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3
“끄으응!”
표정을 보아하니 백작은 최선을 다한 듯싶다.
“죄송합니다, 로드!”
“알겠네. 수고했네.”
“…죄송합니다.”
“나는 네로판 영지로 갈 것이네. 급한 곳을 알려주게.”
현수는 스톨레 마을과 쉴론 영지, 그리고 루이체 영지에 있을 때 마나로 라세안을 불렀다. 하지만 반응이 없었다.
상당히 먼 거리에 있다는 뜻이므로 조금 더 내려가 볼 생각이다.
“여기 호마린 영지 또한 위태로울 것입니다.”
백작의 말이 끝나자 하인스에게 시선을 주었다.
“하인스, 이곳에 대해 아나?”
“아뇨. 거기는 잘…….”
하인스의 말은 이어질 수 없었다. 왈로드가 끼어든 때문이다.
“로드, 그곳도 몬스터의 내습이 많은 곳입니다.”
현수가 시선을 주자 스트마르크 백작은 대체 누구냐는 표정이다. 이를 눈치챈 왈로드가 먼저 입을 연다.
“루이체 영지의 차남 왈로드가 스트마르크 백작님께 인사 여쭙습니다.”
“아! 지안 백작의 차남이군. 반갑네. 영지는 어떤가?”
왈로드는 대답 전에 현수를 힐끔 바라본다. 말해도 되느냐는 뜻이다. 이때 현수는 아리아니와 대화 중이다.
[아리아니, 호마린 영지 좌표 확인했어?]
[잠시만요. 잠시만요. 아! 이제 왔네요. 331ATY269QZR―OYB5CCK1973Y―31XP244ERL2라네요.]
현수는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왈로드의 입이 열리며 현수의 활약상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바로 그 순간 현수의 입술이 달싹였다.
“텔레포트!”
샤르르르릉―!
“그래서 마스터께서 길이 20m짜리 검강을 뽑아내시니까… 헉! 마스터!”
“호마린 영지로 가신 모양이네. 다시 오실 것이니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하게.”
“마스터께서 검을 한번 휘두르자 반경 20m는 온통 오크들의 사체로 널려 버렸지요.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허리가 베어져…….”
왈로드의 이야기에 스트마르크 백작과 시종장 도널드, 그리고 하인스와 실비아는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
한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음이다.
같은 순간 현수는 호마린 영지 상공에 나타났다. 이때 무언가가 머리 위로 날아간다.
퀘에에엑! 퀘에엑! 꾸어어억! 꾸아아악!
“뭐야, 이건? 그리핀?”
반은 사자이고 반은 독수리인 이 녀석은 사나운 육식 조류이다. 깊은 산속에 살며 페가수스나 유니콘을 주로 잡아먹는다. 그런데 사람들이 사는 곳에 나타났다.
이놈들의 목적지는 성벽 위에서 활을 쏘고 있는 병사들인 듯 쾌속하게 날아 발톱으로 움켜쥐려 한다.
횃불을 밝혀놓았는지라 병사들의 모습이 아주 잘 보인다.
반면 그리핀들은 아직 어둠 속에 있다. 놔두면 병사들이 당할 상황이다.
“매직 미사일!”
현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십여 개의 굵은 창이 그리핀의 뒤를 쫓는다. 훨씬 속력이 빠르기에 둘 사이의 거리는 점점 좁혀지고 있다.
쐐에에에에엑! 슈아아앙―! 쎄에에에엥―!
그 순간 몬스터의 괴성이 울려 퍼진다.
꿰에꿰에! 꿰에에에엑―!
먹이를 노리고 날아가던 그리핀들이 일제히 뒤를 돌아보더니 황급히 비행 방향을 바꾼다.
자신들을 노리는 굵은 창을 피하기 위함이다. 방금 전의 괴성은 위험을 알리는 신호였던 것이다.
어두운 밤이건만 몬스터라 그런지 잘도 피한다.
그래 봤자 소용이 없다. 매직 미사일은 계속해서 놈들의 꽁무니를 향해 쏜살처럼 쏘아져 간다.
당황한 녀석들은 전속력으로 날갯짓을 하며 피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깃털이 뽑히며 허공을 수놓고 있다.
평상시엔 하나라도 빠질까 싶어 애지중지하던 깃털이지만 목숨이 경각에 달하자 그따위 것은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꾸아아악! 꾸아아아아아악!
또 다른 종류의 괴성에 시선을 돌려보니 와이번이다. 드레이크와 더불어 가장 강한 몬스터로 분류되는 놈이다.
숫자는 대략 20여 마리이다. 이 녀석들 역시 병사들을 먹잇감으로 여기고 쏘아 가는 중이다.
몇몇 녀석의 주둥이엔 시뻘건 선혈이 묻어 있다. 벌써 여럿을 잡아먹었음을 의미한다.
