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894화 (893/1,307)

# 894

크게 고개를 끄덕인 백작이 도널드에게 시선을 준다.

“들었지? 가서 기사들 모두 내보내 카문젠과 거래한 노예사냥꾼을 데려오게.”

“네! 영주님.”

도널드는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벌떡 일어나더니 후다닥 뛰어간다. 그러다 문고리를 잡고는 뒤를 돌아본다.

“죄, 죄송합니다. 마스터!”

“……!”

현수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도널드는 사라졌다.

쿵―!

나가면서 문을 밀었는지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힌다.

시선을 돌려보니 실비아가 쟁반을 든 채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다.

하늘같은 시종장 도널드와 그보다 더 높아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던 영주님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는 장면을 보았는데 어찌 멀쩡할 수 있겠는가!

쟁반 위에 들린 음식은 실비아가 너무 심하게 떨자 조금씩 귀퉁이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이를 느끼지 못하는 듯 멍한 시선으로 현수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스르륵! 챙그랑―!

“에구머니나!”

쟁반이 조금 더 기울어지자 접시는 기다렸다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화들짝 놀라 이를 잡아채려 했지만 접시가 더 빨랐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음식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술안주로 가져온 것인지라 국물이 있는 것과 없는 것 두 가지였는데 그만 엉망이 되어버린 것이다.

놀란 실비아는 맨손으로 음식들을 접시 위에 도로 담았지만 이미 먹을 수 없는 상태이다. 한국처럼 방바닥이 장판이나 강화마루, 또는 데코타일 같은 것이고 말끔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위생상 먹기엔 저어된다.

그런데 영주 집무실 바닥은 돌이다. 그것도 매끄럽게 다듬어지지 않아 거친 표면을 가진 석재이다.

매일매일 빗자루질은 하지만 물청소나 걸레질 같은 건 하지 못한다. 대걸레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거친 표면은 지난 수백 년간 이곳을 드나든 수많은 사람의 신발에서 연유된 각종 이물질로 채워져 있다.

전장에 나갔다 돌아온 영주와 기사들의 신발에서 묻은 진흙가루도 있지만 몬스터의 혈액도 있다.

아무튼 음식은 먹을 수 없는 지경이다.

실비아는 곧 엄청난 호통 소리에 이은 강렬한 처벌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기에 울상이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고, 소리 내어 탄식을 터뜨리지도 않았다. 본인은 그럴 자격도 없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조심스레 곁눈질을 하던 실비아는 현수와 시선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숙이곤 나머지 찌꺼기들을 주워 담았다.

이때 현수의 음성이 있었다,

“백작! 왕궁에서 듣자 하니 예전에 홀렌 영지였던 곳과 네로판 영지가 몬스터들에 의해 위태롭다 들었소.”

“네, 사실이옵니다. 마스터!”

스트마르크 백작은 더없이 공손한 음성과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카문젠이 오기 전에 그곳을 다녀올까 싶소.”

“네? 거기까지 가려면 최소 며칠은… 아! 네에.”

기사들이 가려면 몇날며칠을 말 위에서 보내야 간신히 당도할 수 있는 곳이지만 위저드 로드에겐 불과 1∼2초면 당도할 수 있음을 깨닫고는 얼른 고개를 끄덕인다.

10장 사진 속의 다프네

“내가 그쪽 지리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조력자가 필요하오. 도움이 필요하오.”

“조력자요? 그럼 그쪽에 대해 잘 아는 자들을 수배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백작 역시 자리에서 일어서려 한다.

곤혹스런 이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본능이 시킨 일이다. 그런데 발목을 붙잡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이곳 기사 중에 하인스라는 자가 필요하오.”

“하, 하인스요?”

“듣자 하니 한동안 홀렌 영지에 머물다 와서 그곳 지리를 제법 안다 들었소. 그러니 괜찮다면 하인스를 불러주시오.”

“아! 무, 물론입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백작은 여전히 음식 찌꺼기를 주워 담고 있는 실비아에게 시선을 돌린다.

“실비아! 그건 내버려 두고 가서 하인스를 불러와라.”

“네! 영주님.”

명이 떨어지자 실비아는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곤 총총걸음으로 물러난다. 어차피 찌꺼기를 마저 치우려면 도구가 필요했던 때문이기도 하다.

“백작! 방금 나간 실비아도 데리고 가겠소.”

