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5
하지만 몬스터의 습격은 영주의 수탈과는 비교할 수 없다. 잡히면 죽는다. 다시 말해 미래를 생각할 수조차 없다.
이 영지는 라수스 협곡에 인접해 있다. 하여 평상시에도 수시로 피해를 입고 있었다.
기존엔 오크 무리가 해를 끼쳤는데 최근에는 웨어울프로 바뀌었다. 오크 무리가 모두 잡아먹힌 결과이다.
그날 이후 피해는 더 커졌다. 오크보다 웨어울프들이 더 조직적인 사냥꾼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놈들의 대규모 공격에 이 영지는 거의 끝장이 났다. 현수가 10분만 늦게 당도했어도 이루어질 일이다.
하지만 10서클 마스터인 현수가 나타난 후 현장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제 배를 채우기 위해 영지민들을 향해 매섭게 달려들던 웨어울프들은 몰살을 당했다.
매스 윈드 커터가 아니라 9서클 궁극 마법인 라이트닝 퍼니쉬먼트의 결과이다.
아무튼 상황이 종료된 이후 현수는 라수스 협곡으로 들어가 보았다.
웨어울프 말고도 많은 몬스터가 서식하고 있는데 먹이가 변변하지 못하다.
게다가 이 영지는 작은 협곡의 출구에 자리 잡고 있다. 지형적인 불리함을 안고 태어난 영지인 셈이다.
살아남은 사람의 수효를 확인해 보니 남자 3,000여 명에 여자 25,000여 명이다.
남자 가운데 3분의 2 정도가 어린아이와 노인이다. 이 영지는 노동력을 거의 모두 잃은 상태인 것이다.
성벽은 너무도 많이 무너져 처음부터 다시 쌓아올려야 할 지경이고, 뭉개진 농토는 올해 농사가 끝이라는 뜻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현수가 떠난 뒤 몬스터들이 한 번이라도 몰려들면 대책이 없는 곳이다.
현수는 잠시 이맛살을 찌푸렸다. 몰랐으면 상관없지만 일단 개입했기 때문이다.
시선을 돌려보니 아비 잃은 어린아이들은 현수가 나눠 준 막대사탕을 입에 물고 환히 웃고 있다. 처음 맛보는 단맛에 마치 영혼이라도 잃은 듯 천진난만한 모습이다. 그런데 이대로 놔두면 거의 모두 아사하게 될 것이다.
“끄으응!”
나직한 침음을 내곤 본래 이곳을 찾은 목적을 되새겼다. 그리곤 마나에 의지를 실어 멀리멀리 보내보았다.
수십 차례나 같은 행위를 반복했지만 지금껏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렇기에 별 기대 않은 행위였다.
“라세안! 라세안! 어디에 있나?”
잠시 틈을 두곤 다시 한 번 보냈다. 이번에도 반응이 없으면 조금 더 남하해 볼 생각이다.
“라세안! 라세안! 어디에 있나? 나 하인스이네, 라세안!”
현수는 무너진 성벽 위에서 1분 정도를 기다려 보았다. 그래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더 내려가 봐야 하나?”
나직이 중얼거리곤 돌아섰다. 이때 등 위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렸다.
“마법사님, 저, 정말 고마워요.”
“누구……?”
현수의 앞에는 스무 살쯤 된 통통한 여인이 서 있다. 구불구불한 금발에는 지푸라기가 잔뜩 묻어 있다.
“저는 세실리아라고 해요. 돌아가신 영주님의 하나밖에 없는 외손녀지요.”
‘또 세실리아야? 하긴 가장 흔한 이름이라 했으니.’
현수가 살짝 고개를 끄덕일 때 세실리아의 말이 이어졌다.
이야길 들어보니 죽은 영주의 하나뿐인 피붙이이다.
영주와 그 일가는 물론이고 기사와 병사 모두가 죽었고 행정관들도 죽어 본인이 나섰다고 한다.
세실리아는 이 영지가 너무도 피폐해졌으나 재건할 방법을 모르니 도와달라고 했다.
모든 이야기를 듣고는 또 한 번 이맛살을 좁혔다. 어찌해야 할지 생각을 정리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흐으음!”
“……!”
세실리아는 더 이상의 말 없이 현수만 바라보았다.
그가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마법사란 뛰어난 두뇌를 가진 사람이다. 그렇기에 묘책이 나올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현수의 첫마디는 다음과 같았다.
“내가 보기에 이 영지는 희망이 없소.”
