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888화 (887/1,307)

# 888

시키는 대로 침상에 앉으니 좌불안석인 표정으로 묻는다.

“여, 여긴 어떻게……? 갑자기 예고도 없이 오셔서 대접해 드릴 게 없는데…….”

“그건 괜찮아요. 근데 라세안, 아니, 라이세뮤리안 그 친구가 어디에 있는지 혹시 아세요?”

“네? 라, 라이세뮤리안님이요? 아, 아버지는……. 참! 말 잘못 했습니다. 라, 라이세뮤리안님은…….”

루디 촌장은 몹시 당황한 듯 말을 더듬는다. 현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잘랐다.

“알아요! 라이세뮤리안이 레드 드래곤이고, 루디 촌장님의 부친이라는 걸…….”

“아, 아셨어요?”

“네! 그러니 편히 말해도 됩니다. 그 친구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좀 만나야 하는데.”

“저희야 잘 모르죠. 워낙 구름 같은 분이시라. 아마 협곡 어딘가에 계실 거예요. 이리저리 오가는 걸 좋아하셔서.”

루디의 말처럼 라세안은 늘 쏘다녔다. 성질 급한 레드 드래곤인지라 한곳에 진득하니 머무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한자리에 오래 있는 경우는 수면기뿐인데, 그마나 다른 드래곤에 비하면 기간이 훨씬 짧다.

골드 드래곤의 경우는 한 번 수면기에 접어들면 대개 500년을 잔다. 반면, 라세안은 길어야 300년인 것이다.

하여 드래곤들 사이에서도 말이 많다.

뭐든지 빨리빨리 해결되어야 직성이 풀리니 마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도 빠를 것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일찍 죽을 거라는 이야기이다.

“으으음!”

현수는 나직한 침음을 냈다. 보나마나 이번 몬스터 러시의 원인은 라세안일 것이다. 라수스 협곡을 중심으로 몬스터들이 바깥쪽으로 일제히 몰려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세안이 있으면 단숨에 문제가 해결될 수 있지만 지금처럼 자리에 없으면 문제이다.

현수가 일일이 쫓아다니면서 몬스터들을 퇴치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따로 연락할 방법은… 없는 거죠?”

“그렇죠! 저흰 그분께서 먼저 연락하시기 전엔 만나 뵐 수도 없으니까요.”

인간의 여인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면 잘 보살펴야 할 텐데 무정한 라세안은 바람만 피울 뿐 자녀에 대한 양육의무 따위는 생각지도 않는 모양이다.

“흐으음!”

현수는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지금으로선 뾰족한 수가 없기 때문이다.

“참! 다프네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기왕에 왔으니 데려가려는 뜻으로 물은 것이다.

“다프네요? 그때 두 분께서 데려가지 않으셨습니까?”

루디 촌장은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다.

“데려가다니요? 우리가요? 아! 그건 미혹의 숲을 지날 때까지였습니다.”

“어머! 그런 거였어요?”

루디가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네. 협곡 가장자리 오두막에서 언니들을 기다린다고 해서 거기에 남겨뒀는데, 못 만난 겁니까? 거기서 상인들과 교역을 한다고 해서…….”

“맞아요! 일 년에 한 번 거기서 교역을 하죠. 근데 저희가 오두막에 갔을 때 다프네는 거기에 없었어요. 소금이랑 이불, 그리고 의복 등만 잔뜩 쌓여 있었구요.”

“그건 다 가져오신 겁니까?”

“…설마 하인스님께서 주신 건가요?”

“네! 이 마을을 위한 제 선물이었습니다.”

루디는 이제야 그 물건들이 어디에서 났는지 알았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다프네가 없으니 어찌 된 것인지 알 수 없던 것이다.

교역을 위해 오두막으로 갔을 때 안에 있는 기물(奇物)들을 보고 여인들 모두 탄성을 냈다.

같은 무게의 황금과 거래되던 소금은 비교조차 되지 못할 비금도 천일염은 여인들 모두를 기쁘게 했다.

음식의 맛은 간이 좌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년은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양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음엔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겨울옷들이다.

처음 보는 디자인이지만 기존의 어떤 의복보다도 활동성과 보온성이 좋았다.

눈이 펄펄 내릴 때에도 구즈다운을 소재로 쓴 파카를 걸치면 추운 걸 거의 느끼지 못했다.

