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895화 (894/1,307)

# 895

백작이 손으로 짚은 곳은 라수스 협곡과 인접해 있는 곳으로 널찍한 평원 한가운데 형성된 곳이다.

[아리아니!]

[네! 주인님!]

[실라디아 좀 불러줘.]

[좌표 때문에 그러시죠?]

[그래! 스톨레 마을의 안전한 좌표를 확인해 달라고 해.]

[잠시만요.]

현수가 말없이 지도에 시선을 두고 있다 느꼈는지 스트마르크 백작과 하인스, 그리고 실비아는 입을 다문 채 있다.

그렇게 불과 몇 분의 시간이 흘렀다.

[좌표 확인해 왔어요. 275FE3164LRF ― RTW45769F66Y ― 7IKQ518SSF6이에요.]

[땡큐∼!]

“백작! 이제 출발해야겠소. 하인스, 그리고 실비아 이리 가까이 오도록!”

“네, 마스터!”

둘이 가까이 다가오자 백작에게 시선을 준다.

“카문젠과 노예사냥꾼들이 나보다 먼저 당도하거든 이 여인을 본 적이 있느냐 물어보게.”

말을 하며 다프네의 사진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당연히 총천연색이다. 고성능 DSLR로 찍고, 사진인화 전문 DS―RXI 고속포트프린터로 인쇄한 것이다.

15.2×20.3㎝짜리 인화지에 인쇄한 이것엔 환히 웃는 다프네의 얼굴이 가득하다. 천하절색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이 사진은 다프네가 촌스럽고 헐렁한 마의를 벗고 노란색 바탕에 꽃무늬가 그려진 원피스로 갈아입은 후의 모습이다.

그때 다프네는 원피스의 디자인과 색상, 그리고 질감이 너무 마음에 든다며 싱글벙글 웃었다.

하여 현수는 빗과 머리끈을 꺼내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정돈해줬다. 반짝이는 인조 보석이 붙어 있는 머리띠도 꺼내서 씌웠다.

그리고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기념으로 한 장 찍어둔 것이다.

물론 라세안과 다프네 본인은 이런 사진이 있음을 모른다.

그게 사진기였다는 것도 몰랐으며, 지구에서 인쇄한 것이기 때문이다.

현수는 다프네가 보고 싶어 인화한 것이 아니다.

조만간 태을제약에서 출시할 상품은 주신의 숨결이라는 뜻을 가진 포인세의 잎을 가공하여 만들 천연향수이다.

이것의 상품명은 아르센의 공주이다.

처음엔 이리냐를 모델로 쓸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리냐는 쉐리엔을 제조해 내는 대한약품의 모델이다.

태을제약은 대한약품의 경쟁업체라 할 수 있기에 다른 모델을 구상했다.

그러다 카이로시아와 로잘린, 그리고 다프네와 스테이시 아르웬, 마지막으로 케이트 중에 하나를 모델로 써보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지구에도 아름다운 여인들이 많이 있지만 이들 만한 여인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기 힘든 때문이다.

연희는 전문모델도 아니건만 천지건설을 비롯한 계열사의 전속모델 비슷한 상황이다.

일반인임에도 불구하고 톱스타에 준하는 개런티를 받는 걸 보면 이연서 회장의 입김 때문일 것이다.

지현은 서초동에서 수시로 엔터테인먼트사들의 명함을 받는다고 한다. 소위 말하는 길거리 캐스팅 대상이다.

매번 거절하지만 끈질기게 따라붙는 사람이 간혹 있다고 한다. 그러면 유부녀임을 밝힌다.

그리고 남편이 김현수라 하면 그대로 물러난다. 엄청나게 돈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아니 제시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지현은 세상에 노출되는 걸 별로 즐기지 않는다.

그렇기에 모델에서 제외되어 있다. 어쨌거나 다프네의 사진은 이런 이유로 인쇄되었던 것이다.

“……!”

엉겁결에 사진을 받아든 백작은 마치 살아 있는 듯한 그림을 보곤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의 말이 이어진다.

“누가 이 여인을 납치하였으며, 팔아 넘겼다면 어느 곳으로 보냈는지를 즉시 확인하고 추적토록 하게.”

“무, 물론입니다. 마스터!”

백작의 고개는 크게 위아래로 끄덕여진다. 그런 그의 시선은 사진에서 떨어질 줄 모른다. 많은 여인을 보았지만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매스 텔레포트!”