“실비아를요? 그 아인 이 영지를 벗어나본 경험이 없는 아이이옵니다. 한데 어쩐 일로…….”

“오다 보니 실비아가 하인스에게 연모의 정을 품고 있는 듯하오. 이곳에 온 기념으로 서로가 마음이 있다면 둘을 연결하여 주려 하오. 아! 물론 우리에게 음식을 만들어줄 시녀가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오.”

“……!”

순간적으로 백작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인스는 백작의 다섯 번째 부인에게서 얻은 아들이다. 모두 아홉 명의 아들이 있는데 그중 일곱 번째이다.

네로판 영지 하우드 남작의 딸 세실리아는 백작의 큰아들과 결혼했다. 이곳 풍습은 신랑 쪽에서 신부를 데리고 온다.

하여 형제들 중 가장 성품이 좋은 하인스를 보냈다. 그래서 하인스는 네로판 영지에서 꽤 오래 머물렀다.

뿐만 아니라 세실리아가 친정을 갈 때마다 동행했다. 그 기간을 합치면 거의 2년을 네로판 영지에 있었다.

그렇기에 그쪽 사정을 잘 아는 것이다.

아무튼 하인스는 백작의 아들이다. 귀족에게 있어 아들과 딸들은 권력 유지를 위한 좋은 수단이 된다.

보다 높은 권력자에겐 딸을 며느리 또는 첩으로 보내 우호관계를 맺는다.

낮은 자에겐 딸을 주어 사위를 삼기도 한다.

반대로 아들들은 다른 귀족 또는 돈 많은 장사치의 딸을 반려 또는 첩으로 맞아들인다. 그렇게 해야 주변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고, 유사시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인스의 경우는 젊고, 성품이 좋은데다, 아직 미혼이다.

위로 형들이 많기에 차기 백작은 생각지도 못한다.

그렇기에 어려서부터 검법에 매진했다. 수를 써서 작위를 물려받기보다는 기사로서 성공하겠다는 뜻을 품은 것이다.

그렇기에 차기 가주 자리를 놓고 각축을 벌이는 큰형과 둘째형의 시선 밖에 있다.

나머지 형제들은 서로 견제하는 중이다.

아무튼 하인스는 소드 익스퍼트 초급의 실력이다.

21살의 나이에 이만한 화후에 오르는 것이 쉽지 않기에 하인스는 촉망받는 기사인 셈이다.

따라서 상당한 효과를 발휘할 정략혼의 대상이다. 백작은 이웃 영지 상단주의 딸과 엮어주려 생각했다.

상당한 지참금이 들어올 것이니 영지 재정이 풍부해질 것이란 기대를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한낱 시녀와 엮어주려고 한다고 한다.

실비아의 미색이 빼어난 것은 인정한다. 게다가 조신하고, 음식 솜씨도 괜찮으며, 영리하기도 하다.

시종장 도널드 남작이 데려왔는데 그의 친척이라 백작의 아들들은 건드리지 못한다. 도널드가 부친과 거의 매일 대련을 하며 실력을 키워나가는 사이이기 때문이다.

변경백인 부친에게 잘못 보여 좋을 게 없다.

그렇기에 백작의 자식들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소문나지 않는 범위에서 일탈을 즐긴다.

어쨌거나 실비아를 일곱 번째 아들의 배우자로 생각해 본 바 없다. 그렇기에 아니라는 말을 하려던 순간 뇌리를 스치는 상념이 있다.

‘마스터께서 맺어주시면 그것 또한 인연이잖아.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하인스와 실비아를 보내면… 그래! 그러자. 포렌상단의 여식은 여덟째와 맺어주면 되지.’

백작은 이제 겨우 열다섯 된 아들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포렌상단의 여식은 올해 스물이다.

좋은 혼처를 찾느라 혼기를 놓친 것이다.

그럼에도 여러 귀족가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상당히 많은 재물이 있기에 자신감을 잃지 않은 때문이다.

백작의 여덟째 아들은 다섯 살이나 아래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깜깜한 밤에 불을 끄면 스물다섯 살 차이도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다.

“마스터의 뜻대로 하겠나이다.”

“좋소! 백작이 내 뜻에 이토록 흔쾌히 따라주니 작은 선물 하나를 주겠소. 아공간 오픈!”

말 떨어지기 무섭게 시커먼 공간이 허공에서 일렁인다.

