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9
몬스터들조차 다가오지 않은 것이다.
여기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다프네가 뿌린 라이세뮤리안의 소변이 이들이 출입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다.
효력은 일찌감치 떨어졌지만 몬스터와 짐승들은 이 부근에 대한 경외감 내지 두려움을 품은 바 있다.
그렇기에 다가오지 않았던 것이다.
“흐음! 이상하네, 이 정도면 뭐가 나와도 나와야 하는데. 여기가 아니고 다른 덴가?”
현수가 나직이 중얼거릴 때 아리아니가 쫑알거린다.
“주인님! 석 달 이전에 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잖아요.”
“…흐으음! 그런가?”
아리아니의 말대로라면 이곳에선 다프네의 행방을 알 도리가 없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다.
“혹시 말이야, 같이 왔던 여자들 몸에서 나는 특별한 향 같은 거 없어? 라이세뮤리안의 딸들이잖아.”
“있죠. 레드 드래곤의 향이 은은하게 흘러나와요.”
“아! 그래? 그럼 아리아니가 좀 찾아줄래?”
“지금은 못 찾아요. 이 근방에 30명이나 돌아다니기 때문이에요.”
“그렇군.”
루디나 라이사, 에스더와 샬롯, 그리고 다프네에게서 나는 냄새가 거의 비슷하다는 뜻이다.
하긴 모두 라세안의 딸이니 그럴 것이다.
할 일이 없어진 현수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100여 보 앞에 있던 누군가가 소리친다.
“여기다! 여기 흔적이 남아 있어요.”
얼른 다가가 보니 라이사가 뭔가를 들고 있다. 그건 상처 치료에 사용되었던 거즈와 반창고였다.
라세안과 더불어 미혹의 숲을 지나칠 때 현수는 카레라이스를 만들기 위해 압력밥솥을 사용한 적이 있다.
밥이 거의 다 되어 간다는 뜻으로 압력밥솥의 추가 찰락, 찰락 하며 돌 때 다프네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그것에 손을 댄 바 있다.
그때 손을 데었다. 하여 바세린 로션을 발라주고, 거즈와 반창고로 환부를 감싸주었다. 그리곤 붕대로 감아주기까지 했다.
힐이나 큐어 같은 마법으로 처리가 가능했음에도 어려서부터의 습관 때문에 이렇게 해준 것이다.
그때 라세안이 왜 마법을 쓰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때 이렇게 대답하였다.
“마법이 좋기는 하지. 하지만 너무 남발하면 안 되네. 인체가 가진 자연치유력이 가장 좋기 때문이야.”
“……!”
말을 마친 현수는 한 수 가르쳐 줬다는 표정을 지으며 일어서려다 멈췄다. 봐선 안 될 것이 눈에 뜨인 때문이다.
하나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다프네의 눈길이다.
자신에게 상냥하게 대해 준 것이 고맙다는 뜻으로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걸 피해 시선을 내리다가 엉성한 의복 때문에 보이는 두 개의 탐스러운 달덩이를 보게 되었다.
무협소설에선 이를 수밀도(水蜜桃)라 칭한다.
한 입 베어 물면 단물이 주룩 흐르는 아주 맛 좋은 복숭아라는 뜻이다. 물론 진짜 복숭아는 아니다.
잠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사람의 두뇌라는 게 평생 5% 미만만 쓰인다고 한다. 그럼에도 어떤 컴퓨터보다도 고성능일 수 있다.
그렇기에 한 번 본 걸 평생 잊지 못하는 것도 있다.
그때 본 두 개의 달덩이 같은 수밀도도 그중 하나이다. 하여 다프네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떠올리곤 한다.
순간적이지만 현수의 뇌리에 너무도 선명하게 각인된 때문이다.
“허험!”
머쓱해졌기에 나직한 헛기침을 낸 현수는 얼른 몸을 돌려 몇 발짝 앞서갔다.
그런 그를 라세안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1,000분의 몇 초도 안 될 짧은 순간 동안 현수의 시선 변화를 보았던 때문이다.
현수의 시선 속에 다프네의 가슴이 들어와 있던 바로 그 순간 동공이 확대되었다. 뿐만 아니라 심박수도 늘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라세안은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안다. 그렇기에 의미심장한 괴소를 베어 물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라이사의 손에 들린 건 그때 다프네에게 사용했던 거즈와 반창고이다. 아르센 대륙엔 없는 물건이니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현수는 재빨리 주변을 살펴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화살 박힌 나무가 있다. 그리고 다프네가 사용하던 활이 떨어져 있다.
