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891화 (890/1,307)

# 891

“그러지.”

“실비아! 백작님께서 편히 쉬실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드려. 그리고 목이 마르실 테니 차를 올리도록 해라.”

“네, 시종장님!”

뒤에 서 있던 시녀가 무릎을 굽히며 고개를 숙인다.

“저 아이를 따라가 잠시 쉬시지요.”

“그리하지.”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종장이 안으로 들어간다.

“하인스라 했나?”

“네! 백작님.”

가라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기에 서 있던 하인스가 얼른 허리를 숙여 다시 한 번 예를 갖춘다.

“인상이 좋군. 친절한 안내 고마웠네.”

“네? 아, 아닙니다.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백작님!”

“이곳 지리를 잘 아는가?”

“물론입니다. 예서 태어나 예서 자랐습니다.”

“홀렌 영지 쪽은 어떤가?”

“한동안 소영주님을 모시고 홀렌 영지에 머문 적이 있습니다. 그곳 사람만큼은 아니지만 웬만한 건 다 압니다.”

“알겠네. 이만 가서 쉬게.”

“네! 백작님! 모시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그럼!”

하인스는 정중한 군례를 올리곤 제식시범을 보이려는 듯 저벅저벅 걸러서 멀어져 간다.

안으로 들어가려 힐끔 바라보니 실비아라 불렸던 시녀가 멍한 표정으로 하인스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어떤 상황인지 능히 짐작되는 모습이다.

“실비아라 했나?”

“네? 아, 네에.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백작님!”

실비아는 얼른 허리를 숙이며 용서해 달라는 표정을 짓는다. 하늘같은 귀족으로 하여금 멍하니 기다리게 했으니 최소가 채찍질이라 생각한 때문이다.

“조금 걸었더니 피곤하다. 내게 편한 의자와 따뜻한 음료를 내어다오.”

“네, 이쪽으로……!”

실비아가 안내한 곳은 이런 상황을 대비한 대기실인 듯 싶다. 널찍한 방에는 그림이 스트마르크 백작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소파와 탁자 등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러지.”

털썩―!

“으읏!”

지구에서의 습관대로 털썩 주저앉았는데 상당히 딱딱하다.

스펀지가 없어 밀짚을 넣어 만든 것으로 오래 사용해서 잘 다져져 마치 돌 의자에 앉은 기분이다.

“으읏! 조금 아프네.”

실비아가 언제 들어올지 몰라 엉덩이를 비빌 수도 없어 앉은 채 참아야 했다.

실비아가 가져온 것은 한국으로 치면 둥글레차 비슷한 종류인 듯하다. 약간 달착지근하면서 구수한 내음을 풍긴다.

나무를 깎아 만든 쟁반을 든 실비아는 입구에 서서 차를 다 마실 때까지 기다릴 모양이다.

“실비아!”

현수가 부르자 쪼르르 다가와 고개를 조아린다. 얼굴은 예쁜 편인데 주근깨가 많다.

“네, 백작님.”

“하인스 기사가 마음에 드나?”

“네……? 아, 아니에요. 저 같은 게 어찌……! 하인스 기사님은 장래가 촉망되는 분이세요. 제가 감히 넘볼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에요.”

실비아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펄쩍 뛴다.

하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제법 반반하게 생겼다. 게다가 영리한 듯싶다.

하여 무어라 말을 하려 할 때 대기실의 문이 열린다.

삐이꺽―!

문이 열리고 드러난 인물은 도널드 휴가드 남작이다.

영화 배트맨 비긴즈에 알프레드 역을 맡은 마이클 케인과 비슷한 얼굴이다.

“백작님!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러지.”

도널드의 안내를 받아 조용한 복도를 따라 이동했다.

복도 양쪽엔 선대 백작들의 초상화가 가지런히 걸려 있고, 그들이 쓰던 아머와 병장기들 또한 전시되어 있다.

마치 박물관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다.

“스트마르크 백작도 검을 쓰는가?”

“네! 이 가문의 전통이지요. 초대 가주님께서 창안하신 퍼펙트 스톰 검법의 맥을 잇고 있습니다.”

도널드는 오랜 시종 생활이 몸에 익은 듯 가만가만 말을 하면서도 살필 것은 다 살핀다. 현수의 허리춤에 걸려 있는 보석 박힌 바스타드 소드를 유심히 바라본 것이다.

