펀트와 비슷한 모습이다. 도감에 그려진 그것과 다른 점은 반투명하다는 것이다.

“아리아니님의 부르심을 받고 왔어요. 저희가 해드려야 할 일이 있나 보죠?”

“응! 먼저 여기 계신 내 주인님에게 인사부터 드려.”

“…어머! 이분은 인간이신데 정령사인가요?”

“그러게요, 정령력이 엄청 세시네요. 과연 아리아니님의 주인님다워요.”

둘은 인간이 어찌 이토록 엄청난 정령 친화력을 가질 수 있는지 궁금한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엘프들도 이만하긴 힘들기 때문이다.

“내 주인님은 10서클 마스터에 이른 마법사이시면서 그랜드 마스터이셔. 보우 마스터이기도 하고.”

“…아! 엄청나게 강하신 분이군요.”

“그래, 그러니 인사드려.”

“네! 바람의 최상급 정령 실라디아예요. 혹시 저와 계약을 맺지 않으시겠어요? 원하시기만 하면…….”

실라디아는 청순, 요염, 풍만, 섹시한 모습을 현수에게 보이고야 말겠다는 듯 교구를 비비 튼다. 머리카락으로 주요 부위만 간신히 가린 초특급 미녀의 애교였다.

하지만 이에 넘어갈 현수가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아리아니가 아니다.

“그만! 이제 엘리디아가 인사드려.”

“네에. 저 물의 최상급 정령 엘리디아예요. 이렇게 만나니 너무 좋네요. 저도 원하시기만 하면 주인님과 계약을…….”

“야! 내 주인님이 왜 니들 주인님이야?”

“네? 그, 그건…….”

아리아니가 존재감을 뿜어내자 두 정령은 잘못했다는 듯 움츠린다.

“엘리디아! 너는 포인세 잎사귀에 묻은 먼지를 말끔히 닦아줘. 실라디아! 너는 다 닦인 잎사귀들의 물기를 말려주고.”

“네, 아리아니님의 말씀대로 할게요.”

엘리디아가 먼저 대답을 하고는 포인세 자생지를 빠른 속도로 훑는다. 그의 뒤를 이어 실라디아가 물기를 제거했다.

167만 평이 넘는 넓이이지만 작업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2∼3분 정도밖에 안 걸렸다.

“다 했어요. 아리아니님!”

“수고했어! 여기서 좀 쉬고 있어.”

“네에.”

아리아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엘리디아는 호수로 스며든다. 그러다 켈레모라니의 사체를 발견했는지 소스라치게 놀라며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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