몇 발짝 떨어진 관목 사이엔 화살통과 화살 여러 개가 흩어져 있다.
예리한 안목으로 헤아려 보니 화살수가 20개이다. 하나만 쏘고 나머진 사용조차 못했다는 뜻이다.
“대지의 기억!”
샤르르르르르―!
황금빛 마나가 땅 속으로 스며 들자 지난 석 달간 이곳에서 일어난 일들이 재생되었다.
눈이 내리고 쌓인 눈 위로 여러 번 더 눈이 내렸다. 그리곤 서서히 녹아 현재의 상황이 되었다.
그 안에 다프네의 모습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럼 석 달도 더 된 일이란 말인가?”
현수가 나직이 중얼거릴 때 숲 안쪽에 있던 여인 가운데 하나가 소리친다.
“여기요! 여기도 뭐가 있어요.”
서둘러 소리 난 곳으로 다가가보니 샬롯이 때에 절은 밧줄 토막을 들고 있다. 무언가 싶어 자세히 보려는데 루디 촌장이 화들짝 놀라며 소리친다.
“어머! 이건……?”
“그게 뭔지 알겠습니까?”
“네! 이건 노예사냥꾼들이 사용하는 결박이에요.”
자세히 살펴보니 밧줄은 밖에서 안으로 조일 수는 있지만 안에서 밖으로 밀어서 풀어낼 수 없는 매듭이 지어져 있다.
그리고 안쪽에 뾰족한 침들이 박혀 있다.
매듭은 노예의 목 뒤쪽으로 가게 묶이며, 이걸 앞쪽으로 돌리지 못하도록 밧줄에 가느다란 침을 박아놓은 것이다.
전쟁 중 생포된 포로 중 귀족과 기사는 몸값을 내면 풀어주는 것이 아르센 대륙의 풍습이다.
반면 몸값을 지불하지 못한 일반 병사 대부분은 노예가 된다. 이들의 도주를 미연에 방지하고 복종심을 부여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낙인과 종속마법이다.
남자 노예는 뺨에, 여자 노예는 팔뚝에 낙인을 찍는다. 누구든 쉽게 알아보게 하기 위함이다.
그럼에도 도주할 수 있다. 정신까지 제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법사가 종속마법을 걸기 전까진 언제든 도주할 수 있으므로 주인만 풀 수 있는 이런 밧줄과 매듭을 쓴다.
“그럼 다프네가 노예사냥꾼에게 잡혀갔다는…….”
현수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노예사냥꾼에게 잡힌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어떤 곤욕을 치르게 될지 뻔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누군가에게 팔려 성노(性奴)로 쓰이는 게 다행일 정도이다. 그러면 한 사내만 상대하면 되기 때문이다.
대부분 사창가에 팔려 수많은 사내를 상대하게 된다. 여인으로선 견디기 힘든 치욕스런 나날이 이어질 것이다.
“여기까지 노예사냥꾼들이 들어오는 건가요?”
“아뇨! 여긴 라수스 협곡에 속하는 곳이에요 위대한 존재께서 인간의 출입을 금하신 곳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 이게 있는 거죠?”
“그러게요. 여긴 못 들어오는 곳인데……. 어떻게 하죠?”
다프네 마을의 여인들은 드래고니안이긴 하지만 유전적 형질은 인간에 가깝다.
드래곤의 혈통을 이었지만 마나 감응도도 낮고, 검술에도 재능이 낮다. 다시 말해 평범한 사람과 별 차이 없다.
활은 잘 쏘지만 노회한 노예사냥꾼들을 상대할 능력은 없다. 그들을 상대하려다 거꾸로 잡히게 되면 자유를 잃을 뿐만 아니라 평생 지옥과 같은 삶을 이어가게 될 것이다.
하여 난감한 표정으로 현수를 바라본다. 이 시점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쪽으로 나가면 어느 영지요?”
현수가 가리킨 곳엔 나뭇가지가 부러진 흔적이 많다. 다프네가 잡혀가면서 심하게 반항한 결과인 듯싶다.
“잘 몰라요. 저희는 협곡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어서.”
“알았습니다. 어차피 이쪽으로도 가봐야 하니 여기서 헤어지죠. 여러분들은 미혹의 숲을 지나 마을까지의 길을 되짚어보세요. 참! 잠깐만요.”