“아!”
너무도 큰 피해를 입었기에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세실리아는 휘청거렸다. 정곡을 찔린 때문이다.
“하여 한 가지 제안을 하려 하오.”
“…말씀하세요.”
“알고 있겠지만 이 영지는 몬스터들의 습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곳에 조성되었소.”
“맞아요. 이곳은 몬스터 해비탯(Monster habitat)이라 불리는 곳이니까요.”
죽은 자작은 인근 후작가의 방계 혈통을 이었다.
자작의 6대 조상은 후작의 차남이었다. 작위를 이어받을 수 없기에 일찌감치 독립을 선언하고 이곳을 개척했다.
그때 이곳은 각종 몬스터의 서식지였다. 이들을 밀어내고 성벽을 쌓아 독립했던 것이다.
국가 입장에서 보면 영토가 확장된 것이나 다름없다. 하여 자작위를 수여 받게 되었다.
이곳의 초대 영주는 과감한 정책을 펼쳤다.
타 영지에 비해 확연히 낮은 세율을 적용한 것이다. 예상대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오늘날에 이르렀다.
몬스터들의 습격 때문에 늘 불안했지만 영주의 수탈이 적었기에 살기엔 편한 영지라는 평가였다.
그런데 오늘 회복 불가능한 피해를 입었다.
노동력이라도 풍부하다면 마지막으로 어떻게 해보려 하겠으나 이미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왕국 남단에서 배를 타고 남하하면…….”
“마법사님, 그곳엔 파이렛 군도가 있다고 들었어요. 거긴 해적들의 영토예요.”
세실리아는 말을 끊으며 더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말한다.
“해적들은 모두 소탕되었고, 파이렛 군도는 이실리프 군도라 불리오.”
“네? 이, 이실리프 군도요? 그럼 이실리프 마탑에서……?”
처음 듣는 말이라는 표정으로 조심스레 반문한다.
“맞소. 그곳은 이제 이실리프 왕국이오.”
“아……!”
세실리아가 낮은 탄성을 낸다. 마법사들이 몰려가 해적들을 모조리 죽여 없애는 장면을 상상한 것이다.
“그곳이라면 여기보다 훨씬 안전하오. 이곳 사람들이 원하기만 하면 전부 이주시켜 주겠소.”
“저, 전부 말씀이십니까?”
“그러하오. 그러니 영지민들의 뜻을 물어봐 주시오.”
“어, 언제까지면 되는지요?”
세실리아는 말을 더듬으며 가늘게 몸을 떤다. 지긋지긋한 이곳으로부터 떠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때문일 것이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소.”
“아, 알았어요. 금, 금방 다녀올게요.”
세실리아가 자리를 뜬 후 현수는 적당한 공터를 찾았다. 대규모 텔레포트 마법진을 그려야 하기 때문이다.
상당히 많은 인원을 안전하게 보내야 하기 때문에 크기도 커야 하지만 세심한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가급적 바닥이 편평해야 한다. 그런데 적당한 곳이 없다. 그러다 기사들의 연무장에 당도했다. 넓기는 한데 울퉁불퉁하다.
“아리아니, 노에디아 불러서 이 앞의 땅을 편평하게 만들라고 해.”
“네, 주인님!”
잠시 후 연무장은 유리판처럼 편평해졌다. 현수가 마법진을 모두 그렸을 때 세실리아가 왔다.
“저… 마법사님, 진짜 저희 모두를 그곳으로 보내주실 수 있는 거예요?”
영지민에게 말을 전했을 때 많은 사람이 우려를 표했다. 자칫 성품 괴팍한 마법사의 실험 재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실리아는 그 말에 동조하지 않았다.
위기에 빠진 영지를 구해준 현수를 선한 마법사로 분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실리아를 힐끔 바라본 현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다 가겠다 하오?”
“네, 갈 수만 있다면요.”
“그럼 짐을 싸서 모두 이 앞으로 오라고 하시오. 여기 그려놓은 마법진은 밟으면 안 되오.”
“그, 그래요?”
“나는 잠시 다녀올 곳이 있소. 텔레포트!”
샤르르르르릉―!
현수의 신형이 사라지자 세실리아는 멍한 표정이다. 이런 마법이 있다는 이야긴 들어보았지만 사람이 안개처럼 스르르 흩어지는 건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서 있던 세실리아는 후다닥 어디론가 달려갔다.
