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2
1장 자네, 결혼해 보겠는가?
“로드,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너무도 크나큰 은혜를 입었사옵니다. 언제 어디서든 불러주시기만 하면 만사 제치고 명에 따르겠 사옵니다. 이 시각 이후 저희 지안 가문은 로드께 충성을 맹세드리옵니다.”
에드몬드 지안 반 루이체 백작의 허리가 깊숙이 숙여진다.
“로테한 지안 반 루이체 역시 부친의 뜻에 동의하옵니다.”
“저 왈로드 지안 반 루이체 또한 동의하옵니다.”
삼부자의 충성 맹세를 받은 현수는 고개만 끄덕였다. 이곳은 미판테 왕국이고 이들은 이 왕국의 귀족이다.
보아하니 영지민을 아끼는 정말 보기 드문 영주인 듯싶다. 이들이 제 허울을 벗어버리고 이실리프 왕국으로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곳엔 귀족이라는 계급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처럼 인연 맺기를 청하고 있으니 딱한 마음이 든다. 사내끼리이니 혼약을 맺을 수도 없다.
그러던 중 작은아들 왈로드에게 시선이 미친다.
스물두세 살로 보이는데 아주 잘생겼다. 전성기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정도 되는 외모이다.
하나뿐인 형과의 우애도 좋고 성품도 괜찮아 보인다. 아비에게 효도하는 걸 보면 아주 잘 성장한 인재인 것 같다.
“왈로드는 혼인을 했는가?”
“네? 혼인은 아직…….”
왈로드는 아직 20대 초반이지만 소드 익스퍼트 중급에 이르러 있다. 검에 대한 재능도 뛰어나지만 노력도 많이 했다는 뜻이다.
아울러 전도가 양양하다는 뜻도 된다. 아무튼 수련에 미쳐 있었기에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게 이해된다.
비슷한 나이로 라이사가 있다.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4년간 치욕을 당했다는 과거를 빼고 나면 아주 조신한 아가씨이다.
남작의 딸로 태어나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다.
재수없는 일만 벌어지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느 귀족의 사랑을 독차지했을 아름다운 미녀이다.
외모뿐만 아니라 애교도 있고 영리하기 때문이다.
“이제 곧 소문이 번지겠지만 나는 파이렛 군도를 장악했다. 그간 해적질을 하던 자들은 모두 노예가 되었지.”
“아……!”
아르센 대륙의 어느 국가도 파이렛 군도의 해적들을 어쩌지 못했다. 연합하여 토벌하려 했지만 해적들이 먼저 각개 격파하는 바람에 막대한 피해만 입고 흐지부지되었다.
그때 이후 각 나라는 해적에 대한 각별한 주의만 기울일 뿐 그들을 징치하려는 움직임이 없다.
불가능한 일로 치부해 놓은 때문이다.
하지만 이실리프 마탑주라면 사정이 다르다.
10서클 마스터에 그랜드 마스터이기도 하다. 혼자서도 해적쯤은 싹쓸이할 능력이 있다.
그렇기에 현수의 말에 토 달지 않고 고개만 끄덕인다.
“이제 곧 파이렛 군도는 이실리프 군도로 명칭이 바뀔 것이며, 나는 그 섬들로 이루어진 이실리프 왕국의 초대 국왕이 될 생각이다.”
“아! 그러십니까?”
백작은 감탄했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끄덕인다.
“내 나라에 라이사라는 아가씨가 있다. 남작의 딸이다. 왈로드와 좋은 인연이 될 것 같은데, 어떤가? 마음이 있나?”
현수의 말에 대답한 이는 백작이다.
“…로드께서 점지해 주시니 두말 않고 받아들이겠습니다.”
“백작이 아니라 왈로드에게 물었네. 결혼은 백작이 하는 게 아니지 않는가.”
“……!”
백작이 머쓱한 표정을 지을 때 왈로드가 입을 연다.
“소인, 평생토록 검의 길을 걸으려 합니다. 여인이 많으면 제 길이 순탄치 못할 수 있어 평생 한 여인만 보고 살려 했습니다. 그러니 한번 만나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러지. 좋은 생각이네.”
현수는 자신 있게 본인의 뜻을 피력하는 왈로드가 마음에 들었다.
“백작, 내가 왈로드를 데리고 가도 되겠는가?”
“아이고, 그럼요! 얼마든지 그러십시오.”
“좋네. 오늘은 할 일이 있어 이만 가야겠네.”
“로드께서 베풀어주신 하해와 같은 은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현수는 백작이 가져온 동판의 루이체 마나 수련법 중 불합리하고 비효율적이던 부분을 고쳐주었다.