그러고 보니 도널드 역시 검을 익힌 듯하다.

손바닥의 제법 두툼한 굳은살은 요즘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확인해 보니 소드 익스퍼트 상급 수준이다.

“백작의 화후는 어떤가? 자네와 비슷한가?”

“……!”

스트마르크 백작은 50대 중반이고 현수는 25세 정도이다.

도날드는 가주를 칭할 때 ‘님’ 자를 붙이지 않는 현수가 내심 마땅치 않다. 하지만 드러내 놓고 불편한 심기를 표할 수는 없다. 상대는 제국의 백작이고, 자신은 왕국의 남작, 그것도 단승인 귀족일 뿐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고위 귀족이 물었다. 당연히 대답해야 한다.

“그걸 왜 물어보시는지요? 그리고 저는 검을 익히지…….”

척 봐도 60살은 훨씬 넘어 보인다.

다시 말해 도널드는 노인이다. 그런 사람이 무슨 검을 익히겠느냐는 말을 하려던 찰라 현수가 먼저 입을 연다.

“자넨 소드 익스퍼트 상급이지? 백작은 어떤가? 전에 봤을 땐 상급이었는데 진척이 있었나?”

앞장서서 안내하던 도널드가 휙 돌아본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없었다.

“……!”

“뭘 그렇게 보나? 둘이 서로 대련하며 검법을 익히는 것 같으니 가장 잘 알 것 같아 물은 건데.”

“…백작님께서는 얼마 전에 최상급이 되셨습니다.”

“호오! 그런가? 그거 경하할 일이군.”

현수는 부러 과장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도널드는 잠시 현수를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거린다.

현수의 손엔 굳은살이 배여 있지 않다. 검법수련을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마법사 특유의 음침한 기질도 엿보이지 않는다.

검법도 마법도 익히지 않은 귀족이 아무런 수행원도 없이 남의 나라를 돌아다니고 있다.

용병이라도 고용하여 호위를 맡겼다면 그럴 수 있다.

돈만 있으면 용병단 전체라도 고용할 수 있다.

미판테 왕국에서 가장 유명한 붉은늑대 용병단은 총원이 500여 명이나 된다. 대다수가 전투경험이 많은 백전노장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웬만한 영지의 기사단 정도는 찜 쪄 먹을 실력을 갖춘 용병단이다.

어쨌거나 현수는 혼자 왔다. 이 영지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많은 용병과 함께 왔다면 벌써 보고가 들어왔어야 한다.

그만한 통신망은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 이상하지 않겠는가!

하여 다시 한 번 슬쩍 바라본다. 여전히 아무것도 읽히지 않는다. 도널드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을 본 현수는 피식 실소를 지었다. 어떤 상황인지 짐작된 때문이다.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도널드는 높이가 10m에 이르는 커다란 문을 열고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문이 활짝 열린다.

“들어오시지요. 백작님!”

“그러지.”

뚜벅, 뚜벅, 뚜벅!

사위가 고요한지라 징 박힌 신발을 신었음이 표 난다.

“하하하!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에 만나는군요.”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 밀린 서류들을 처리하던 스트마르크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환한 미소를 짓는다.

진짜 반가워서가 아니라 의례적인 것이다.

“네에, 또 뵙는군요.”

“아드리안 공국에서 배를 타고 고향으로 가신다더니 아직 못 가신 모양입니다.”

잠시 스치며 한 말이었는데도 기억하는 걸 보면 스트마르크 백작은 생각보다 영민한 사람인 듯싶다.

“네에, 사정이 있어서요.”

“아! 그랬군요. 자자, 자리에 앉으시죠.”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어려 보임에도 스트마르크 백작은 낮춰 본다는 등의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그럽시다.”

이번에 앉은 소파는 만든 지 얼마 안 되는 듯 약간은 푹신한 기분이 든다.

“도널드! 알론주 있지? 가져오게.”

“네! 영주님.”

도널드가 물러가자 스트마르크 백작의 시선이 현수에게 향한다.

“여전하시군요.”

“그래야죠.”

“그나저나 우리 영지엔 웬일이십니까? 또 국경을 넘어야 하는 것이라면 이젠 그냥 편히 가셔도 됩니다. 아드리안 공국과의 마찰은 이제 없으니까요.”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그래요? 그럼 무슨 일로……?”

