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4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러지.”
스미든의 안내를 받아 간 곳엔 40대 초반으로 여겨지는 사내가 누워 있다.
이렇게 있는 시간이 길었는지 악취가 풍긴다.
욕창 때문일 것이다. 이곳 사람들에겐 별 냄새가 아닐 수 있으나 지구인인 현수에겐 토악질이 나올 정도의 악취이다.
“에어 퓨리파잉!”
공기 정화 마법으로 일단 냄새를 잠재웠다. 그리곤 환자를 엎어보았다. 척추 골절이다.
그것도 척추 운동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배요부 골절이다.
낙마한 뒤 침상에 눕혀놓고 적절한 치료를 하지 못한 상태이다. 하여 골절 부위가 주변의 정상 조직에 2차적 손실을 끼치고 있는 상황이다.
그냥 놔두면 하반신 마비보다도 욕창으로 인한 패혈증으로 사망할 확률이 높다.
“아공간 오픈!”
아공간부터 열어 대거 한 자루를 꺼냈다. 그리곤 거침없이 영주의 의복을 갈라냈다.
서걱, 서걱, 서걱!
스미든은 자신의 앞에서 아공간이 열리는 순간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고위 마법사만이 시전할 수 있다는 아공간을 처음 보기 때문이다.
“흐음! 욕창이 많군.”
이번에 꺼낸 건 과산화수소이다. 일단 상처 소독부터 하려는 것이다.
치이이익! 치이이이이익―!
욕창 부위에 과산화수소를 붓자 하얀 기포가 일어나며 나지막한 소리가 난다.
과산화수소(H202)는 물(H20)보다 산소가 하나 더 많다.
이것이 상처에 접하게 되면 물보다 하나 더 많은 산소가 세균 속으로 침투한다.
참고로 세균은 단백질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게 세균 속으로 들어간 산소는 세균과 반응해서 분해시켜 버린다. 따라서 거품이 일어난다는 것은 세균이 많아서 과산화수소의 산소가 격렬하게 반응한다는 뜻이다.
환자는 통증 때문에 혼절한 상태인지 미동도 없다.
현수는 아공간에서 피침을 꺼내 들었다.
이것은 외과 수술 시 사용되는 매스처럼 종기나 피부의 상처에 생긴 부분을 잘라낼 때 쓴다.
덕항산에서 마법 수련을 하다 서울에 올라와 한의학 서적을 살 때 함께 구입한 것이다.
피침을 살균시킨 후 욕창 부위를 조심스럽게 긁어냈다.
“흐음! 되었군.”
자리에서 일어난 현수는 아직 처리하지 않은 곳이 있는지 확인하곤 나직이 중얼거렸다.
“컴플리트 힐!”
샤르르르르릉―!
마나가 스며들자 상처 부위가 급속도로 아문다. 스미든은 눈만 크게 뜬 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다.
“리커버리!”
샤르르르르릉―!
또 한 번 마나가 스며든다. 이번 것은 골절된 척추를 원상태로 되돌리는 작용을 하고 있다.
“끄으으으응!”
오 분쯤 지난 후 나직한 신음을 토하며 눈을 뜬 에드워드는 아들의 얼굴이 보이자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스미든, 나 괜찮은 거냐?”
자신이 말에서 떨어졌다는 것을 잊지 않은 모양이다.
“네, 아버지! 낙마하셨지만 지금은 괜찮으실 거예요.”
“끄응! 그래? 그럼 나 좀 일으켜 다오.”
“네!”
스미든이 등을 받치자 에드워드는 어렵지 않게 일어나 앉는다. 이때서야 현수를 발견한 듯 눈을 크게 뜬다.
“이 청년은 누구냐?”
“이분은 아버지를 치료해 주신 분이에요. 그랜드 마스터이시고요.”
“뭐? 그, 그랜드 마스터?”
이 와중에도 놀랄 건 다 놀란다.
“네, 영지가 위급한 상황이었는데 이분 덕분에 괜찮아졌어요. 아버지가 다치셨다고 하니까 치료도 해주셨구요. 아무래도 이실리프 마탑주이신 거 같아요.”
“헉! 이, 이실리프 마탑주님? 지, 진짜이십니까?”
에드워드의 눈이 대번에 커진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네. 흐음, 몸은 괜찮을 것이니 일어서게, 자작.”
“네? 아, 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에드워드는 곧바로 무릎을 꿇는다. 스미든 역시 찍소리 않고 그 곁에 엎드린다.
“위대하신 마탑주님을 알현하옵니다.”
“그래. 한데 소영주가 차기 영주가 되려면 교육이 더 필요한 듯싶네. 그래서 내가 데려가려는데 괜찮겠는가?”