가장 좋았던 건 발 시리지 말라고 꺼내놓았던 어그 부츠였다. 발이 너무 편했고, 따뜻했던 때문이다.

이 밖에 오리털 이불도 있었고, 내복과 스웨터 등도 있었다. 모직 목도리와 모자 또한 있었다.

모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물건이지만 라세안이 주었을 것이라곤 생각지 않았다. 낳아만 주었을 뿐 자식들을 위해 베푸는 바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웬 물건인지는 다프네가 돌아와야 알 일이라 생각하고 기쁘게 나눠서 썼다.

7장 사라진 다프네

“아! 감사합니다.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지난겨울은 아주 좋았어요. 마을을 대표하여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루디 촌장은 자리에서 일어서 정중히 허리 숙여 예를 갖췄다.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마음이 엿보였기에 현수는 흐뭇한 미소만 지었을 뿐이다.

“잘 쓰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네! 정말 좋습니다. 그나저나 저희는 두 분께서 다프네를 데리고 가신 걸로 알고 있었는데 어찌 된 거죠?”

“이런……!”

현수의 이맛살이 급격하게 좁혀진다. 다프네가 실종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루디의 표정 또한 굳어 있다.

“어떻게 하죠? 벌써 몇 달이 지났는데… 설마 몬스터에게… 아! 아니에요.”

무슨 상상을 했는지 루디가 얼른 말을 끊는다. 현수는 여전히 이맛살을 좁힌 채 어찌 된 영문인지를 가늠해 봤다.

다프네는 연약한 여인이다.

활은 잘 쏘지만 소지하고 있는 화살의 수는 20여 개 정도이다. 그 이상의 적을 만나면 당해낼 수 없다.

루디의 상상처럼 집단으로 활동하는 오크나 늑대무리를 만났다면 변을 당했을 수도 있다.

라세안이 자신의 소변이 담긴 플라스크를 줬다는 건 알지만 그걸 다 쓴 후라면 방법이 없는 것이다.

“저기… 하인스님!”

“네!”

“다프네가 어찌 되었는지 확인해 봐야겠어요. 저희를 그곳에 데려다 주실 수 있는지요?”

“…그러죠. 가봅시다.”

다프네를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실종되었으니 당연히 찾아봐야 한다. 하여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루디는 현수의 대꾸도 기다리지 않고 나가 버린다. 그리고 불과 10분도 되지 않아 되돌아왔다.

“저흰 준비 다 되었어요.”

“네, 알았습니다.”

밖으로 나가보니 활로 무장한 여인 30여 명이 일제히 고개를 숙인다.

“위대하신 분을 뵈어요.”

위대한 존재의 친구이니 위대하신 분이라는 칭호로 부르는 모양이다.

“네!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여러분!”

현수는 정중히 허리 숙여 예를 갖췄다. 다프네와 결혼을 하게 되면 모두 처형이 될 사람들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루디 촌장만 해도 겉보기엔 농염한 30대 미시처럼 보이지만 실제 나이는 100살을 넘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현수는 마당 가운데로 나가 입을 열었다.

“모두 최대한 제 주변으로 모여 주십시오. 오두막이 있는 곳으로 텔레포트할 예정입니다.”

우르르르―!

말 떨어지기 무섭게 와르르 달려든다. 각기 활은 두 자루씩 들고 있고, 화살은 100여 발이나 소지했다.

30여 명이니 화살 수는 3,000여 발이다. 활쏘기에 특화되어 있어 백발백중시킬 능력자들이니 웬만한 오크 무리나 늑대 정도는 가뿐히 처리할 능력을 갖춘 것이다.

현수는 마법의 범위 밖에 사람이 있는지를 살피면서 좌표를 확인했다.

“매스 텔레포트!”

샤르르르르릉―!

현수와 33인의 여인이 사라진다. 잠시 후, 이들의 신형은 교역을 위해 준비해 둔 오두막 인근에 나타났다.

“도착했군요. 감사드려요.”

“네!”

“모두 들어! 이 근처에 다프네가 남긴 흔적이 있을 거야. 함부로 움직이면 사라질 수 있으니 가급적 조심스럽게 움직이면서 흔적을 찾아 봐.”

“네! 언니.”

루디 촌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여인들 모두 사라진다. 평상시 훈련이 잘되어 있는지 3명이 한 조를 이루고 있다.