샤르르르릉―!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현수와 하인스, 그리고 실비아의 신형은 집무실로부터 사라졌다.

그럼에도 백작은 고개 끄덕이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실리프 마탑주가 왜 드래곤의 딸이라는 이 여인과 결혼하려는지 이해된 때문이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인연을 만들고 싶을 만큼 아름다웠던 것이다.

“흐음! 도착했나? 하인스 여기가 어디지 알겠는가?”

“잠시만요.”

현수 일행이 당도한 곳은 스톨레 마을 외곽에 자리한 절벽 윗부분이다.

하인스는 시선을 모아 마을 및 인근 지역을 훑어본다.

“마스터! 이곳은 푼들절벽인 것 같습니다. 저기 보이는 저곳이 스톨레 마을이고, 저쪽에 있는 건 파르실 마을입니다.”

두 마을은 약 1㎞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흐음! 마을치고는 제법 규모가 크군.”

“네, 하우드 남작가에 종신토록 몸담았던 은퇴기사들에게 내려진 장원이라 그렇습니다.”

안력을 높여 스톨레 마을 쪽을 바라보니 마을을 둘러싼 석성이 온통 피투성이다.

지금은 잠시 몬스터들이 물러가 있는 상황인가 싶어 숲을 바라보니 뭔가가 꾸물거리고 있다. 야행성이라 밤에 습격하려 물러나 있는 모양이다.

“일단 가자.”

“네! 마스터!”

현수는 선 자리에서 좌표를 계산했다.

수학을 전공한 사람이기에 공간좌표를 잡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비약적으로 좋아진 두뇌 덕분에 x, y, z축 공간좌표에 대한 계산은 금방 끝났다.

“이쪽으로!”

“네! 마스터!”

“하인스! 실비아를 안게!”

“네……?”

하인스는 대체 무슨 뜻이냐는 표정이다. 실비아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인다.

“마법의 범위 밖으로 나가면 이동 중 신체가 잘려 나갈 수 있다. 그러니 실비아와 바싹 붙어.”

“네에? 아, 알았습니다. 실비아 이리 와!”

말을 마친 하인스는 거의 포옹 수준으로 실비아를 안는다.

뭉클한 이성의 몸이 닿자 약간 놀란 듯하지만 이내 표정을 고친다. 실비아는 몹시 부끄러운 듯 두 볼이 붉게 달아 있다.

현수는 피식 웃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매스 텔레포트!”

샤르르르릉―!

셋의 신형은 사라졌고, 다시 나타난 곳은 스톨레 마을 바로 앞이다.

“헉! 누, 누구시오?”

야트막한 성문 위에서 경계근무를 하던 병사가 소리친다.

이 소리에 여기저기에서 곯아떨어져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깨어난다. 그런데 몹시 지친 표정이다. 지난밤의 격렬했던 전투가 모든 체력을 고갈시킨 결과이다.

“문을 열어라! 이실리프 마탑의 마탑주께서 오셨다.”

“엥, 뭐라고? 방금 뭐라 말했습니까?”

하인스의 고함에 병사는 귓구멍을 후빈다. 방금 한 말이 뭔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한 때문이다.

“너희를 구원하려 이실리프 마탑의 마탑주께서 오셨다. 어서 문을 열어라.”

“아, 알겠습니다.”

스트마르크 백작의 일곱째 아들인 기사 하인스는 현재 기사복장을 제대로 갖추고 있다. 그의 갑옷 가슴 부위엔 영지 문장이 그려져 있다.

스트마르크과 네로판 영지가 사돈지간이라는 것은 거의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홀렌 영지와의 영지전에서 이긴 후 대대적인 축하행사를 했던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아군이라 판단한 듯 병사는 더 묻지 않고 문을 열라는 지시를 내린다. 하지만 금방 열린 것은 아니다.

몬스터들의 공격이 시작되면 이 성문으로 몰려들기에 문 뒤에 육중한 수레 등을 가져다 놓은 때문이다.

약 15분 후 거친 마찰음이 들리며 문이 열린다.

끼이이이익―! 쿠우웅!

문이 열리고 드러난 곳엔 패잔병 한 무리가 서 있다. 부상 입은 자가 많아서 그러는지 멀쩡히 서 있는 자보다는 머리에 붕대를 감은 자, 팔뚝을 천으로 칭칭 감은 자, 다른 사내에게 기대어 있는 자, 아예 주저앉아 있는 자 등등이다.