아공간 속에 담겨 있던 음식을 꺼냈다.
이동하면서 먹기 쉽도록 빵과 햄 종류이다. 유효기간이 얼마 남지 않아 보존마법을 걸어주었다.
두어 달은 상하지 않을 것이다. 비닐포장은 환경을 오염시킬 수 있으므로 잘 보관해 달라고 당부했다.
목이 마를 수도 있어 생수도 주었다. 페트병은 나중에 돌려주든지 물이나 기타 액체를 담는 용기로 쓰라고 했다.
여인들은 신기해하면서도 좋아한다. 이들에게 있어 물을 들고 다닌다는 건 상상도 못해 본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여인들 모두 미혹의 숲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본 현수는 노예사냥꾼들이 남긴 흔적을 따라 조용히 이동했다.
그러다 천진난만한 다프네가 못된 짓을 당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분노가 솟는다.
그러자 저도 모르게 살기가 뿜어졌다.
가장 먼저 어깨 위에 있던 아리아니가 멀찌감치 떨어졌다.
드래곤 피어에 버금갈 위력인지라 감당해 내기 힘들었던 때문이다.
벌레들도 움직임을 멈췄고, 인근에 있던 몬스터들은 대경실색하며 사방으로 튀었다. 그들에게 있어 현수는 무자비한 드래곤과 동급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최초로 야영한 흔적이 나타나자 대지의 마법을 구현시켰다. 하지만 석 달이 넘은 듯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주변을 살펴보니 다프네가 자루 속에서 발버둥친 듯한 흔적이 있다.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를 가늠하곤 다시 추적했다.
그러다 평지를 만나게 되었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화전민 마을이다. 노예사냥꾼에 대해 물어보니 스트마르크 영지로 갔음이 확인되었다.
미판테 왕국 중동부에 위치한 이 영지는 아드리안 공국과 접경해 있고, 변경백인 베르세 후안 반 스트마르크 백작이 영주로 있다.
참고로, 이실리프 군도에서 만난 로드젠 아우딘 준남작의 고향은 홀렌 영지이다. 그리고 이 영지를 먹어치운 네로판 영지의 하우드 남작과 스트마르크 백작은 사돈지간이다.
하우드 남작의 딸이 백작의 며느리가 된 것이다.
홀렌 영지와 네로판 영지 간의 영지전에서 전력이 열세였던 하우드 남작이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스트마르크 백작이 지원한 기사와 병사들 덕분이다.
어쨌거나 현수와 스트마르크 백작은 일면식이 있다.
미판테 왕국을 지나 아드리안 공국으로 들어갈 때 출국을 허가했던 인물이고, 귀족이 혼자 다니면 여러모로 불편하니 노예를 사라고 충고했던 인물이다.
오십 대이고, 욕심 사나운 메기처럼 생겼다.
산길을 완전히 벗어나 들판으로 접어드니 파종하는 농노들이 보인다. 주변엔 이들을 감시하는 병사들도 있다.
현수의 현재 복장은 귀족 예복차림이다. 귀찮은 걸 피하려면 할 수 없기에 갈아입은 것이다.
“잠시만 멈춰 주십시오.”
농로를 지나 영주성 인근에 당도하니 수문위병이 정지를 요청한다.
“어디에서 오신 뉘신지요?”
“험험, 스트마르크 백작을 만나러 왔다. 들어가서 코리아 제국의 하인스 백작이 왔다고 전갈하라.”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백작님!”
나이는 어려 보이지만 걸친 의복을 보니 귀족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여기저기 박혀 있는 보석만 떼어다 팔아도 큰돈이 될 예복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수문위병은 얼른 허리를 숙인다.
“알겠습니다. 안에 전갈을 넣을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백작님!”
“그러지.”
초소 안으로 들어간 병사가 노란색 줄을 잡아당기자 멀리서 작은 종소리가 울린다.
뎅, 데뎅! 뎅, 데뎅! 뎅, 데뎅!
종소리가 울리고 약 10분 정도 지났을 때 성 안으로부터 일단의 무리가 달려온다.
척척척척! 척척척척!
보아하니 두 명의 기사와 이십여 명의 병사가 열을 맞춰 달려오고 있다.
“병사! 이분이 귀빈이신가?”
다가온 기사가 수문위병에게 묻자 고개를 끄덕인다.
“네! 코리아 제국의 하인스 백작님이시랍니다. 영주님을 만나러 오셨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