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896화 (895/1,307)

# 896

“자리에서 일어나라.”

“…네, 로드!”

지엄한 위저드 로드의 명이다. 그렇기에 자리에서 일어서면서도 불경을 범치 않으려 조심스런 표정이다.

“내습한 몬스터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군.”

“네, 로드! 그런데 이곳은 로드를 모시기에 합당치 못하오니 일단 자리를 옭기시지요.”

“그러지. 안내하게.”

노기사 로하르만의 안내를 받아 옮겨간 자리는 장원을 둘러싸고 있는 돌담 밖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돌담에 불과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이걸 성벽이라 부른다.

하여 살펴보니 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제법 견고하게 축조되었으니 그리 불릴 만도 하다.

“저기, 저 숲에 몬스터들이 있습니다. 해가 떨어지면 그때부터 사방에서 우리를 에워싸고 달려들지요.”

사방을 훑어보니 숫자가 상당히 많은 듯싶다,

“이 장원의 총인원은 얼마였으며 그간 얼마나 희생되었는가? 부상자는 얼마였고.”

“네, 저를 포함하여 총인원 2,875명이었는데 며칠간 지속된 습격에 이 중 2,327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공격한 몬스터의 숫자는 대략 3,000여 마리이다. 단단한 돌담이 없었다면 진즉에 몰살당했을 것이다.

“남은 인원 중 아이와 노인의 수는?”

“10세 이하 122명이고, 70세 이상은 61명입니다. 나머지 365명 중 287명이 부상자였었습니다.”

부상자 중엔 중상자가 많았다.

따라서 현수가 오지 않았다면 멀쩡한 78명과 경상자 20여 명의 힘만으로 몬스터들을 상대했어야 한다.

오늘 전멸할 상황이었던 것이다. 장원 밖 풍경을 보니 멀리 숲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들이 보인다. 오크 한 무리가 곧 다가올 밤을 맞이하려 들썩이고 있는 듯하다.

“일단 음식부터 먹이고 쉬도록 하게.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하지.”

“네, 부탁드립니다.”

계속된 전투 때문에 너무도 지쳤지만 장원의 주인이기에 제대로 쉬지 못해 피곤이 중첩되어 있는 상황이다.

현수와 대화를 하는 동안에도 아득해지는 느낌이 여러 번 있었다. 너무도 피곤하여 기절하기 일보 직전인 것이다.

그런데 쉬라니 꿀처럼 느껴지는 듯하다.

11장 한번 맛 좀 봐라!

“참, 식량은 충분한가?”

“네! 비축된 것이 있어 당분간을 버틸 만하옵니다.”

“알았네, 그런데 조금 피곤해 보이는군, 바디 리프레쉬!”

샤르르르르릉―!

마나가 스며들자 로하르만의 눈빛과 표정이 바뀐다. 피곤함이 무엇인지 모르는 듯 생생해진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가서 일 보게.”

“네, 로드!”

로하르만이 기사로서의 예를 갖추곤 얼른 물러선다.

피곤함이 가셨으니 이제부터 장원의 주인으로 해야 할 일들을 하려는 것이다.

먼저 부상자들이 제대로 보살핌을 받는지 확인하고, 음식을 나눠주도록 할 것이다. 다음은 노약자와 어린이들이 안전하게 대피하고 있는지 확인할 생각이다.

마무리는 멀쩡한 인원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다가올 야간 전투를 대비하는 것이다. 하여 총총걸음으로 물러났다.

“하인스!”

“네, 로드!”

기사 하인스가 절도 있는 동작으로 고개를 숙인다.

“실비아와 산책이라도 하고 오지 그래.”

“네?”

이 와중에 대체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다.

“실비아가 자네를 마음에 두고 있는 듯 하더군. 내가 보기에 참한 아가씨 같은데 데이트나 하고 오라고.”

“……! 실비아가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던 하인스가 놀랍다는 표정을 짓는다. 상상도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도널드가 자신의 친척이라며 실비아를 성내로 들였을 때 모든 사내가 그녀를 넘봤다.

시녀라 하기엔 너무 예쁘고, 우아하다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널드가 있기에 언감생심이었다.

