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7
이것 하나의 용량은 대략 300㏄ 정도 된다.
그렇기에 목울대가 아래위로 여러 번이나 움직이고야 플라스크가 비었다.
실리이만은 위장에서 시작된 순수 마나가 전신으로 뻗어감을 느끼고 눈을 감았다.
온몸의 세포가 한꺼번에 깨어나는 듯한 시원함은 뭐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황홀함을 안겨 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실리이만의 얼굴엔 희열의 빛이 어린다. 이 순간 현수의 입술이 달싹였다.
“리커버리!”
샤르르르르릉―!
체외로부터 스며든 마나는 체내에서 흡수된 마나 포션과 어우러져 실리이만의 노화된 세포와 기관, 그리고 장기들을 하나하나 다독이며 생기를 불어넣었다.
이게 생기면 죽을 날이 가까워졌다하여 저승꽃이라고도 부르던 검버섯이 스르르 사라진다.
심하게 쪼글쪼글하던 얼굴의 주름도 조금씩 사라진다. 뼈 위에 얇은 가죽만 씌워놓은 듯했던 얼굴의 빛도 달라졌다.
순수마나의 효능으로 혈액 속 각종 노폐물이 빠르게 분해 및 배출되면서 혈관의 색상 자체가 달라진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코를 자극하는 악취가 풍겼다. 비린내와 더불어 구린내, 그리고 고린내가 섞인 냄새라 구토할 뻔했다.
그럼에도 현수는 자리를 뜨지 않고 실리이만의 변모를 자세히 살폈다. 마나 포션과 리커버리의 결합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지를 기억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곳 아르센에선 다섯 여인을 아내로 맞이할 예정이다.
카이로시아, 로잘린, 스테이시, 다프네, 그리고 케이트이다.
라세안이야 드래곤이니 앞으로도 오래 살겠지만 카이로시아의 아버지와 두 오빠, 그리고 로니안 공작부부, 아르가니 에이런 판 포인테스 공작은 그렇지 않다.
10서클 대마법사가 되었지만 리절렉션 마법은 실마리조차 잡지 못한 상태이다. 그런데 이들을 죽음의 문턱으로부터 잠시 유보시킬 답을 찾은 것 같다.
물론 조건이 있다. 마나에 민감한 체질로 바뀌어야 한다.
아르가니 공작은 7서클에 진입하면서 바디 체인지를 겪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검사인 로니안 공작은 이미 마나에 대한 감응이 좋다. 이들을 뺀 나머지에게 마나심법을 가르쳐 보면 어떨까 싶다.
지구의 부모님과 장인, 장모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마나에 대한 감응이 좋아지면 마나 포션의 효과가 보다 확실해지기 때문이다.
“로, 로드! 어찌 이 미천한 놈에게……! 너무도 크신 은혜에……. 감사, 또 감사드리옵니다. 로드!”
현수에게 다가왔을 땐 후들거리는 다리 때문에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힘든 지경이었다. 곧바로 쓰러져 죽음에 이른다 하더라도 아무도 놀라지 않을 정도로 노쇠한 상태였다.
나이가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지난 밤 과도한 마법 난사로 인한 결과였다.
그런데 확연히 달라졌다. 누가 봐도 아흔이 넘어 보이던 얼굴이 일흔 정도로 바뀌어 있다. 수전증에 걸린 듯 덜덜 떨던 손도 거의 멀쩡해져 있다.
무엇보다도 흐리멍덩하던 눈빛에 힘이 실려 있다. 현수의 생각대로 저승의 문턱에서 벗어난 것이다.
실리이만은 체내에서 꿈틀거리던 순수 마나의 느낌을 잊지 않았다.
아울러 흐릿해지던 마나 링이 힘차게 돌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그렇기에 크나 큰 은혜를 입었음에 감사하는 것이다.
“마법은 룬어의 수식과 마나의 배열을 머리로 외워서 익히는 것이 아니네. 막히면 돌아가게. 그래도 목적지엔 이를 수 있지 않겠나?”
“아……!”
실리이만은 현수의 말에 깨달음을 얻은 듯 나지막한 탄성과 함께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주변의 마나가 회오리치듯 그의 몸으로 스며든다.
나이 30에 3서클이 되었을 때 실리이만은 다른 마법사들의 질투 어린 눈길을 받았다. 너무 빠른 성장이라 평가된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껏 그 상태 그대로 정체되었다.
