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9
“이곳은 평소에도 몬스터 출몰이 많아 석성을 세워두었다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너무 많이 와서 현재 우리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지만 위태롭다 합니다.”
[아리아니! 여기 좌표…….]
[호호, 네에. 주인님! 잠시만요.]
현수는 잠시 지도를 살펴보았다. 지구와 달리 개략적인 위치와 주변의 큰 산, 그리고 강 정도만 그려진 것이다.
그려 넣은 성의 크기가 클수록 농지가 많다는 의미를 담는다고 알고 있다.
[좌표 확인해 왔어. 472FWQ554LRF ― RPQ35688Y12K ― 69QX541XZL6이예요.]
[수고했어, 땡큐∼!]
“다녀오겠네. 갔다 오는 동안 성과가 있기를 바라네.”
“네! 로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백작은 허리를 직각으로 꺾었다.
“텔레포트!”
샤르르르르릉―!
“휴우∼! 도널드, 도널드!”
백작은 나직한 한숨을 쉬곤 연신 도널드를 불렀다.
하지만 노예사냥꾼들을 하옥하러 간 사람이 어찌 금방 나타나겠는가!
결국 다른 시종을 불러 갑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곤 급하게 출발한 창공기사단의 뒤를 따라갔다.
로드의 명이니 직접 매사를 챙기려는 것이다.
끼이익―!
“영주님, 말씀하신 차를…….”
영주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선 실비아는 텅 빈 공간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주방에 갔다 온 시간이 별로 길지 않았는데 모두가 사라진 때문이다.
그러다 물소가죽으로 만든 소파를 보곤 눈빛을 빛낸다. 이런 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주변을 둘러보곤 살며시 앉아보았다. 가죽은 보드랍고, 촉감은 푹신하다. 마치 구름 위에 앉은 기분이다.
“우와, 세상에 이런 게 다 있네.”
실비아는 감탄사를 터뜨리며 소파를 꾹꾹 눌러본다.
* * *
“뭐해? 어서 기름 뿌려! 그래! 이제 불 질러!”
크웨에엑! 아악! 꿰에엑! 케엑! 아아악!
“던져! 어서 돌을 던져! 빨리!”
성벽 위는 온통 난리이다. 기어오르는 몬스터들을 찌르고 베는 병사들의 틈으로 영지민들이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른다.
돌을 운반하는 여자들도 온통 땀투성이다.
사방에 밝혀놓은 횃불 아래로 보이는 것은 끝도 없이 이어진 몬스터들이다.
오크가 가장 많고, 트롤, 오거, 고블린, 놀 등이다.
쿠왕! 쿠왕! 쿠왕! 쾅! 콰쾅! 쿠앙! 쾅!
시선을 돌려보니 미노타우르스 2마리가 계속해서 성문을 들이받고 있다.
쿵! 콰콰콰쾅! 콰쾅! 우르르르! 콰르르르!
“아악! 사람 살려. 케엑! 으아악!”
요란한 소리에 시선을 돌려 보니 성벽 안쪽의 이층집 두 채가 무너지고 있다. 집을 파괴한 것은 커다란 돌이다.
“저건……?”
현수의 시선을 끈 것은 도감으로만 보았던 사이클롭스이다. 주변의 커다란 돌덩이를 주워 던지고 있다.
이때 누군가 소리를 지른다.
“모두 쏴라!”
쇄에엑! 쉐에엑! 쉬이익! 쐐에엑!
성벽 안쪽에 도열해 있던 궁수들이 시위를 놓자 허공으로 화살들이 솟구친다. 몬스터가 너무 많기에 아무데나 쏴도 맞을 판이라 성벽 안쪽에서 쏘는 모양이다.
같은 순간 성벽을 기어오르는 몬스터들이 있다. 병사들은 이들에게 검과 칼, 그리고 도끼를 휘두른다.
쇄에엑! 퀘에엑! 푸욱! 케에엑! 쉬익! 크엑!
“아악! 내 다리, 내 다리! 아아아악!”
몬스터들에게 당한 병사가 비명을 지르며 나뒹군다.
평원 한복판에서 세워진 이 성은 둥근 모양이다.
제법 큰 성임에도 몬스터들은 사방 모두를 에워싼 채 흉포한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중이다.
사람들은 취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사내들 거의 모두 성벽 위에서 혈투를 벌이는 중이다. 이 중엔 여인들도 제법 끼어 있다.
계집아이나 노파들도 돌덩이를 나르고, 화살을 가져다주고 있으며, 상처 입은 자들에 대한 응급처치를 하고 있다.
“여, 영주님! 구, 구원병은 정녕 없는 겁니까?”