“아리아니! 데이오의 징벌 꺼내줘!”
“네, 주인님!”
아리아니는 이제 아공간을 관장하는 집사가 되었다. 현수가 아리아니에게 언제든 아공간을 열고 꺼낼 수 있도록 마법적 권한을 부여한 결과이다.
현수는 손에 잡히는 폼멜 그립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시퍼런 검강이 뿜어진다.
지이이잉! 지이이이잉!
길이 20m의 검강은 솟아남과 동시에 허공을 찢었다.
쐐에에에엑―!
퍼석―!
꾸와아아아아악―!
한쪽 발목을 잃은 와이번이 고통에 찬 괴성을 질러댄다. 초록색 핏물이 뿜어지고 있지만 현수에겐 묻지 않는다.
어느새 나타난 엘리디아가 사전에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발목이 잘린 와이번이 균형을 잃고 빙글빙글 돌며 떨어질 때 현수의 입술이 달싹인다.
“매직 아이스 스피어!”
쐐에에에에에엑―!
어른 팔목 굵기 정도 되는 얼음창 열두 자루가 병사들을 노리고 하강하는 와이번의 꽁무니를 향해 발사되었다. 가히 섬전의 속도인지라 거리가 급속하게 줄어든다.
이 순간 창공으로부터 또 다른 괴성이 울려 퍼진다.
꾸아아! 꾸아아아악―!
이것이 경고음이었는지 하강하던 와이번들이 일제 솟아오르며 괴상한 소리를 지른다.
꿰엑! 꾸에에엑! 꽈아악!
와이번 역시 꽁무니를 쫓아오는 얼음창들을 피하려 애를 쓴다. 갖가지 비행 기술이 총동원되고 있지만 별무소용이다.
현수가 와이번을 상대하는 동안 필사적으로 회피 기동을 하던 그리핀 중 상당수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도주하는 중이다. 매직 미사일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꽁무니에 박힌 굵은 창으로 인한 엄청난 통증은 놈들로 하여금 전속력으로 도주하게 만들었다.
한 번도 당해보지 않은 것이기에 견딜 수 없어 전속력으로 날갯짓을 한다.
그러면 통증이 줄어들 것이라 믿는 모양이다.
꿰에에엑! 꿰에에에엑―!
얼음창이 박힌 와이번 또한 괴성을 질러댄다. 너무도 괴로워 방향감각마저 잃었는지 성벽을 들이받는 놈도 있다.
쿠와아앙―! 와르르르르!
“아앗! 성벽이 무너진다.”
“모두 집결! 성벽이 무너졌다! 집결하라!”
와이번의 거대한 덩치가 무너지는 성벽 아래로 떨어지자 공격하던 오크들이 일제히 물러난다.
자신들을 잡아먹는 포식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러서는 것은 잠시였다. 와이번이 성벽과 충돌할 때 혼절한 때문이다.
아무리 무서운 존재라도 움직임이 없으면 겁날 게 없다. 오크들은 와이번이 죽은 것으로 여긴 듯하다. 그렇기에 그 거대한 덩치를 짓밟으며 오크들이 몰려든다.
흘깃 바라보니 안쪽에 영주성이 따로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의 성벽은 외성처럼 단단하지도 못하고 높지도 않다.
오크들의 난입은 어느 정도 저지할 수 있지만 오거나 트롤의 경우는 충분히 넘을 수 있는 높이이다.
어쨌거나 기사와 병사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몰려드는 오크들을 막으려 한다. 이때 성벽 안쪽의 비교적 높은 곳에 있던 기사가 궁병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발사하라! 발사하라.”
“소영주님! 안 됩니다! 앞에 아군이 있습니다!”
“…모두 후퇴하라! 후퇴하라! 내성으로 집결하라!”
퇴각 명령이 떨어지자 기사와 병사 모두 뒤로 물러선다. 때는 이때다 싶었는지 오크들이 무리 지어 안으로 들어간다.
퇴각이 질서정연하지 못하면 피해를 키우는 법이다.
그렇기에 물러서면서도 오크들의 접근을 적극적으로 막는 모습이다.
그러는 동안 성내로 들어선 오크의 숫자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현재의 병사들이 막아내기에도 벅찬데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시선을 돌려보니 그리핀들은 필사적으로 날갯짓을 하며 회피 기동을 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동작이 굼뜬 와이번의 경우는 저마다 얼음창 하나씩 박은 채 괴성을 지른다.
고통과 더불어 냉기가 엄습한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인간을 공격할 여력이 없다.
성벽 바로 바깥쪽에 내려선 현수는 데이오의 징벌로 공간을 찢어발겼다.
쐐에에에에에엑―!
퍼퍽! 퍼퍼퍼퍼퍽! 퍼퍼퍼퍼퍼퍽!