지안 가문에겐 천금과도 같은 조언이 되었다. 그렇기에 이토록 황송해하는 것이다.
“그걸 수정해 준 이유는 남과의 다툼에서 우위를 점하라는 뜻이 아니네.”
“……!”
백작과 두 아들은 현수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이곳은 지형상 몬스터의 내습이 많은 곳이네. 힘을 키워 영지민의 무고한 희생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는 뜻이라는 걸 명심하게.”
“물론이옵니다. 대대손손 로드께서 주신 고언을 명심토록 노력, 또 노력하겠습니다.”
백작과 두 아들이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왈로드는 준비를 하고 오라. 옷만 준비하면 된다.”
“네, 로드.”
왈로드가 짐을 싸러 나간 사이 현수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밖은 어느새 진한 어둠이 엄습해 있다. 하여 여기저기 횃불이 켜져 있다.
몬스터들의 습격을 견뎌낸 영지민들은 많은 희생자가 있었음에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죽은 자는 죽었으니 그만이지만, 산 자는 살아 있으니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그렇기에 부서진 집을 보수하고 엉망이 된 가재도구들을 거두고 있다.
밤이라 하여 쉴 수가 없는 것이다.
다른 한쪽에선 병사들이 커다란 가마솥에 물을 끓이고 있다. 그 주변에도 작은 솥들이 줄지어 있다.
현수가 준 라면을 끓이려는 것이다.
창고에 곡식이 있다지만 성한 가재도구가 거의 없으니 음식을 만들 수 없기에 꺼내준 것이다.
이곳 사람들에겐 다소 매운 맛이겠지만 어쩌겠는가!
굶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현수는 라면 이외에도 계란을 수북이 꺼내주었다.
매운 맛을 저감시킬 식재료이며, 이곳 사람들에게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해 주기 위해서이다.
백작은 아낌없이 베푸는 현수를 따라다니면서 많은 것을 보고 들으며 느꼈다.
영지민은 귀족의 수발을 들고, 귀족을 위해 농사지으며, 귀족을 위해 수공품을 만들어내고, 귀족을 위해 세금을 바치기 위해 존재한다고 여기는 게 보통의 귀족이다.
백작은 돈에 대해 큰 욕심 부리지 않았다.
하여 다른 영지에 비해 수탈의 정도는 현저하게 덜했지만 그럼에도 얼마나 힘들었을지 느껴졌다. 형편없는 가재도구와 조악한 살림살이를 보고 느낀 것이다.
서로 협력하며 일하는 모습을 보곤 이들에게도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으며, 의리가 있고, 서로 간에 애정이 있다는 걸 새삼 깨우칠 수 있었다.
덕분에 루이체 영지는 많은 것이 바뀌게 될 것이다. 사람이 사람대접을 받으며 사는 사람 냄새 나는 영지가 된다.
“준비 다 했습니다, 로드!”
급하게 짐을 꾸려온 왈로드는 자기 덩치만큼 큰 보따리를 들고 있다. 본인의 의복 전부를 챙겨온 듯싶다.
“…가지.”
“네, 로드!”
“백작, 잘 있게.”
“네, 안녕히 가십시오. 위대하신 로드를 또 뵈올 날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도 그러길 바라네. 텔레포트!”
샤르르르르릉―!
현수의 신형이 사라졌지만 백작은 한참 동안 고개를 들지 않았다. 곁에 서 있는 로테한도 마찬가지이다.
불과 몇 시간의 방문이었지만 현수가 남긴 족적이 워낙 거대하기에 감사의 뜻을 표하는 중이다.
이때 누군가 황급히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영주님! 영주님! 헉헉! 영주님! 어디에 계십니까? 헉헉!”
“여기다!”
“아, 거기 계시군요! 헉헉!”
황급히 다가온 기사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군례를 올리곤 고개를 든다.
“아발론, 긴급히 보고할 사항이라도 있나?”
“네, 영주님. 밖에 나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밖에? 어디에? 무슨 일이라고 있어?”
“네, 성문 밖에 마스터께서 남기신 것이 있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린 백작은 기사의 뒤를 따라 성문 밖으로 나가 보았다. 거기엔 뭔가가 수북하게 쌓여 있다.
어둠이 진해졌는지라 한눈에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저건 뭔가?”
“이쪽에 쌓여 있는 건 오크 가죽입니다. 저건 트롤 가죽이고 그 옆에 있는 건 오거와 미노타우르스의 가죽입니다. 마지막으로 저건 사이클롭스의 가죽입니다.”
“뭐, 뭐라고?”