현수가 당도한 곳은 이실리프 왕국의 중심지가 될 코리아도이다. 이곳엔 해적 가운데 가장 강한 세력을 이끌던 애꾸눈 잭의 성채가 있다.
섬의 중심부 언덕 위에 지어진 것으로 규모는 제법 크지만 미적 감각과는 거리가 먼 석조 성이다.
현수는 애꾸눈 잭이 침실로 사용하던 방에 있다.
“하리먼! 하리먼! 성으로 오라!”
마나에 의지를 실어 뜻을 전했다.
잠시 후, 4서클 마법사 하리먼이 헐레벌떡 뛰어온다. 마침 가까운 곳에 있었나 보다.
“로, 로드! 헉헉! 어, 어서 오십시오! 헉헉!”
“그래, 별일 없지?”
“네, 일이 너무 많아서 진척이 늦은 것을 빼고 나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사람들을 데려올 것이네. 당도하면 머물 곳을 마련해 주고 본인들이 원하는 일을 하도록 배려해 주게.”
“…알겠습니다. 한데 인원은 얼마나 되는지요?”
“사내는 3,000여 명이네.”
“아, 그래요? 정말 잘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일손이 많이 달리던 차입니다.”
“그런데 3분의 2 정도가 어린아이와 노인이네.”
“아……!”
하리먼은 당황한 듯한 표정이다. 노동력이 없다면 짐이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의 말이 이어졌다.
“여자는 25,000여 명이네.”
“아! 정말이요?”
하리먼의 눈이 대번에 커진다. 이곳 이실리프 왕국은 남녀 성비가 불균형한 곳이다. 남자는 많지만 여자의 수효가 적다.
그렇기에 툭하면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해적 모두가 노예가 된 이후에도 그런 일은 계속되었다.
본능과 관련된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한꺼번에 25,000여 명이나 온다면 그런 문제점이 단숨에 해소될 것이다.
그렇기에 하리먼은 환한 웃음을 짓는다. 골치 아픈 일 하나가 해결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몬스터에 의해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니 당분간은 잘 다독여야 할 것이네.”
“알겠습니다, 로드.”
대화를 마친 현수는 적당한 장소를 찾아 대규모 텔레포트 마법진을 그려두었다. 많은 인원이 안정적으로 이동해야 하기에 이번에도 공들여 그렸다.
그리곤 다시 미판테 왕국으로 되돌아갔다.
“오셨어요?”
세실리아의 물음에 현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는 다 되었나?”
“아뇨, 아직……. 잠시만 시간을 주세요. 저희는…….”
세실리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영지민들은 이주를 위해 짐을 싸는 중이다. 빈손으로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일이 끝나고 나면 몬스터에 의해 목숨을 잃은 가족들을 위한 애도의 시간을 가질 예정이란다.
시신이 있으면 양지바른 곳에 매장하고, 그조차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은 한곳에 가묘를 조성하며, 나름대로 선정을 베풀던 영주와 그 일가를 위한 묘지도 만들어주고 떠나고 싶다는 것이다.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이야기이기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세실리아는 영주가 쓰던 침실로 현수를 안내했다. 그리곤 그곳에서 하루나 이틀만 묵어주길 청했다.
현수는 스트마르크 영지로 가서 백작의 아들인 왈로드와 실비아, 그리고 에드워드 코린 반 호마린 자작의 아들 스미든을 데리고 왔다.
다음엔 아드리안 공국 최남단에 위치한 콘트라로 향했다.
그곳의 파이젤 백작의 똘똘한 아들 피터와 그의 유모인 엠마 등을 데리고 왔다. 왠지 끌려서이다.
나중의 일이지만 피터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아 이냐시오 에델만 드 로이어와 더불어 최연소 소드 마스터가 된다.
3장 한참 찾았잖아요
“누구……? 아, 자기였어?”
영지민들이 짐 싸는 걸 기다리던 현수는 시간이 걸릴 것 같아 양평 저택으로 차원 이동했다.
도착 장소는 저택의 옥상이다.
한창호 건축사 사무소에 설계를 의뢰할 때 사람이 올라가기 힘든 첨탑 두 개를 넣어달라고 했다. 한남동에 있는 이슬람 사원의 그것과 유사한 것이다.
현수가 이런 디자인을 요청한 것엔 여러 이유가 있다. 그중 하나가 조금 전처럼 차원 이동을 할 때의 안전이다.
차원 이동, 또는 텔레포트를 하는 장소에 바위같이 단단한 물체가 존치되어 있을 경우 큰 상처를 입거나 목숨을 잃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