“네? 아! 그, 그럼요. 그렇게 하십시오.”
에드워드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히 왜 그러느냐고 물을 정신도 없다. 한편, 스미든은 느닷없는 제안에 이게 대체 무슨 영문인가 하는 표정이다.
마탑주가 자신을 왜 원하는지 알 수 없다. 제자를 삼으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검에 대한 자질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마법은 익힐 수 없는 몸이라는 판정을 이미 받았다.
하여 고개를 갸웃거린다.
현수가 이런 제의를 한 까닭은 스미든이 전형적인 귀족가의 자제라 판단된 때문이다.
기사와 병사들 역시 본인과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는 듯하다. 게다가 경솔한 판단으로 많은 인명 피해를 야기할 뻔했다. 그런데 그 이후의 행동은 보면 멍청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매우 영리한 두뇌를 가진 듯하다.
이실리프 군도에 데려다 이런저런 것을 가르친 뒤 부려먹으면서 경험을 쌓게 하면 괜찮을 듯싶어 이런 제안을 한 것이다. 인재가 많이 필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때 누군가 다가온다.
쿵, 쿵, 쿵, 쿵! 척―!
“부상자 전원 집합시켰습니다, 소영주님!”
달려온 기사의 시선은 스미든에게 향해 있지만 대꾸는 현수가 한다.
“어딘가?”
기사를 따라 너른 연무장에 당도해 보니 부상자들이 부지기수로 누워 있다. 몬스터로부터 직접적인 피해를 보지 않은 영지에서 보내온 지원병들이 상당수였기 때문이다.
현수는 부상병들이 있는 곳을 한 바퀴 휘돌았다.
[아리아니, 엘리디아 불러서 치료시켜 줘.]
[네, 주인님!]
잠시 후, 엘리디아가 부상병 주위를 휩쓸고 지나가니 흐르던 피는 멈추고 찢긴 상처는 봉합되었다.
부러졌던 팔과 다리는 원상으로 회복되었고, 심한 고통을 호소하던 병사의 입에서 신음이 멈췄다.
현수가 지나친 곳에서 일어난 현상이다.
“세상에……!”
에드워드 자작과 스미든의 눈에는 물의 최상급 정령 엘리디아가 보이지 않는다. 정령 친화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눈엔 부상병들 앞에서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현수만 보일 뿐이다. 눈여겨 바라보니 현수는 입술조차 달싹이지 않고 있다.
그런데 수많은 부상병이 완쾌되고 있다.
이런 게 기적이 아니라면 무엇이 기적이겠는가!
둘은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위대한 인물이 펼치는 기적으로 인한 경외감이 오금의 힘을 빼버린 탓이다.
일련의 일들이 있고 난 후 영주는 현수를 붙잡았다.
음식을 준비할 터이니 먹고 가라는 것이다. 이를 거절하자 차 한 잔은 어떠냐고 한다. 이것 역시 거절하자 낙담한 표정이다. 오늘 이 영지엔 전설 같은 인물이 방문했다.
그와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가졌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다.
잠시 혼자 있게 된 현수는 라세안을 여러 번 불렀다.
소리 내어 부르는 것이 아니다. 대기의 마나에 의지를 실어 멀리멀리 보내는 것이다.
그런데 반응이 없다. 하여 스미든을 데리고 스트마르크 영지로 텔레포트했다.
이미 깊은 밤인지라 모두가 잠들어 있었지만 백작과 도널드, 그리고 하인스와 실비아, 마지막으로 왈로드만은 깨어 있었다.
현수가 되돌아올 걸 알기 때문이다.
잠시 후 모두들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현수만은 그러지 않았다. 좋은 방을 내어주었지만 밤새 이 영지 저 영지를 돌아다니며 몬스터들을 퇴치해야 했기 때문이다.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에도 같은 일을 반복했다. 라수스 협곡이 결코 좁은 지역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 안에 엄청난 몬스터가 살고 있었다는 것만은 충분히 인식되었다.
그러는 동안 미판테 왕국엔 이실리프 마탑주에 대한 소문이 요원의 들불처럼 번졌다.
소문이란 과장되게 마련이다.
그렇기에 결국엔 신(神)과 동급이 되고 말았다. 드래곤 따위는 얼마든지 찜쪄먹을 존재로 알려진 것이다.
“라세안! 라세안! 어디에 있나?”
현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한 번 마나에 의지를 실어 보냈다. 이곳은 스트마르크 영지로부터 무려 500㎞나 남쪽에 있는 자그마한 영지이다.
조금 전 현수는 이 영지에 난입하여 사람들을 잡아먹던 한 떼의 웨어울프를 도륙했다.