작은 동산만큼 수북한 것 전부가 몬스터들의 가죽이라니 놀랍다는 표정이다. 엄청난 가치를 지닌 것이기 때문이다.
“영주님, 이쪽에 있는 건 트롤의 피고, 나머지는 힘줄과 뼈, 그리고 이빨과 발톱 등 몬스터의 부산물입니다.”
아발론의 보고를 받은 백작이 입을 연다.
“횃불을 가져오게.”
“네, 영주님.”
산더미처럼 쌓인 것은 쓰레기가 아니다.
오히려 영지 발전에 꼭 필요한 자금으로 환전될 수 있는 가치 있는 것들이다.
“아아! 로드께서 우리 영지에 너무나 큰 것을 주셨구나.”
“……!”
백작을 비롯한 일동 전부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마음속으로나마 감사의 뜻을 표하는 중이다.
이걸 처분하면 이번 몬스터 습격으로 인한 손실 전부를 만회하고도 남을 것이다.
“아발론, 희생자 명단을 작성해서 보고하라.”
“네?”
“신분에 관계없이 희생자 전원 확인하라. 그 과정에서 일체의 어떤 위압적인 행동도 해선 안 될 것이다.”
“네, 명을 받드옵니다.”
아발론은 더 따질 것 없다는 듯 부동자세를 취한다.
하늘같은 영주의 명이 떨어졌으면 기사는 그대로 이행하기만 하면 된다.
“다시 말하지만 평민, 농노, 노예 가릴 것 없이 정확한 희생자 명단이 작성되어야 할 것이다. 애, 어른도 가리지 말라. 그리고 조사하는 동안 그 가족에게 알려라. 희생자 1인당 10골드씩 보상금이 지급될 것이라고.”
“헉! 10골드나요?”
발론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10골드면 평민 가정이 1년간 놀고먹어도 될 돈이기 때문이다.
“희생자들의 시신은 한곳에 안장될 것이며, 오늘을 기억하여 내년부터는 그들에 대한 추모식을 가질 것이다.”
“네, 영주님!”
뭔지는 모르지만 영주가 달라졌다는 느낌에 아발론은 얼굴이 상기되는 느낌이다. 기분 좋은 흥분이 느껴진 것이다.
* * *
“어서 오십시오.”
현수와 왈로드가 나타나자 기다렸다는 듯 스트마르크 백작이 허리를 꺾는다.
“해밀턴 일당은? 잡았는가?”
“죄송합니다. 놈들은 파미르 산을 넘어 아드리안 공국으로 넘어가 버렸습니다. 거긴 우리의 군사가 넘을 수 없는 곳이기에…….”
“……!”
현수가 대꾸하지 않자 백작은 몹시 송구스럽다는 표정이다. 그러더니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서류를 집어 든다.
“다만 놈들이 아드리안 공국 노예상인과 거래한 증빙은 찾아냈습니다.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특상품 거래명세서가 있습니다.”
백작이 건넨 서류를 읽어보니 지난해 연말에 특상품 여자 노예 한 명을 거래하고 200골드를 받았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여자 노예의 가격은 얼마나 하나?”
“영지마다 약간씩 다르지만 젊은 여자 노예의 경우 상품은 30골드, 중품 20골드, 하품 10골드에 거래됩니다.”
“흐음! 그래?”
작년 4월에 현수는 여자 노예를 구입한 바 있다.
지금도 테세린에 있는 하인스 상단 본점에서 마법 수련을 하고 있을 로즈와 릴리이다. 로즈와 릴리는 베로스 왕국에서 반역의 죄를 뒤집어쓴 귀족의 딸이다.
로즈는 얼굴에 자상이 있다. 하여 본래의 미색이 예쁘기는 하지만 중품에 해당된다.
그런 로즈를 매입할 때 현수는 30골드를 냈다.
21골드만 불러도 매입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세상을 떠난 유카리안 영지의 영주 데니스 백작의 색노로 팔려갈 듯싶어 과하게 불렀다.
따라서 200골드는 정말 특상품에 해당하는 가격이다.
그것도 최종 구매자에게 넘긴 가격이 아니라 노예상인이 매입한 가격이다.
따라서 실제로 팔릴 땐 그보다 훨씬 더 비쌀 것이다.
“해밀턴 일당은 내게 죄를 지은 자들이다. 이 영지로 넘어오는 즉시 체포 후 구금하도록.”
“알겠습니다, 로드!”
“그런데 그들이 어디로 스며들었는지 확인이 안 되는가?”
“네! 다른 노예사냥꾼들을 취조해 보았습니다만 각각이 다니는 길이 다르다 하옵니다. 하여 어떤 루트로 어디까지 갔는지 확인이 불가능한 상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