타국의 귀족이 아무런 연관도 없는데 나타나 대화를 청했다. 군사적 도움을 청하거나 무역을 하자는 것이 아니면 대화할 거리가 없다. 그렇기에 의아한 표정으로 현수를 바라본다.

“이 영지에 노예사냥꾼들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아! 노예를 사러 오신 겁니까? 하하! 전에 내가 말했던 것을 잊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말을 마친 백작은 현수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곁에 있던 종을 친다.

땡, 땡―!

삐이꺽―!

“찾으셨습니까? 영주님!”

문을 열고 들어선 이는 시종 도널드이다.

“카르덴이라 했던가?”

“카르덴이요……? 아, 노예상 카문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노예상 카문젠! 내가 보잔다고 하고 당장 들어오라고 하게.”

“네! 알겠습니다.”

도널드는 노예상인을 왜 찾느냐는 물음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간다. 무릇 시종이란 주군의 명이 떨어지면 지체없이 이행하는 것이 미덕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현수는 스트마르크 백작의 말을 제지하지 않았다. 노예상인은 노예사냥꾼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 얼마나 사시려 하는 겁니까? 카문젠에게 제법 반반한 것들이 있을 겁니다. 하하하!”

백작의 메기 같은 얼굴엔 느물느물한 미소가 배어 있다.

아직 젊은 현수가 객고를 풀기 위해 예쁜 여자 노예를 사려는 것으로 오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보다 10년쯤 전, 아직은 혈기가 왕성할 때 백작은 카문젠으로부터 여러 번 노예를 구입했다.

본처와 여러 부인뿐만 아니라 첩까지 있었지만 모두가 늙었다. 하여 젊고 싱싱한 여인을 품으려했던 것이다.

그때 구입한 성노들은 모두 예쁘고 몸매가 좋았다.

카문젠이 사업의 번창을 위해 백작에게 잘 보이고자 특별히 엄선한 결과이다.

그러다 한동안 거래가 뜸해졌다. 백작의 체력이 예전만 못한 때문이며, 마지막으로 구입한 성노가 제 역할을 잘하기 때문이다.

현수는 스트마르크 백작을 살펴보았다. 전형적인 귀족이며, 느물거리기는 하지만 악질은 아닌 듯싶다.

“백작께서 뭔가 오해하시는 듯한데 내가 찾는 건 노예사냥꾼입니다.”

“…아! 그런가요? 어디 점찍어놓은 여인이라도 있는 겁니까? 하하! 역시 젊음이 좋습니다. 하하하!”

또 다른 오해를 한다. 바로 잡을까 하는데 문이 열린다.

그리곤 아까 주문했던 알론주와 말린 과일, 그리고 따끈한 스테이크가 들여졌다. 서빙은 실비아가 했다.

“흐음! 되었다. 이만 나가거라.”

“네! 영주님.”

실비아는 조심스런 몸짓으로 물러난다.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혼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아! 드시지요.”

쪼로로록―!

현수의 잔에 먼저 술을 채운다. 그리곤 자신의 잔도 채운 뒤 건배하자는 듯 잔을 들고 기다린다.

챙―!

쭈우우욱―!

“캬아∼!”

백작은 단숨에 잔을 비우곤 말린 과일 하나를 입에 집어넣곤 우물거린다. 점심 먹은 지 꽤 되어 출출했던 모양이다.

다시 잔을 채우곤 거푸 마신다.

이 동네 주법은 아무래도 ‘지부지처’인 듯싶다. 참고로, 지부지처란 ‘지가 붓고, 지가 처먹는다’는 말의 준말이다.

자꾸 마시자 하여 현수도 석 잔을 비웠다. 스트마르크 백작은 그사이에 열두어 잔 정도를 마셨다. 알론주는 제법 도수가 높은 술이다. 지구 기준으로 치면 30도 정도 된다.

소주잔보다 큰 잔이었으니 소주로 치면 대략 3병 정도를 마셨는데 백작은 취해 보이지는 않는다.

50대 중반이지만 아직은 체력이 괜찮은 듯싶다. 하긴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이라면 이 정도는 거뜬해야 한다.

“캬아∼! 좋다.”

탁―!

말끔하게 잔을 비운 스트마르크 백작은 술을 즐기는 듯 아주 기분 좋은 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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