바닥에 쓰러진 채 신음만 토하고 있는 자도 여럿이다.

지난밤에 치러진 치열했던 전투의 결과이다.

“……!”

거의 모든 병사와 영지민들이 눈을 크게 뜬 채 말없이 현수 일행을 바라만 보고 있다. 구원군으로 온 게 달랑 세 명뿐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기사 복장이고, 다른 하나는 귀족인 듯 예복을 걸쳤다. 나머지 하나는 누가 봐도 시녀이다.

몰려드는 몬스터들 때문에 이미 많은 사람이 죽었다. 오늘 밤 어쩌면 전멸할 수도 있다 생각하는 중이다.

그럼에도 다른 곳으로 도주하지 않은 이유는 갈 데가 없기 때문이다.

레드문이 뜬 것도 아니건만 수많은 몬스터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니 도주할 마음조차 품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이 위기를 넘기려면 적어도 5,000명쯤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겨우 세 명이 왔으니 멍한 표정인 것이다.

이러는 사이에 병사들 틈을 비집고 전면으로 나서는 이가 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60대 초반은 된 듯한 얼굴이다.

“지, 진정 마탑주께서 오신 겁니까?”

아머를 걸치고 있는 노기사의 한 손에 투구가, 다른 한 손엔 투핸드 소드가 들려 있다. 날이 기니 몬스터들을 상대하기 가장 적합한 병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두 팔과 어깨에 심한 상처를 입은 듯 걸을 때마다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말없이 바라보던 현수는 노기사가 가까이 다가서자 입술을 달싹였다.

“컴플리트 힐!”

샤르르르릉―!

서늘한 마나가 스며들자 다가서던 노기사가 부르르 떤다. 급속한 상처 치유가 이루어짐이 느껴진 듯하다.

“은퇴기사 로하르만! 위저드 로드께 인사드립니다. 저희를 구원하러 와주셔서 일생의 영광이옵니다.”

쿠웅―!

꽤 큰 체격이건만 무릎이 망가져도 좋은 듯 단번에 무릎을 꿇는다.

길고 긴 룬어 영창 없이 컴플리트 힐이란 고서클 마법을 쓸 수 있는 인물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기에 눈앞이 젊은이가 이실리프 마탑의 마탑주라는 걸 단숨에 인정한 것이다.

장원의 주인인 노기사가 무릎을 꿇자 패잔병 같던 병사들 역시 일제히 무릎 꿇는다.

“위대하신 분을 뵈옵니다.”

“일생의 광영이옵니다.”

“아아! 위대하신 분이시여…….”

모두가 뭐라 뭐라 중얼거리지만 현수는 개의치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한 무리의 부상병 앞에 다가가 나직이 읊조렸다.

“매스 컴플리트 힐!”

샤르르르르릉―!

또 한 번 마나가 뿜어진다. 이때 아리아니의 음성이 들려온다.

[주인님! 왜 또 힘 빼세요. 엘리디아를 부를까요? 걔가 오면 좀 편하시잖아요.]

[…불러! 부상자가 너무 많으니.]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아리아니의 음성이 끊기자 현수는 또다시 걸음을 옮겼다. 피 흘리는 부상병들이 몰려 있는 곳이다.

“매스 컴플리트 힐!”

샤르르르릉―!

“아아! 상처가 낫고 있어. 낫고 있다고.”

“난 피가 멈췄어. 어어! 이것 좀 봐. 상처가 점점 아물어.”

“내 다리 좀 봐! 으아! 내 다리! 다 나았어, 나았다고.”

“나도, 나도! 이것 봐. 반쯤 잘려졌던 팔이 다 나았어.”

부상병들의 입에서 연신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주인님! 엘리디아 왔어요. 치료시켜요?]

[그래! 이 장원 안의 모든 병자를 치료시켜.]

[호호! 네에. 엘리디아!

아리아니가 엘리디아에게 한 말은 고대 정령어로 ‘이곳의 모든 사람을 말끔하게 하여라’라는 뜻이다.

엘리디아는 아리아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반투명한 긴 동체를 배배 꼬는가 싶더니 섬전의 속도로 장원 전체를 누비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현수에게서 많은 정령력과 마나가 빠져나간다. 물론 사람들의 눈에는 엘리디아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적(異蹟)이 일어나는 것으로 여기고 모두가 무릎을 꿇은 채 경건한 모습으로 고개를 조아린다.

신을 영접하는 듯한 모습이다.

“로하르만이라 했나?”

“네, 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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