일개 조당 화살 300발이 있으니 웬만한 무리를 만나더라도 화살이 부족한 일은 없을 것이다.

“나도 찾아보죠.”

“네, 부탁드려요.”

루디는 다프네가 현수의 아내가 될 것이란 걸 아직 모른다. 그렇기에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눈빛을 보였다.

루디마저 다른 여인들과 함께 숲 속으로 사라졌다.

“에구, 아리아니를 두고 왔네.”

다프네 마을 인근에 풀어놓고 온 걸 깜박한 것이다. 이때 머리 위에서 날갯짓하는 존재가 소리친다.

“아뇨! 저 여기 있어요.”

“어? 어떻게 알고 따라왔어?”

“따라오긴요. 계집애들이 많아서 주인님 근처에 있었으니까 알았죠.”

여인들의 체취 속에 섞인 레드 드래곤의 향이 마뜩치 않았다. 하여 인근 숲이나 둘러보려고 했다.

그러다 사냥 나갔던 에스더와 샬롯이 마을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는 즉시 현수의 어깨로 복귀했다.

둘 다 상당한 미인이라 경각심을 갖고 돌아온 것이다.

“잘 왔어, 노에디아 좀 불러줘.”

“노에디아요? 갑자기 땅의 최상급 정령은 왜요?”

“인근에서 일어났던 일을 알고 싶어서 그래.”

“그건 대지의 기억이라는 마법으로도 확인되는 거 아니에요? 노에디아는 좀 둔한데다 땅 위에서 일어나는 일은 별 관심이 없어서 별 효과가 없을 거예요.”

“그래?”

“네! 머리가 별로 안 좋아서 기껏해야 사나흘 지난 것밖에 몰라요. 기억하고 있는 범위는 조금 넓지만요.”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아니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대지의 기억은 그것보다 나은가?”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이 마법은 땅 위에서 일어난 일들을 마법사의 눈에 재생시켜 주는 것이다.

“네! 5서클 마법사 정도면 닷새 이내의 일을 알아낼 수 있어요. 주인님은 그보다 훨씬 화후가 높으시니 석 달 정도 지난 것도 가능할 거예요.”

대지의 기억이란 마법은 마법사가 지정한 범위에만 마법이 구현된다. 5서클 비기너는 사흘, 유저는 나흘, 그리고 마스터가 되면 엿새 동안 일어난 일들을 볼 수 있다.

서클수가 높을수록 읽어낼 수 있는 기간이 더 길어진다.

아리아니의 말처럼 10서클 마스터인 현수는 3개월 이내의 일들을 읽어낼 수 있다.

다만 그사이에 폭풍우가 불었거나 홍수가 휩쓸고 갔다면 대지의 기억으로도 읽어낼 수 없다.

어쨌거나 현수는 룬어 배열을 떠올리고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자주 사용하는 마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나여, 이 땅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내게 보여다오. 메모리 오브 그라운드(Memory of Ground)!”

현수의 손끝으로부터 황금빛 마나가 뿜어져 인근 땅을 뒤덮는다. 약 100여 평이나 되는 면적이다.

샤르르르릉―!

마나가 스며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땅 위의 공간이 심하게 흔들린다. 지난 한 달간의 변화가 한순간에 재생되기 시작한 때문이다.

몇 번의 눈이 내려 하얗게 쌓여 있던 것이 서서히 녹으며 현재에 가까워진 모습으로 변모한다.

지난 석 달간 이곳에서 일어난 현상들이 짧은 시간 동안 고속으로 재생된 것이다.

별다른 특이점이 없다. 하여 자리를 바꿔 다시 대지의 기억을 구현시켰다. 그렇게 삼십여 군데나 조사했지만 소득이 없다. 그때까지도 아리아니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이 근처가 아닌가?”

숲엔 사람이 다닐 만한 곳이 있고 그렇지 않은 곳이 있다.

예를 들어, 사람 키만큼 가시넝쿨이 자라 있거나, 물이 고여 있으면 접근하지 않는다.

절벽이 있거나 험한 바위가 있는 곳도 그러하다.

그런 곳을 제외하고 한 번에 100평씩 30여 번이면 3,000 평 이상 확인했다. 그럼에도 아무런 흔적이 없다.

심지어 짐승들이 지나친 일조차 없다. 다시 말해 지난 석 달간 이곳은 거의 무풍지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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