자작인 영주에게 물어보니 죽은 자의 수효가 무려 13,000여 명이라 한다. 그런데 온전한 시신이 별로 없다.
굶주린 웨어울프들이 뜯어먹은 때문이다.
목불인견(目不忍見)이라는 말이 있다.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거나 안타까운 모습을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이다. 또한 너무나 어이가 없어 참고 볼 수 없는 아니꼬운 모습을 가리킬 때에도 쓴다.
현수는 차마 눈에 담을 수 없는 광경을 너무나 많이 보았다. 웨어울프들이 파먹은 시신의 모습이 너무도 참혹했다. 하여 무자비한 마법을 난사했다.
매스 윈드 커터로 웨어울프들을 난자했다. 그와 동시에 라이트닝 퍼니쉬먼트까지 구현시켰다.
사람들을 사냥하여 파티를 열고 있던 웨어울프들은 느닷없는 매스 윈드 커터에 갈가리 찢겼다. 그리고 무리 전체에 어마어마한 벼락이 선사되었다.
1㎡당 최하 스무 번 이상의 벼락이 연속해서 내리꽂혔다.
생명을 가진 것이라면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목숨을 잃을 정도로 강력한 마법이다.
이것은 9서클 궁극 마법이다.
땅이 갈라지면서 용암이 솟구치는 파이어 퍼니쉬먼트도 9서클 궁극 마법이다.
이 밖에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땅 속으로부터 폭포수 같은 물이 뿜어지는 아쿠아 퍼니쉬먼트도 있다.
또한 사방에서 살을 에는 날카로운 폭풍우가 몰아치는 윈드 퍼니쉬먼트도 있다.
마지막으로 미티어 스크라이크도 있다. 하늘로부터 운석의 비가 쏟아져 지상의 모든 생물을 말살시키는 것이다.
분노한 현수에 의해 웨어울프들은 단 한 마리도 온전한 형태로 최후를 맞이할 수 없었다.
갈가리 찢긴 육편은 수없이 명멸한 벼락에 의해 노릇하게 구워지거나 시커먼 재가 되었다.
약 30,000마리에 달하는 웨어울프를 맞이하여 지난 4일간 사투를 벌이던 사람들은 마침내 무너지고 만 성벽 위에서 눈을 크게 뜨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늘에 떠 있는 사람의 손끝에서 시작된 무시무시한 마법을 보고 어찌 평온할 수 있겠는가!
이들은 가족, 이웃, 친지 등을 잃고 이를 악문 채 검을 휘두르고, 창을 찔렀으며, 돌을 던진 사람들이다.
더 이상의 근력이 없어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순간 혜성처럼 나타난 마법사는 자신들의 원수를 처참하게 찢어서 죽였다. 그리고 번개로 굽기까지 했다.
너무도 통쾌했다.
이들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아롱져 흘러내렸다.
웨어울프에게 희생된 아버지, 남편, 형, 동생, 아저씨 등등의 죽음이 새삼스러운 때문이다.
현수는 정령들을 불러 몬스터 사체를 정리토록 했다.
그냥 놔두면 부패가 시작되면서 심한 악취를 뿜을 것이다.
이것은 영지민들로 하여금 또 다른 고통을 겪게 하는 일이다. 아울러 전염병 발생도 우려된다.
하여 적당히 썩혀 땅 속에 묻도록 한 것이다.
생존한 인원은 그리 많지 않았다. 몬스터의 습격이 시작되자 가장 먼저 병사들이 희생되었고 다음은 기사들이다.
영주의 세 아들도 목숨을 잃었고, 영주 본인 역시 옆구리에 큰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아들을 잃은 분노로 제 몸을 돌보지 못한 때문이다.
부상자들을 치료해 주면서 살펴보니 이 영지의 남녀 성비는 1 : 8 정도 된다. 사내들은 거의 모두 죽은 것이다.
기껏 치료해 주었더니 늙은 영주는 더 이상 세상을 살아갈 의욕이 없다면서 스스로 목숨을 끓었다.
졸지에 영주가 없는 영지가 되었다.
현수는 잠시 영주를 대리하였다. 먼저 창고를 열어 양곡을 풀었다. 몬스터들과 싸우느라 꼬박 하루 동안 아무것도 입에 넣지 못한 영지민들을 위한 조치였다.
그러는 동안 무엇을 바라는지 물어보았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몬스터 없는 안전한 세상이었다. 영주의 명령을 빌미로 한 행정관들의 수탈이 아니었다.
후자는 어떻게 하든 견뎌낼 수 있다. 수확한 곡식을 모두 빼앗겨도 산속의 나물과 시냇물의 작은 물고기들로 연명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게 없어도 나무껍질만 얻을 수 있으면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