꿰엑! 꾸에에엑! 취잇! 컥! 커컥!
현수를 중심으로 반경 20m 이내에 있던 모든 오크의 허리가 베어졌다. 바닥은 반분된 사체로부터 쏟아져 나온 피로 흥건하다.
몰려들던 오크들이 주춤거리는 사이 성 안쪽으로 이동한 현수는 또 한 번 검을 휘둘렀다.
쉐에엑!
퍼퍼퍼퍽! 퍼퍼퍼퍼퍽! 퍼퍼퍼퍼퍼퍼퍽!
털썩! 우당탕! 쿠웅! 와당탕! 콰당!
오크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진다.
“와아아! 구원군이 왔다! 구원군이 왔어!”
“와아아아! 살았다! 이젠 살았어!”
“모두 힘내라! 구원군이 당도했다! 마지막까지 막아내자!”
사방을 뒤덮은 어둠 때문에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사납게 공격을 가하던 오크들이 일제히 움찔거리며 물러서는 것만 느꼈을 뿐이다.
구원군이 당도하여 오크들의 배후를 공격하지 않았다면 이런 반응이 있을 리 없다. 그렇기에 이런 소리를 한 것이다.
“드래곤 피어!”
고오오오오오∼!
오크들은 일제히 움찔거리더니 바들바들 떤다. 일부는 소변을 지렸고 생똥을 싸는 놈들도 있다.
감당 불가한 위압적인 존재가 코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자 도주할 생각조차 못한 채 공포에 떨고 있는 것이다.
성 밖에 있는 놈들은 드래곤 피어 마법이 구현되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산지사방으로 튄다. 도망치는 것만이 목숨을 부지할 유일한 수단이라 여긴 것이다.
“야아압!”
쐐에에에엑―!
또 한 번 데이오의 징벌이 휘둘러졌다. 그 즉시 오크들의 사체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길이 20m짜리 검강이 몬스터들의 허리를 베어내는 장면을 목격한 누군가가 소리쳤다.
“소드 마스터께서, 아니, 그랜드 마스터께서 우릴 구원하러 오셨다! 그랜드 마스터님이시다!”
“뭐? 그, 그랜드 마스터?”
병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린다. 이때 현수의 음성이 모두의 고막을 때린다.
“정신 차려라! 몬스터들은 아직 물러가지 않았다! 베어라! 너와 네 가족의 안전을 위하여!”
“와아아아! 공격하라! 공격하라!”
“모두 검을 들고 오크들을 몰아내자! 와아아아아아!”
사기충천한 인간들이 달려들자 겁에 질려 벌벌 떨던 오크들은 변변한 반항 한번 못해보고 죽어갔다.
2장 그랜드 마스터 처음 봐?
모든 오크가 물러가자 갑옷을 입은 두 인물이 황급히 뛰어온다. 그리곤 곧바로 현수에게 군례를 올린다.
“호마린 영지의 소영주 스미든 코린 반 호마린이 그랜드 마스터님을 뵈옵니다.”
“기사단장 케이몬 아덴이 위대하신 분을 알현하옵니다.”
“고생 많았다. 부상자부터 한곳으로 모아라.”
“충! 명을 받드옵니다.”
고개를 끄덕인 케이몬이 황급히 물러난다. 그랜드 마스터의 명에 따르기 위함이다.
“스미든이라 했나?”
“네, 마스터!”
현수의 부름에 큰 소리로 대답한 자는 갓 스물쯤 된 당당한 체격의 사내이다.
“이곳의 영주는 누구이며 왜 지휘하지 않았나?”
“아버님은 에드워드 코린 반 호마린 자작입니다. 현재 병환 중에 있어 운신이 어려운 상황이라 제가 지휘했습니다.”
“흐음, 그런가? 아까는 왜 후퇴를 명했는가? 조직적이지 못하면 피해가 클 수 있음을 몰랐나?”
“그건… 죄송합니다. 제가 경험이 일천하여…….”
“소영주라 하였으니 한마디 충고하지. 지휘하는 자는 명령이 떨어진 후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를 고려해야 한다. 그릇된 명령을 내리면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발생할 확률이 매우 높다.”
“……!”
소영주는 할 말이 없는 듯 고개를 숙인다.
“영주가 되고 싶으면 더 공부하도록. 미숙한 자가 영주가 되는 건 재앙이나 마찬가지이니.”
“명심하겠습니다.”
스미든은 고개를 더욱 숙일 수밖에 없었다.
“영주가 병환 중에 있다고?”
“네! 영지 시찰을 나가셨다가 낙마하는 바람에……. 신관을 불렀지만 몬스터 러시 때문에 오지 못한답니다.”
“영주는 어디에 있는가?”
현수의 물음에 스미든은 고개를 번쩍 든다.
그랜드 마스터에겐 범인이 가지지 못한 능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