누군가의 물음에 갑옷을 입은 사내가 고개를 끄덕인다.
“구원병은 없다. 우리 힘으로 막아내지 못하면 모두가 죽는다. 가라! 가서 하나라도 더 죽여라. 그게 살길이다.”
말을 마친 영주라는 자는 성벽 위를 뛰어다니며 몬스터들을 공격하려다 위험에 빠진 이들을 구하고 있다.
그런 그의 다리에선 선혈이 배어나고 있다. 몬스터에 의해 입은 상처인 듯싶다.
“모두 공격하라, 공격하라!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 자랑스런 쉴론의 병사들이여 공격하라! 공격하라!”
“와아아아! 와아아아! 공격! 공격!”
영주의 고함에 힘이라도 얻었는지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몬스터들에게 공격을 퍼붓는다.
케엑! 꾸웨엑! 케에엑! 꿰엑!
수많은 몬스터가 성벽 아래로 추락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바로 밑에 있던 수많은 녀석이 또 기어오른다.
반지의 제왕이란 영화를 보면 수많은 오크가 성을 공격하는 장면이 있다.
‘두 개의 탑’이란 에피소드에 나오는 헬름 협곡에서 벌어지는 전투장면이 한 예이다.
오크들로 이루어진 사우론의 군대는 갑옷과 방패, 그리고 투구과 장창까지 갖추고 있다. 기형도를 가진 놈도 있고, 쇠뇌까지 갖춰진 거의 완전한 군대였다.
게다가 사다리와 충차 같은 공성무기 또한 가졌다.
이들을 맞이한 것은 로한의 군대와 아라곤 일행이다.
첫날의 전투는 빗속에서 치러진다. 날씨는 춥고, 시야 또한 좋지 않다.
그러던 중 외성이 붕괴되었고,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진다.
레골라스가 방패를 스케이트보드 타듯 계단을 딛고 내려가며 활을 쏘는 명장면이 여기에서 나온다.
엄청난 피해를 입은 채 내성으로 몸을 피한 인간들은 수많은 오크를 맞이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하지만 성문이 뚫려 버리는 상황을 맞이한다.
어린아이와 노약자들은 겁에 질려 벌벌 떨었고, 병사들의 사기는 급락했다. 도주할 길을 찾았지만 없었다.
가만히 있다간 전멸 당함을 알기에 로한과 아라곤 일행은 병사들을 이끌고 과감히 오크들을 헤치고 나아간다.
하지만 그들을 에워싼 것은 수많은 오크들!
무한 체력을 갖지 않은 이상 목숨을 잃게 될 것은 자명한 상황이다.
이때 협곡 위쪽에 한 인물이 나타난다.
백마법사 간달프!
약속했던 대로 구원군을 이끌고 나타난 것이다.
구원군들이 협곡의 위에서 아래로 말을 타고 내려올 때 오크들은 장창을 앞세워 기병에 대응하여 했다.
누가 봐도 기병들의 막대한 피해가 우려되던 바로 그 순간 태양이 떠올랐고, 오크들은 환한 빛에 놀라 창을 거둬들인다.
다음 순간, 구원병들에 의한 천참만륙이 시작되었다.
이 장면에서 하나 아쉬운 점은 마법사인 간달프가 마법은 쓰지 않고 스태프로 오크들을 후려 팼다는 것이다.
이곳의 상황은 에피소드 두 개의 탑의 전투 5일차 아침과 다름없다.
오크들이 무장하지 않았다는 것과 외성이 파괴되지 않았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내성은 없고 인간들은 병사보다는 일반인이 월등히 많다. 따라서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전멸할 일만 남아 있다.
“플라이!”
일련의 상황을 모두 파악한 현수는 곧장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하지만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는 중인지라 어느 누구도 하늘 위에 사람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현수는 오크들이 우글거리는 곳을 노려보며 나직이 입술을 달싹였다.
“헬 파이어!”
고오오오오오―! 쿠와아아아아앙―!
시뻘건 화염이 오크들이 밀집해 있는 곳을 직격한다.
“헬 파이어!”
쉬이이이잉―! 콰아아아아앙―!
또 다른 곳에 떨어진 화염은 한 떼의 놀을 한꺼번에 구워 버렸다.
“헬 파이어!”
고오오오오―! 쿠와아아아아앙―!
또 한 떼의 오크가 불길에 휩싸여 몸부림친다.
작렬하듯 떨어지는 불길에 놀란 몬스터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춘다. 본능적으로 불을 무서워하기 때문이다.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성벽 위의 사람들은 입을 딱 벌린 채 멍한 표정이다.
너무도 어마어마한 화염에 넋을 잃은 것이다.