시종이지만 도널드는 아버지와 매일 검을 맞대는 오랜 친구 같은 존재이다. 그렇기에 차기 영주가 될 백작의 큰 아들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인스 역시 실비아에게 호감을 가졌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마음을 접었다. 본인이 정략혼의 대상이 될 예정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평소 마음에 두고 있던 실비아가 자신을 좋아한다니 멍한 표정을 지은 것이다.

“후후후! 서로 마음에 들어 하니 다행이군. 어서 가서 데이트하게.”

“이 와중에 데이트라니요. 로드!”

하인스는 그럴 수 없다는 표정이다.

“둘이 함께 장원 내부를 살펴보고 오라는 뜻이었네.”

“아……! 죄송합니다. 즉시 시행토록 하겠습니다.”

“그래! 가다 길을 잃을 수도 있으니 손 꼭 잡고 다니게.”

“네? 아, 네에, 알겠습니다.”

하인스는 절도 있게 예를 갖추곤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그런 그의 눈에 실비아가 보인다. 부상병의 팔에 감겨 있던 넝마 같은 천을 벗겨내는 중이다.

전장에 홀로 핀 꽃송이 같은 모습이다.

“……!”

하인스는 실비아를 부르려다 잠시 멈춘 채 가만히 살펴만 본다. 그런 그의 입가엔 기분 좋은 미소가 어려 있다.

이런 줄 모르는 실비아는 부상병들을 돌본다. 상냥한 미소와 함께.

“실비아!”

“…네, 기사님!”

“같이 가자, 로드께서 임무를 부여하셨어.”

“네? 뭐라고요? 으읏!”

가까이 다가간 하인스는 다짜고짜 실비아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그리곤 앞장서서 그녀를 이끈다. 그렇게 몇 발짝 걸어 사람들이 멀어졌을 때 하인스가 입을 열었다.

“실비아! 나, 너 좋아했어. 몰랐지?”

“네에?”

이곳은 삶과 죽음이 공존했던 전장이다.

엘리디아 덕분에 부상병들이 말끔해지긴 했지만 사방에 뿌려진 것이 선혈이다.

아직 말라붙지 못한 부분도 있다. 하여 갑작스런 말에 실비아는 대꾸하지 못하고 눈만 크게 떴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인스의 말이 이어진다.

“실비아! 내 아내가 되어줄래?”

진짜 박력이 있어서 이러는 건지, 아님 상황 판단이 미숙하여 장소를 가릴 줄 몰라서 그러는 건지 알 수는 없다. 어쨌든 이건 분명한 프러포즈이다.

“……!”

실비아가 느끼기엔 너무도 박력 있는 말이었기에 잠시 멈칫거린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진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인다.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운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그마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좋아요. 하인스님! 그럴게요.”

“하하! 하하하!”

하인스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실비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곤 와락 잡아 당겨 잠시 품에 안는다.

“휘이익―! 휘이익!”

누군가 휘파람을 분다. 그러거나 말거나 잠시 실비아를 품에 가둬둔 하인스의 입가엔 웃음이 배어 있다.

물론 기분이 좋아서이다.

잠시 후, 둘은 장원 곳곳을 돌아다니며 밀어를 나눴다. 본연의 임무는 잊지 않았기에 곳곳으로 시선을 보냈다.

엘리디아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이 장원엔 부상자가 없다. 전투와 무관한 병을 앓고 있던 이들까지 모두 생생해진 때문이다. 이는 치료에 특화되어 있는 물의 최상급 정령 엘리디아의 능력 덕분이다.

물론 현수로부터 연유된 무궁무진한 마나와 정령력이 공급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곳곳에서 스튜같이 국물이 있는 음식이 만들어지고 있다. 아직 추운 겨울이기 때문이다.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이 몇몇 있는 것 이외엔 표정들이 밝다. 느닷없는 이실리프 마탑주의 등장 덕분에 부상으로부터 해방되었고, 두려움과 공토로부터 벗어난 때문이다.

들려오는 소리를 종합해 보면 오늘 이 장원 사람들 전부 성벽이라 부르는 돌담 위에 올라설 모양이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마법의 향연을 두 눈에 꼭 담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구전이 되어 후손에게, 그리고 또 그의 후손에게 전해질 전설이 될 것이라 했다.

자신들이 전설을 목격하는 너무도 영광스런 자리이니 절대로 빠지지 않겠다는 말이다.

이 밖에도 현수를 찬양하고 칭송하는 말이 많았다. 나타나자마자 병자들을 치료해준 게 가장 컸다.

