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7
“아, 아, 아리아니님!”
“왜? 내 전 주인님의 옥체를 봤어?”
“저 아래 계신 분이 아리아니님의 전 주인님이셨어요?”
“그래! 지금은 이분이 내 주인님이셔.”
엘리디아는 다시 수면 아래로 들어갈 생각이 없는지 현수의 뒤쪽에서 꿈틀거린다. 드래곤은 대하기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실라디아 역시 현수의 뒤에 있다.
현수로부터 뿜어지는 정령력을 즐기는 중이다.
“자아, 다음은 실프! 어서들 오렴.”
샤라라라라랑―!
아리아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손바닥만 한 바람의 하급 정령들이 무수히 나타난다.
“부르셨나요? 모든 정령의 주관자 아리아니님!”
“그래! 너희는 날 제대로 아는군.”
아리아리는 실프들이 마음에 든다는 듯 날갯짓을 하며 환히 웃는다.
“이 부근에 있는 포인세의 잎사귀들을 솎아서 가져와. 여기 보이는 이것에 담으면 된다. 알았지?”
문이 활짝 열린 컨테이너를 본 실프들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생전 처음 보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서 시작!”
“네, 아리아니님!”
일제히 고개를 꾸벅인 실프들이 포인세 자생지로 흩어진다. 다음 순간 엄청난 초록의 향연이 벌어졌다.
167만 5,700여 평에 달하는 면적 전체에서 포인세 잎사귀들이 따진 후 컨테이너로 쏟아져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컨테이너들은 플라잉 브랜켓 마법으로 구현된 마법원반 위에 놓여 있다. 꺼내놓은 것의 총 수효는 40개이다.
그런데 공간확장마법이 걸려 실제 용적의 5배를 더 넣을 수 있는 이것이 가득 차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5분이다.
“모두들 스톱!”
아리아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방에서 날아들던 잎사귀들이 허공에 멈춘다. 각각의 아래엔 실프들이 있다.
“주인님! 얼른 컨테이너 교체하세요.”
“그래! 잠깐만.”
현수는 잎사귀로 가득 찬 컨테이너를 닫아 아공간에 넣은 뒤 새것들을 꺼냈다. 이번엔 80개이다.
이것들이 가득 차는데 걸린 시간은 7분 정도 된다. 하여 또 꺼내놓기를 반복했다.
최종적으로 컨테이너 200개를 가득 채웠다.
공간이 확장된 상태이니 실제론 1,200개의 컨테이너를 가득 채운 것과 같다.
“후와! 대단하군.”
현수는 실프들이 작업하는 동안 정령들이 어찌 움직이는지를 살필 수 있었다. 하급 정령이라 무거운 물건을 운반하지는 못하지만 속도만큼은 가히 섬전과 같았다.
“자아! 작업을 마쳤으니 상을 주지. 모두들 여기서 잠시 놀도록!”
“와아아아! 재잘 재잘 재잘 재잘……!”
실프들은 알아듣지도 못할 정령어로 웃고 떠들었다.
이곳은 숲의 요정 아리아니의 권역이다. 따라서 심술 맞은 상급 정령이 온다 하더라도 무어라 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소멸의 위험이 없으니 마음껏 떠드는 것이다.
현수는 작업이 끝난 포인세 숲을 바라보았다. 엄청나게 많은 잎사귀가 솎아졌지만 여전히 푸르다.
그리고 아주 좋은 향기가 진동을 한다. 주신의 숨결이라 불릴 만하였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들은 대기의 마나와 포인세의 향기를 흠뻑 즐겼다.
적당한 시간이 되자 아리아니는 모두를 정령계로 되돌려 보냈다. 모두가 만족한 시간이었기에 불만은 없는 듯하다.
“주인님! 이제 어디로 가실 거예요?”
“응? 일단 미혹의 숲은 지나야겠어.”
제니스케리안에게 아드리안 공국의 수호룡이 되어 달라는 말을 했을 때 그녀는 조건을 걸었다.
제자가 된 케이트를 아내로 맞이하라는 것이었다.
현수가 머뭇거리자 제니스케리안은 케이트를 받아들이면 자신의 영역을 침범했다던 옥시온케리안과의 중재에 나서겠다고 했다.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라이세뮤리안은 다프네를 아내로 맞이하라 하였다.
그도 아드리안 공국의 수호룡 선포와 더불어 옥시온케리안과의 중재를 돕는 조건이었다.
하여 다프네를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약속을 했으니 사내라면 지켜야 한다. 그리고 그녀의 소원 한 가지도 들어줘야 한다.
