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901화 (900/1,307)

# 901

걔들 입장에선 동족들을 무자비하게 베어버린 원수이기 때문일 것이다.

“드래곤 피어!”

피이이이이이이이잉∼!

인간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초음파가 몬스터 무리를 향해 쏘아져 간다. 이건 다른 마탑엔 없고 오로지 이실리프 마탑에만 존재하는 마법 중 하나이다.

“……! 케엑! 케에에에에에엑―!”

가까이 있었기에 마법의 영향을 먼저 받은 놈이 펄쩍 튀어 오른다. 그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력 질주하여 멀어져간다.

공포감이 뇌리를 지배하자 본능적으로 도주하는 것이다. 곧이어 나머지 몬스터도 대경실색하며 도망친다.

이 순간 이놈들의 뇌리엔 현수가 너무도 무서운 드래곤 그 자체로 인식되고 있다.

몬스터들이 물러가고 난 자리엔 수없이 많은 사체가 널브러져 있다. 보아하니 농토였던 곳이다.

이 상태라면 올해 농사 꽝이다.

“아라아니! 정령들 불러서 여기 작업 좀 해.”

“어떤 작업이요?”

“먼저 오크, 트롤, 오거, 미노타우르스, 사이클롭스의 가죽을 모두 벗겨. 트롤은 선혈을 받아놓고. 나머지 것들은 힘줄과 뼈를 분리해.”

“인간들이 거두는 걸 남겨놓으란 말씀이시죠? 그럼, 그리고 난 나머지는 어떻게 해요?”

“모두 적당한 깊이로 묻어. 농작물의 양분이 되도록!”

“네에, 알겠어요.”

아리아니에게 지시를 내리고 성으로 다가갔다.

어느새 영지민들이 바깥까지 영접 나와 있다. 이들의 선두엔 머리가 허연 귀족이 있다. 투핸드 소드를 쓰는 모양이다.

전투에 지친 모습이긴 하지만 행동을 제약할 큰 부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다.

“어서 오십시오. 마스터! 에드몬드 지안 반 루이체가 마스터께 예를 올립니다.”

말을 마치곤 한 무릎을 꿇고는 왼 주먹을 오른 가슴에 대는 기사의 예를 갖춘다.

“자네 작위는?”

“백작이옵니다. 마스터!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너무 늦게 당도한 건 아닌가?”

“…많은 희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때 늦지는 않으신 겁니다. 남은 인원도 꽤 되니까요.”

백작은 눈물이 나려는 걸 억지로 참는 모양이다.

뒤에서는 보이지 않을 것이니 이쯤 되면 모르는 척해 줘야 한다. 백작 체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네! 와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영지 전체를 대표하여 다시 한 번 깊은 감사의 예를 올립니다.”

이번엔 두 무릎을 모두 꿇고 고개를 숙인다. 기사로서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할 때에도 이렇게 하진 않았다.

뒤에 있던 기사와 병사들은 물론이고 모든 영지민까지 마치 파도 타듯 무릎 꿇고 고개 숙인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타났기에 너무도 고마운 때문이다.

그런데 백작의 무릎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현수가 당도하기 직전에 두 아들 모두 오크에게 당한 때문이다.

큰 아들은 녹슨 도끼에 당했고, 작은 아들은 복부가 갈라져 창자가 쏟아져 나왔다. 이 밖에 자잘한 상처도 많다. 주교급 대신관이 당도하지 않는 한 치유불가능한 부상이다.

불행히도 이곳엔 신전이 없다. 따라서 숨만 붙어 있는 두 아들 모두 곧 죽을 것이다.

“부상자가 있나?”

“…네!”

“가지.”

“모시겠습니다.”

백작은 부상당해 신음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현수를 데리고 갔다. 아들들은 회복 불가능하다 판단한 때문이다.

팔다리가 베인 자도 있고, 물어뜯긴 자도 많다.

몬스터의 발톱에 할큄을 당해 살점 떨어진 자들도 있고, 오거가 휘두른 몽둥이에 가격당해 뼈가 부러진 자도 다수이다.

아예 어깨부터 팔이 떨어져 나간 사람도 많다.

“매스 컴플리트 힐!”

샤르르르르르릉―!

서늘한 마나가 부상자들에게 스며들자 출혈은 멈췄고, 벌어진 상처는 서서히 아물기 시작한다. 병사들이 뭐라 입을 열기 전에 현수의 입술이 먼저 달싹였다.

[아리아니!]

[네, 주인님!]

[엘리디아 불러서 부상자들 치료하라 해줄래?]