다음은 자신들에게 음식이 공급되도록 했다는 이야기도 들은 모양이다.

둘이 사방을 헤집고 다니며 살피는 동안 현수는 장원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장원 밖 농지들은 몬스터들이 짓밟아 엉망인 상태이다. 그런데 흙색깔이 별로이다.

이때 어깨 위에 있던 아리아니가 쫑알거린다.

“주인님! 여긴 한 해도 쉬지 않고 계속 같은 작물을 재배하여 지력이 너무 약해져 있어요.”

“그치? 연작4)뿐만 아니라 그루갈이5)도 병행된 것 같은데.”

“네! 올해는 뭘 심어도 안 될 땅인 거 같네요.”

“흐음……!”

현수는 잠시 턱을 괸 채 상념에 빠졌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몬스터들의 사체가 썩으면 비료가 될까?’

오늘 이곳에선 대학살이 벌어질 예정이다.

아마도 많은 몬스터가 죽을 것이다. 10서클 대마법사가 그렇게 마음먹고 있기 때문이다.

몬스터의 사체가 양분이 되려면 적당히 썩어야 한다. 그건 타임 패스트 마법을 쓰면 될 것이다.

그렇게 썩힌 사체들은 노에디아에게 처리하도록 위임한다.

다음에 가이아 여신의 축복을 내려주면 괜찮을 듯싶다.

“아리아니! 내가 깜박 잊을 것 같아 미리 말하는데 이따가 몬스터들이 접근하면 도망가지 못하도록 정령을 불러. 누굴 부르면 좋을까?”

“그냥 도망만 못 가게 하려면 노에디아를 부르죠. 뒤쪽에 흙벽이 솟아나게 하면 그만이니까요.”

“그래? 그럼 알아서 해.”

“네, 주인님!”

오늘 밤의 전투를 어찌할 것인지 가늠한 현수는 성벽 위에 올라 잠시 휴식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때 늙수그레한 마법사 하나가 힘겹게 계단을 딛고 올라온다.

“소인 실리이만, 죽기 전에 위대하신 로드를 알현하게 되어 무상의 영광이옵니다.”

너무도 늙어 행동이 굼뜬 늙은 마법사는 힘겹게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조아린다.

호호백발 노인네이다. 얼굴엔 검버섯이 잔뜩 피어 있고, 미라처럼 바싹 말라 있어 보기에 안쓰럽다.

서클수를 확인해 보니 3개의 링이 천천히 돌고 있다. 너무 노쇠하여 얼마 후면 죽을 목숨이다.

“나이도 많은 데 왜 나오셨는가?”

로드인지라 말을 놓아야 하지만 아흔 살이 넘은 듯한 노인에게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소인의 작은 힘이라도 보태려 나와 있었사옵니다.”

실리이만은 장원주인 로하르만의 숙부이다. 은퇴한 조카를 돕기 위해 머물던 중이다. 그런데 느닷없는 몬스터의 공격이 시작되자 연구소를 나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실리이만은 말을 하면서도 부들부들 떤다. 평생을 연구실에서만 지냈기에 체력이 엉망인 때문이고, 과도한 마나 사용으로 인한 고갈현상이 빚어지는 중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놔두면 서클이 하나하나 붕괴되는 현상이 빚어지기 일보직전인 것이다. 그렇게 링을 모두 잃게 되면 곧바로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마나뿐만 아니라 생기까지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아공간 오픈!”

현수는 아공간에 담겨 있던 마나포션 하나를 꺼냈다.

이실리프 마법서에 기록된 제조법으로 만든 것으로 지구의 정밀계측 기구를 이용한 것이다.

아르센 대륙엔 없는 초고농도이며 순수한 마나로 제조된 이것은 마법사에겐 엘릭서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것부터 마시게.”

“로, 로드!”

플라스크에 담긴 포션으로부터 느껴지는 순수한 마나의 향기에 실리이만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단숨에 깨달은 모양이다. 하여 어찌 감히 이걸 마시느냐는 표정이다.

“묻지 말고 일단 마시게.”

“네, 로드!”

사람인 이상 누구나 오래 살고픈 욕망이 있다.

실리이만이라 하여 다를 바 없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렇다 하여 맥없이 있다 죽고 싶진 않다. 그렇기에 허겁지겁 뚜껑을 열고는 마나 포션을 들이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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