하여 다프네 마을로 가볼 생각이다.
“그럼 가요!”
“그러지.”
현수는 다프네 마을의 좌표를 확인했다.
“텔레포트!”
샤르르르릉―!
둘의 신형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잠시 시끄러웠던 호숫가는 다시 태고의 적막 속에 잠겼다.
잠시 해를 가렸던 구름이 흩어지자 따사로운 햇살이 포인세에게 향한다. 그와 동시에 포인세로 이루어진 정글 전체가 일렁인다. 다시 왕성한 생장을 시작한 것이다.
떠나기 직전 현수는 가이아 여신의 축복을 다시 한 번 내렸다. 잎사귀를 마구잡이로 따낸 것이 마음에 걸린 때문이다.
아리아니 역시 한 번 더 축복을 해줬다. 잘 자라서 다음에 왔을 때 주인님이 또 흡족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여기예요?”
“그래! 변한 건 별로 없네. 어라, 저건……!”
목책으로 둘러싸인 다프네 마을 인근에 나타난 현수는 안력을 돋웠다. 마을 안쪽에 널어놓은 이불이 보인다.
화사한 꽃무늬가 그려진 걸 보니 다프네가 머물던 오두막에 남겨둔 것이다.
“아직도 오리털 이불을 덮나? 아, 맞다. 아침저녁엔 아직 쌀쌀하지.”
현수는 고개를 끄덕이곤 어깨 위의 아리아니에게 시선을 주었다.
“나 저기에 볼일 있는데 같이 갈 거야?”
“아뇨! 안 갈래요.”
아리아니는 마을 전체에서 느껴지는 레드 드래곤의 향이 싫은 듯하다.
점잖은 골드 드래곤과 성질 급한 레드 드래곤은 늘 대립하는 관계였다. 성향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세속에 관심이 없던 켈레모라니 역시 레드 드래곤과의 교류는 내켜하지 않았다.
현재 이 마을에 거주하는 여인들은 모두 인간에 가깝다.
하지만 완전한 인간은 아니다. 라세안의 혈통을 이어받았으니 인간 성향이 강한 드래고니안인 것이다.
그렇기에 마을에 머물기를 거부한 것이다.
“그래! 그럼 이 근처에 있어. 필요하면 부를게.”
“네, 주인님! 그러세요. 그나저나 여긴 뭐가 있을까요?”
아리아니는 잘되었다는 듯 훨훨 날아 숲으로 들어갔다.
쿵, 쿵, 쿵―!
“…누구세요?”
“아! 안녕하세요? 일전에 여길 들렀던 하인스라 합니다.”
“네……? 하, 하인스님이라고요?”
“네! 라세안이란 친구와 함께 들렸었죠.”
“어머! 자, 잠깐만요.”
누군지 몰라도 상당히 당황한 듯한 음성이다.
삐이꺽―!
목책이 열리며 나타난 얼굴은 라이사이다. 이곳에 처음 올 때 계곡에서 다프네와 함께 목욕했던 여인이다.
그때 현수도 계곡에서 목욕을 했다. 그리곤 숲을 헤치고 오느라 더러워진 의복도 갈아입었다.
그리곤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신 김치에 꽁치 통조림과 감자, 양파, 부추, 깨 등을 넣고 팔팔 끓인 찌개와 희디흰 쌀밥을 만들었었다.
먹을 것 다 먹고 가던 길을 가려 했는데 누군가 목욕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게 다프네와 라이사였다.
다프네야 여신에 버금갈 미모와 사내라면 누구나 절로 감탄사를 터뜨릴 착한 몸매의 소유자이다.
하지만 라이사는 아니다.
자신이 목욕하고 있는 것을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며 펄펄 뛰던 이 여인의 얼굴은 제법 그럴듯하지만 허벅지는 야생마와 비슷하다.
허리둘레는 가슴둘레보다 훨씬 더 굵다.
라이사의 몸매를 굳이 사물에 비교하자면 종(鐘)과 비슷하다. 누가 보면 임신했다 할 정도이다.
그것도 만삭이다.
다시 형용하면 위로부터 점점 굵어지는 몸매이다. 그리고 다시는 오므라들지 않는다.
장딴지 하나의 굵기가 다프네의 허리 정도 되기 때문이다.
지구인이라면 누구나 코끼리나 하마를 상상할 것이다.
아무튼 라이사는 현수의 얼굴이 보이자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짓는다.
자신의 부친 라이세뮤리안의 친구이기 때문이다.