몬스터들도 마찬가지이다. 하던 공격을 멈춘 채 세 곳에서 솟아난 화염에 시선을 주고 있다.
그 순간 화염의 뜨거움이 사방으로 번진다.
화아아아아아악∼!
주변 나무들의 잎사귀가 누렇게 변하는가 싶더니 화르르 타오른다. 곧이어 줄기마저 화염에 휩싸인다.
가공할 만한 화기가 스친 때문이다.
헬 파이어 범위 바로 밖에 있던 몬스터들은 단숨에 살이 익기라도 했는지 발버둥 치다 쓰러진다.
“……!”
그토록 시끄럽던 전장이 일순간에 고요 속으로 빠져든다. 인간은 물론이고 몬스터들까지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한다.
입만 벙긋해도 신벌이 내릴 것이라 여긴 듯하다.
이 순간 성벽 밖 허공에 떠 있는 현수에게 시선을 준 이가 있다.
“아! 저기 저 하늘을 봐! 사람이 떠 있어.”
모두의 시선이 하늘로 향할 때 현수는 분위기 파악 못하고 다시금 공격을 시도하려는 오거와 미노타우르스가 있는 곳을 노려보고 있다.
“헬 파이어!”
고오오오―! 콰아아아앙―!
끄웨엑! 케에엑! 꾸와아악!
덩치 큰 오거와 미노타우르스인지라 단숨에 내장까지 익지는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발버둥 몇 번으로 끝이다.
그리고 시뻘건 화염이 놈들의 사체를 뒤덮어 버린다. 이 순간 놀란 몬스터들이 일제히 도주하기 시작한다.
“와아아아! 몬스터들이 도망간다!”
“와아! 우리가 이겼다. 이겼어!”
“마법사님 만세! 만세! 만세!”
병사와 영지민들이 일제히 환성을 울릴 때 영주라 불리던 자의 입술이 달싹인다.
“세상에 맙소사……! 어떻게 이런 일이……!”
수많은 사람이 그토록 막아내고자 애를 써도 되지 않던 일이 불과 몇 분 만에 정리되었다.
성벽 밖 어디에도 살아서 움직이는 생명체가 없다. 불타고 있거나 내장까지 홀랑 익어버린 것들뿐이다.
움직일 수 있는 놈들은 다 도망간 것이다.
현수는 확실히 간달프와 다르다.
간달프는 많은 구원병이 있어야 전투를 할 수 있었지만 현수는 단신으로 모든 걸 정리해 버렸다.
잠시 허공에 멈춘 채 사방을 둘러본 현수는 천천히 날아 성벽 위로 다가갔다.
“아아! 저희를 위기로부터 구원해 주신 분이시여! 누구신지 신분을 알려주시옵소서.”
현수에게 소리친 이는 이 성의 주인이다.
심각한 다리 부상을 입어 제대로 서 있을 수 없는지 한 무릎을 구부린 채 묻고 있다. 그러고 보니 선혈도 흘린다.
“컴플리트 힐!”
샤르르르릉―!
서늘한 푸른빛 마나가 스며들자 흐르던 피가 멈추고 곧바로 상처가 아물기 시작한다.
하지만 영주는 자세를 바꾸지 않고 바라만 보고 있다. 자신의 물음에 대답해 달라는 뜻이다.
“나는 이실리프 마탑의 마탑주! 너희를 구원하러 왔다.”
“……! 아아! 로드시여. 감사하나이다. 정말 감사하옵나이다. 오늘의 이 은혜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영주는 너무도 감격하여 눈물까지 흘린다. 오늘 이곳에서 목숨을 잃을 것이라 생각했다.
휘하 기사들은 아내와 아이들을 피신시키자고 했지만 거절했다. 영지민들과 생사를 같이 하리라 마음먹었던 것이다.
몇 안 되는 상당히 괜찮은 귀족이다.
“자네는 누구인가?”
“소인은 이곳 쉴론 영지의 타일러 자작이옵니다. 로드!”
“부상자들을 한 곳으로 모으라. 치료해야 하니.”
“네, 로드!”
말을 마친 타일러 자작이 시선을 돌리자 휘하 기사가 뜻을 알았다는 듯 군례를 올리곤 후다닥 사라진다.
“몬스터들의 공격은 언제부터였나?”
“오늘이 나흘째이옵니다.”
“구원병도 없는데 잘 버텼군.”
“영지민들이 잘 협조하여 잘 버텼습니다. 로드!”
이 말은 진심이다. 영주가 제 살길을 찾아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버텨내려 한다는 것이 알려지자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원하여 성벽에 올라 공격에 가담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