무려 60년 이상 3서클에 머물렀던 것이다. 덕분에 3서클 이하 마법은 더 이상 능숙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하여 4서클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음에도 성과가 없었다. 그런데 현수를 만나자마자 곧바로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현수는 같은 마법사로서 보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 실리이만 주변에 배리어를 쳐주었다. 외부의 물리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흘렀을 때 은퇴기사 로하르만이 계단을 딛고 올랐다.
“로드! 여기에 계셨습……? 어라? 숙부가 어찌……?”
“잠시 기다리게. 실리이만은 지금 4서클에 오르는 중이니까.”
“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로하르만은 누구 덕에 숙부의 염원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깨닫고는 깊숙이 허리를 숙인다.
“로드의 은혜에 감사드리옵니다.”
로하르만은 한 무릎을 꿇고, 왼 주먹을 오른 가슴에 올리며 진심 어린 감사의 뜻을 표했다.
“장원은 좀 안정되었는가?”
“네! 모두 로드 덕분이옵니다.”
“이제 곧 몬스터들이 몰려올 것이네. 더 이상 다치는 사람이 없도록 각별히 주의하게.”
“네, 로드!”
이 말을 끝으로 잠시 대화가 끊겼다. 실리이만의 몸이 움찔움찔거린 때문이다.
“왜 이러는 겁니까?”
“4서클이 되면서 반쯤 바디 체인지를 겪는 과정이네.”
“네? 바디 체인지는 7서클 대마법사가 되거나 소드 마스터가 될 때 겪는 것 아닙니까?”
“실리이만이 너무 늙어 내가 안배를 베풀었는데 그게 이런 효과를 빚어내는 모양이네.”
“아……!”
로하르만은 조금씩 젊어지는 듯한 숙부의 모습을 보며 연신 감탄사를 터뜨렸다.
마법의 위대함이 새삼스러웠던 것이다.
이때 장원 꼭대기에서 요란한 타종음이 터져 나온다.
땡, 땡, 땡, 땡, 땡, 땡, 땡, 땡―!
시간이 흘러 사위는 어스름한 상태이다. 이제 곧 해가 떨어지고 나면 암흑으로 물들게 될 것이다.
“몬스터들이 오는군요.”
“올해 농사가 잘되도록 해주지.”
“네?”
몬스터와 농사가 무슨 관계인지 모르기에 로하르만은 짧은 반문을 했지만 현수는 대꾸하지 않았다.
“플라이!”
“……!”
현수의 신형이 둥실 떠오르자 로하르만은 움찔거리며 물러선다. 4서클 이상의 마법사를 본 적이 없기에 사람이 하늘로 솟는 것에 깜짝 놀란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신형을 이동시켜 장원 앞에 이르도록 했다. 그러자 멀리서 다가오던 몬스터들의 속력이 빨라진다. 눈앞의 먹이를 먼저 잡아먹겠다는 뜻이다.
“많군! 오늘 안 왔으면 모두 죽었겠어.”
본인을 향해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대강 헤아려 보았다.
오크만 2,000마리 정도 되는 듯하다. 놀도 1,000마리는 넘는 듯하다. 소수이지만 트롤과 오거도 있다.
이들의 머리 위로 약 300마리의 하피가 날고 있다.
이 정도면 장원이 멀쩡한 상태라 할지라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리가 더 늘어난 건가? 그나저나 하피가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현수는 예리한 시선으로 다른 몬스터들을 찾았다. 아직 숲을 떠나지 않은 녀석들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확인해 보니 한 무리의 웨어울프이다. 조직력을 갖춘 사냥꾼들이 왜 아직 숲에 머물고 있는지 알 수는 없다.
확실한 건 이들의 수효가 최소 500은 넘는다는 것이다.
“아리아니! 노에디아 불러서 이 녀석들 뒤에 장벽 세워.”
“네, 주인님! 근데 숲 속에 있는 놈들까지요?”
“아니, 그건 놔두고 이놈들부터 처리하자.”
“네! 주인님! 노에디아 나와.”
어깨 위의 아리아니는 기다렸다는 듯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잠시 후 달려드는 몬스터들 뒤쪽의 땅이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불룩 솟아오른다. 길이 300m, 높이 3m짜리 장벽이다.
“그럼 이제 시작해 볼까?”
현수는 달려드는 놈들을 바라보며 마법을 구상했다.
잠시 후 몬스터의 몸에서 풍기는 악취가 코를 찌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들을 노려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매스 윈드 쏘우! 매스 아이스 스피어!”
말 떨어지기 무섭게 36개의 원형톱이 형성된다.
무섭게 회전하는 이것은 마나로 이루어진 것인지라 현수의 눈에만 보인다.