부친과 동급이기에 위대한 존재를 대하듯 해야 하는데 그게 서툴러 뭐라 대꾸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안녕하셨지요?”
“네? 아, 네에. 그, 그럼요! 어, 어서 들어오세요.”
활짝 열린 문 사이로 들어서자 마을의 모습이 보인다. 예전과 달라진 점은 깨끗해졌다는 것이다.
펌프를 설치해 준 곳을 중심으로 자잘한 돌을 박아 포장도로를 형성시켜 놨다. 한쪽엔 부추가 자라고 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현수는 이곳 여인들 모두 음기가 매우 강하다는 것을 간파했다.
이럴 경우 혈액순환 장애가 우려된다. 따라서 항상 몸을 따뜻하게 해주어야 한다.
한방에선 이럴 땐 계피차, 생강차, 대추차, 인삼차, 유자차를 마시면 좋다고 한다. 음식으론 양파, 마늘, 파, 부추, 고추 등이 좋다.
뿐만이 아니다. 음기가 강하면 수분이나 노폐물 배설에 문제가 생겨 몸이 잘 붓고 소화기를 비롯한 여러 장기가 제 기능을 수행하기 어렵다.
그래서 여자들의 안색을 살폈었다. 예상대로 소화기관 및 배설기관에 문제가 있어 보였다.
또한 거의 모두 생리통을 겪는 듯했다. 어찌할까 싶다가 아공간엔 담긴 것 중 뿌리까지 있는 부추를 떠올렸다.
부추는 게으른 사람이 짓기에 딱 알맞은 채소이다.
한 번 씨를 뿌리면 그 자리에서 10년 이상을 자라며 뿌리 째 뽑지만 않으면 일 년 내내 끊임없이 수확해서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부추는 비타민과 철분 등을 다량 함유한다. 하여 여인에겐 아주 좋은 식재료이다.
현수는 오두막 인근에 버려진 텃밭을 일구었고, 부추를 심어줬다. 그게 자라 있었던 것이다.
“이거 먹으라고 심어준 건데 안 먹었나 봅니다.”
“네? 이거요? 먹는 거였어요? 우린 잡초인 줄 알고…….”
라이사가 말끝을 흐린다. 자신들을 위해 심어줬는데 물 한 번 주지 않고 구경만 했다는 걸 알면 혼날까 싶어서이다.
“이거 음식 만들 때 먹으면 몸에 좋은 겁니다. 앞으론 자주 드세요, 뿌리까지 뽑지만 않으면 계속해서 자랄 겁니다.”
“아! 네에. 알겠습니다.”
라이사는 덩치에 맞지 않게 자그마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러는 사이에 이 마을 촌장이자 맏이인 루디의 거처에 다다랐다.
쾅, 쾅, 쾅―!
“언니! 언니! 어서 나와 봐요. 어서요.”
“야! 이 계집애야, 좀 살살 두들겨 문짝 다 망가지겠다.”
“아이, 지금 그게 문제예요? 어서요. 어서 나와 봐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웬 호들갑이야? 오거가 떼로 쳐들어왔어? 아님 트롤이 온 거야?”
“어서요, 어서 나오란 말이에요. 하인스님 오셨어요.”
“뭐어……? 하, 하인스님?”
우당탕탕―!
삐꺽―!
“헉……! 하, 하인스님!”
상당히 많은 나이이지만 여전히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루디 촌장의 눈이 화등잔만 해진다.
위대한 존재와 친구 먹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어, 어서 오십시오. 아, 안으로 드시지……. 아, 참! 자, 잠깐만요.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루디는 후다닥 자신의 거처로 되돌아갔다.
쾅! 우당탕! 와다다다! 우당탕탕!
보아하니 엉망인 실내를 정리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대체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몰라도 상당히 심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야 5분 넘게 각종 소음을 양산해 내진 못할 것이다.
끼익―!
“돼, 됐어요. 이제 들어오세요.”
무엇을 했는지 몰라도 방금 전과 확실히 다르다.
바삐 움직였음을 티내려는지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다. 게다가 머리카락엔 지푸라기 같은 것들이 붙어 있다.
“…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그래도 청소한 티가 나기는 한다. 가지런까지는 아니지만 엉망은 아니라는 뜻이다.
“여, 여기 앉으세요.”
루디아 손짓한 곳은 침상이다. 앉아보니 지푸라기 위에 거칠게 짜진 천을 덮어놓은 듯싶다.
슬쩍 바라보니 시렁 위에 오리털 이불이 개켜져 있다. 다프네에게 주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