[네에, 주인님!]

아리아니가 물러간 후 현수는 두 번의 컴플리트 힐을 더 시전해 주었다. 부상으로 인한 고통 때문에 신음하던 병사들 모두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신관이 와도 고개를 흔들 정도로 심한 상처를 입었었는데 단숨에 말끔해졌기 때문이다.

“백작! 부상자가 또 있나?”

“…제 아이들을 봐주십시오.”

눈앞에서 펼쳐지는 기적을 지켜만 보던 백작이다. 그런데 희망이 생겨 그런지 다급한 표정이다.

“가지.”

“네! 이쪽으로…….”

백작이 안내한 곳에 당도하니 널빤지 위에 두 사내가 누워 있다.

혼절해 있는데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현수는 작은 아들의 창자가 배밖에 늘어져 있음을 보았다. 상처도 있고, 이동하는 동안 흙먼지가 묻은 상태이다.

“워싱! 클린! 워싱! 클린! 매직 핸드!”

닦아낸 창자를 뱃속으로 밀어 넣었다. 다음은 큰 아들의 어깨에 박힌 녹슨 도끼를 뽑아냈다.

기다렸다는 듯 피가 뿜어져 나온다. 출혈이 잦아들자 지저분한 상처가 보인다.

“워싱! 클린!”

이번에도 상처 부위를 닦아냈다. 둘 다 실혈을 많이 해서 안색이 창백하다.

“컴플리트 힐! 컴플리트 힐!”

샤르르르릉―!

서늘한 마나가 체내로 스며들자 상처가 급격하게 아문다.

매스 컴플리트 힐은 한꺼번에 여러 사람을 치료할 수 있지만 아무는 속도가 더디다. 반면 지금처럼 개별적으로 마법이 구현되면 속도가 빠른 것이다.

“마나 디텍션!”

상처 아무는 모습을 지켜본 현수는 둘의 체내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둘 다 소드 익스퍼트 중급이다.

분전(奮戰) 과정에서 기혈이 역류한 상태였다. 여기에 심각한 상처까지 입어 경각지경이었던 것이다.

“아공간 오픈!”

마나 포션을 꺼냈다. 그리곤 각기 반병씩을 복용시켰다.

백작은 숨소리조차 죽이고 일련의 과정을 보고 있다. 눈앞의 존재가 말로만 듣던 이실리프 마탑주라는 걸 안 것이다.

“리커버리! 리커버리!”

둘에게 각각 치유마법을 걸어주었다. 심각한 부상으로 죽을 위기에 몰렸던 것이 복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스톨레 마을의 늙은 마법사 실리이만은 마나 포션과 리커버리 마법만으로 서클이 올랐을 뿐만 아니라 바디 체인지까지 겪는 기연을 만났다.

지안 백작의 두 아들은 심각했던 부상으로부터 말끔해짐은 물론이고, 중급에서 상급으로 오르게 될 것이다. 마나가 부족하여 오를 수 없던 경지이기 때문이다.

둘의 혈색이 돌아오고 숨소리마저 고르게 변하자 백작은 다시 한 번 무릎을 꿇는다.

“아아! 로드이시며 마스터시여! 정말, 정말 감사하옵니다.”

포기했던 아들 모두 죽음으로부터 벗어났으니 당연한 일이다.

“자네 가문에 독문 마나 수련법이 있는가?”

“네……? 그렇습니다. 루이체 수련법이라는 것으로 조상으로부터 전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가져오게.”

“네……? 아, 네에.”

말을 마친 백작은 두말 않고 밖으로 튀어 나간다. 상대는 하늘보다도 높은 그랜드 마스터이시다.

자신이 가진 마나 수련법 따위는 거저 줘도 거들떠보지 않을 위치에 있다. 그럼에도 그걸 가져오라 함은 기연을 내려주시려는 것이다. 그렇기에 눈썹이 휘날리게 달려갔다.

“흐음! 이 정도면 괜찮아졌으니 곧 깨어나겠군.”

현수의 말이 떨어지길 기다렸다는 듯 둘의 눈이 떠진다.

“끄응……! 여긴……! 지옥인가?”

“끄으응! 형님, 로테한 형님이십니까?”

“왈로드, 너도 죽은 거냐?”

“네, 형님이 당하는 걸 보고 구하려 했는데 오크가 휘두른 칼에 배가 갈라졌지요.”

둘은 뻥 뚫린 하늘을 보며 대화한다. 죽어서 천국 또는 지옥에 온 것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여긴 지옥이겠지?”