위이이잉! 위잉! 위이잉! 위이이이잉!
원형톱들이 출격을 기다린다는 듯 공간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꿈틀거린다. 이것들의 곁에는 마나의 힘에 의해 대기 중 수분이 얼어붙어 만들어진 얼음 창들이 허공에 떠있다.
“발사! 발사!”
웨에에에엥! 쐐에에에엑! 슈아아앙!
원형톱은 제각기 다른 높이로 쏘아져 가며 모든 것을 베어냈다. 이것들은 주로 오크가 있는 쪽으로 행했다.
아이스 스피어의 경우는 트롤과 오거 쪽이다.
강력한 냉기를 품은 이것에 꿰뚫리면 순식간에 얼어 죽는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매스 매직 애로우!”
말 떨어지기 무섭게 굵기가 거의 창에 가까운 화살들이 형성된다.
“발사!”
쐐에에에엑! 슈아아아앙! 쉬이이익!
미사일처럼 끝까지 추적하는 성질을 가진 화살들이 향한 곳은 입맛 다시며 달려들던 하피들이 있는 허공이다.
꺄아악! 케에에엑! 크헤에에엑―!
가장 먼저 오크들이 쓰러지기 시작한다.
무릎이 베어지는 순간 허리를 파고드는 원형톱을 잡으려던 놈의 목이 떨어진다. 또 다른 원형톱이 제 세상을 만난 듯 산지사방을 누비며 모든 것을 베어내는 중이었던 것이다.
크와아악―! 커커컥―! 꿰에에엑!
박힌 얼음 창을 뽑아내려던 자세 그대로 얼어 죽는 트롤과 오거들이 내는 소리이다.
다음 순간 하늘로부터 시커먼 그림자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매직 애로우가 빚어낸 현상이다.
크웨엑! 꺄아악! 케에엑! 캬아악!
섬전의 속도로 쇄도하는 화살들을 떨궈내던 하피들은 등 뒤로부터 쏘아져오는 것까지 막을 능력이 없다. 하여 비명과 함께 추락하는 중인 것이다.
스톨레 마을을 이루고 있는 장원의 돌담 위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입을 딱 벌렸다. 이들의 눈에는 경악의 빛이 어리고 있다.
온 힘을 다해 막으려 해도 감당하기 힘들었던 몬스터 무리들이 그야말로 짚단 쓰러지듯 그렇게 허물어지고 있다.
2,000마리에 가까운 오크는 거의 모두 잘게 썰린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렸다.
육중한 체구로 정문 및 돌담에 충격을 주던 트롤과 오거들은 순식간에 뻣뻣한 사체가 되어버렸다.
그동안 한 번도 출현하지 않았던 하피를 보는 순간 사람들 모두 공포를 느꼈다.
상체는 여인, 하체는 조류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것은 날카로운 이빨로 산 채로 잡아먹는 것을 즐기는 몬스터이다.
위이이잉! 쐐에에엑! 슈아아아악―! 쎄에에엥!
모든 몬스터가 쓰러진 뒤에도 원형톱은 또 다른 먹이를 찾아 사방의 공간을 가르고 있다.
현수는 더 이상의 몬스터가 없음을 확인하곤 나직이 중얼거렸다.
“매직 캔슬!”
더 이상의 파공음이 들려오지 않자 돌담으로부터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와아아아! 와아아아! 와아아아!”
“이실리프 마탑주 만세! 만세! 만세!”
“하인스 대마법사님 만세! 만세! 만세!”
환호성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할 일이 있다.
“디그, 디그, 디그, 디그! 빅 핸드!”
땅 파기 마법으로 구덩이들을 만들어놓고는 커다란 손으로 오크들의 사체들을 쓸어넣었다.
“배리어! 타임 패스트!”
오크들의 사체가 빠른 속도로 부패하기 시작한다. 그 상태로 나두고 트롤의 사체들을 아공간에 담았다.
오거의 사체는 빅핸드 마법으로 한쪽에 모아두었다.
“아리아니! 노에디아 불러서 저것들이 양분이 되도록 해.”
“네! 주인님.”
말 떨어지기 무섭게 부패한 오크들의 사체가 흙 속으로 빨려든다.
잠시 후, 너른 평원엔 오거들의 사체만 수북할 뿐 아무것도 없다. 마치 아무것도 없었던 듯한 모습이다.
노에디아가 작업하는 동안 뒤쪽을 막고 있던 흙 장벽이 사라졌다. 잠시 후, 웨어울프 무리들 또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