아공간을 연 현수는 오래된 소파를 한쪽으로 밀어냈다.

밀짚을 넣고 오크 가죽으로 덮은 것인지라 냄새가 나는 것이다.

공간이 비워지자 지저분한 것들이 눈에 뜨인다.

“워싱! 클린!”

딱 두 마디 말이 떨어졌건만 바닥은 눈에 뜨이게 깨끗해진다.

백작은 다른 곳과 전혀 색이 다른 바닥을 보고 놀라는 표정이다. 집무실 바닥이 이처럼 더러웠는지 몰랐던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아공간에 담겨 있던 소파세트를 꺼냈다. 물소가죽으로 만든 앤티크 디자인 소파 세트이다.

원목에 정교한 조각을 가미한 1인용, 2인용, 그리고 3인용을 차례로 꺼냈다. 당연히 푹신푹신하다.

다음은 테이블이다.

이것 역시 틀은 원목을 조각하여 만든 것이며 상판은 대리석이다. 사이드 테이블은 크기만 작을 뿐 같은 디자인이다.

곧이어 벨벳으로 덧씌운 쿠션들을 꺼냈다.

스트마르크 백작은 왕궁에서도 볼 수 없던 진귀한 물건이 계속해서 나오자 눈이 휘둥그레진다.

“마, 마스터! 이건 대체…….”

“손님들에게 편안한 자리를 제공하는 건 주인의 의무이네. 한번 앉아보게.”

“네? 아, 네에.”

백작은 조심스레 소파에 앉아본다. 느껴지는 푹신함이 마음에 들었는지 조금 더 깊숙이 엉덩이를 들이민다.

그러는 사이에 의자 세 개를 더 꺼냈다. 역시 앤티크 디자인으로 제작한 가죽을 덧씌운 것이다.

하나는 백작의 의자를 치우고 놓았고, 다른 둘은 백작의 책상 앞에 놓았다.

“가, 감사합니다. 마스터! 이토록 귀한 물건을…….”

“좋은 영주가 되라는 뜻으로 준 것이오. 영지민들 또한 사람이니 가렴주구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람이오.”

“가렴주구라니요? 그게 무슨 뜻인지…….”

“가혹하게 세금을 징수하고, 영지민들을 다스리되 들들 볶지 말라는 뜻이오. 홍수나 가뭄 때엔 세율을 낮춰주고, 전염병이 돌 때는 신관들을 초청하여 치료해 주는 영지는 그냥 놔둬도 번영하고 풍요롭게 되오.”

“…아! 알겠사옵니다. 마스터의 높으신 뜻 마음 깊이 새겨두겠나이다.”

스트마르크 백작은 크게 고개를 숙인다. 현수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확실히 깨달은 때문이다.

이때 노크 소리가 들린다.

쿵, 쿵―!

“기사 하인스! 영주님의 부름을 받아 당도하였습니다.”

“그래, 들라!”

삐이꺽―!

문이 열리고 하인스가 들어선다. 오는 동안 실비아로부터 하인스 백작이 누구인지에 대해 들었기에 들어서자마자 무릎을 꿇고 크게 고개를 조아린다.

“기사 하인스! 높으신 마스터를 알현하옵니다.”

“그래, 자리에서 일어나게.”

“네! 마스터!”

아까처럼 절도 있는 동작으로 일어났다.

방금 극경의 예를 표했음에도 또 한 번 오른 주먹을 왼 가슴에 대며 정중히 고개 숙인다. 기사로서의 예법이다.

이때 스트마르크 백작의 음성이 있다.

“하인스! 마스터께 네로판 영지를 안내하도록 해라.”

“…네! 명대로 하겠습니다.”

이번엔 스트마르크 백작에게 고개를 숙인다. 이 순간 뒤에 있던 실비아의 안색이 살짝 변한다.

한동안 기사 하인스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실비아! 너도 따라서 마스터의 시중을 들도록 하라.”

“…네? 아, 네에. 영주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실비아는 두 손으로 치마를 잡고는 살짝 무릎을 굽혀 예를 갖춘다.

“백작! 혹시 네로판의 지도가 이곳에 있소?”

“네, 이쪽으로…….”

백작은 집무실 한편의 커튼을 걷어냈다. 거기엔 스트마르크 영지 인근 지도가 소상하게 그려져 있다.

“몬스터 출몰 지역은 어디인가?”

“여기, 스톨레 마을 인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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