“…천국은 아닌 거 같습니다. 우리가 몬스터들을 꽤 많이 죽였잖습니까.”

“살아서 네게 못되게 군 게 있으면 용서해라.”

“아닙니다. 형님! 형님은 늘 좋은 형님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살아계시겠지?”

“그래야지요.”

여전히 둘의 시선은 뚫려 버린 지붕 위의 어슴프레한 하늘에 고정되어 있다.

“내가 영주가 되면 너와 사이좋게 지내면서 좋은 영주가 되고 싶었는데. 이렇게 죽었구나.”

“저도 형님을 잘 보필했으면 했는데 죽었네요. 그래도 한 가지는 다행입니다.”

“뭐가?”

“지옥이지만 형님과 함께해서요.”

“…고맙구나.”

둘은 잠시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았다. 죽은 마당에 시시콜콜 이야기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런데 형님! 왜 저승사자가 안 오죠?”

“글쎄? 오더라도 천천히 왔으면 좋겠다. 너랑 헤어지게 될 수도 있으니까.”

참으로 우애 좋은 형제였던 것 같다.

현수는 문득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외아들로 태어났기에 형도 없고, 동생도 없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들의 대화를 끊고 싶은 마음이 없기에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렇게 5분 즈음 지났을 때이다.

삐이꺽―!

“헉헉! 헉헉! 여, 여기 있습니다. 마스터!”

헐레벌떡 달려든 이는 지안 백작이다.

그가 건넨 건 얇은 동판 세 장이다. 첫 장엔 아르센 공용어로 쓰인 루이체 마나 수련법이란 글씨가 있다.

현수가 이것에 시선을 줄 때 누워 있던 로테한이 몸을 일으킨다. 부상이 말끔하게 치료되었으니 당연히 아프지 않다.

“아버지……?”

로테한의 음성에 놀란 듯 왈로드 또한 소리친다.

“형님! 아버지도 돌아가신 거예요? 어라! 아버지.”

몸을 일으킨 왈로드가 지안 백작을 바라본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본 아버지의 모습은 피로 범벅이었다.

기사와 병사들이 몬스터들에게 당하면서 뿜어진 것과 직접 죽인 몬스터들로부터 묻은 것, 그리고 본인이 입은 소소한 상처에서 흘린 피 때문이다.

하여 몰골이 엉망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걸치고 있는 갑옷은 자체에서 빛이라도 내는 듯 반짝거린다.

자신들도 심각한 부상을 입었었지만 지금은 멀쩡하지 않은가! 그렇기에 부친도 목숨을 잃은 것으로 여겨진다.

“아버지! 아버지도 돌아가신 거예요?”

“어휴∼! 그럼 어머니는 어떻게 해요? 아무도 못 보살펴 드리는데.”

두 아들의 느닷없는 말에 백작은 눈만 끔벅인다.

“살아 있는 동안 효도하지 못해서 죄송해요. 아버지!”

“저도요! 늘 아버지 마음에 드는 아들이고 싶었는데 못 그랬던 거 같아요. 죄송해요. 그리고 사랑해요.”

“……!”

백작은 두 아들의 심리상태를 알지 못한다. 하여 이게 대체 무슨 영문인가 싶어 입을 열지 않았다.

“근데 아버진 왜 여기로 오신 거예요? 아버진 좋은 영주셨잖아요. 영지민들을 자식처럼 아끼셨으니 천국으로 가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맞아요! 우리 영지는 세율도 낮고, 물건값도 비싸지 않았잖아요. 영지민들 착취도 안 했구요.”

“저승사자가 오면 저희가 항의할 게요.”

백작은 두 아들이 어떤 상태인지를 깨달았다.

“너희 둘 다 죽은 거라 생각하니?”

“그럼 아니에요? 형님은 도끼에 찍혔고, 저는 창자가 다 삐져나왔었는데요.”

죽었으니까 멀쩡한 거라는 의견이다.

“너희는 죽지 않았으니 이제 그만 일어나라. 그리고 이분께 공손히 예를 갖춰라.”

부친의 시선을 따라 시선을 돌린 둘은 동판에 시선을 주고 있는 젊은 청년을 볼 수 있었다.

“이 친구는 누구…….”

큰 아들의 말은 중간에 끊겼다.

“어허! 이 친구라니……. 무엄하구나.”

“네? 그게 무슨……?”

“예를 갖춰라. 이실리프 마탑주이시자 위저드 로드이시며, 그랜드 마스터이신 분이시다.”

“헉……! 네에?”

“아, 아버지 방금 하신 말 진짜예요?”

『전능의 팔찌』 38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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