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8
물론 이 돈은 지불되지 않는다. 이실리프 의료원 설립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콩고민주공화국 정부에서 재빨리 국무회의를 하여 기증하기 때문이다.
“아! 이젠 나더러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간호조무사까지 만들어내라고?”
모든 이야기를 들은 주영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물러앉는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것이다.
“야, 누가 다 하래? 이준섭 전무 있잖아. 사람 전문으로 뽑는 이실리프 브레인 팀장! 지금껏 한 이야기를 이 전무에게 전하는 게 네 임무야. 네가 사람 구하는 게 아니고.”
“아, 그래? 난 또……!”
주영은 겸연쩍은 웃음을 짓는다. 지레짐작한 것이 머쓱했기 때문이다.
“으이그! 너 일 많은 거 내가 뻔히 아는데 아무렴 이 일까지 시키겠냐? 내가 없을 때 내 대신 지휘해야 하니까 알고 있으라고 한 이야기지.”
“알았다, 알았어.”
주영이 모처럼 환히 웃는다.
“조만간 우리 집에서 식사나 하자. 제수씨랑 같이 와라.”
“그래, 그럴게. 너 이사했는데 한 번도 못 가봤잖아.”
“오냐.”
* * *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태을제약 태정후 사장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일어선다.
“네, 오랜만에 뵙습니다.”
현수가 예를 갖추자 태 사장 또한 고개를 숙인다.
“여전히 보기 좋으십니다.”
“그런가요? 사장님도 좋아지신 듯합니다.”
“다 회장님 덕분이죠.”
태을제약 태정후 사장은 지분율이 23%에 불과하다.
이리냐가 37%, 이실리프 무역상사가 30%, 나머지 10%는 개미와 외국인 지분이다.
태을제약의 67%가 현수의 것인 셈이다.
“전에 주문한 백신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현수가 에티오피아 의무부로부터 주문 받은 말라리아와 콜레라, 그리고 홍역 백신 3,000만 명분에 대한 것이다.
태을제약 입장에서 보면 1년 매출총액 이상이다. 다시 말해 어마어마한 주문을 받은 것이다.
“아, 그거요? 거의 다 되었습니다. 이제 포장하여 발송만 하면 됩니다.”
태 사장은 큰일 하나를 해결해 냈다는 성취감이라도 느끼는지 약간 상기된 표정이다.
“다행이네요. 애쓰셨습니다. 참, 슈피리어 듀 닥터(Superior Dew Doctor)는 어찌 되었습니까? 만들어보니 효과가 있던가요?”
“잠깐만요.”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태 사장은 냉장고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리곤 인터컴을 누른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네, 사장님!”
비서 아가씨의 음성이다.
“이예원 이사, 내 방으로 오라고 해줘.”
“네, 사장님.”
통화를 마친 태 사장은 소파에 앉으면서 조심스레 상자를 개봉한다. 현수는 뭔가 싶어 바라만 보고 있다.
“이게 슈듀닥입니다.”
“슈듀닥이요?”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짓자 태 사장이 환히 웃는다.
“아, 슈피리어 듀 닥터를 저희는 그렇게 부른답니다. 이름이 좀 길어서요.”
“아! 슈듀닥! 근데 이거 임상을 해본 거죠?”
“그럼요.”
태 사장이 고개를 끄덕일 때 가벼운 노크 소리에 이어 문이 열린다.
“아! 어서 와요, 이 이사!”
“네, 사장님. 어머, 김 회장님 오셨군요. 호호, 반가워요.”
이예원 이사는 환히 웃으며 현수의 건너편 자리에 앉는다.
“이사로 진급하신 겁니까?”
“네, 회장님 덕분이에요. 고맙습니다.”
이 이사가 정중히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춘다. 실제로 현수 덕에 이사로 진급한 게 맞기 때문이다.
“……?”
진짜냐는 표정으로 태 사장을 바라보자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김 회장님이 처음 우리에게 연락하셨을 때 이 이사가 잘해서 오늘이 있는 거잖습니까.”
“아, 네.”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둘 다 웃는다. 서로가 기분 좋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슈듀닥 때문에 오신 거예요? 이거 정말 끝내줘요. 연구소 연구원들도 놀랐거든요.”
“그래요? 어떤 효능이 있던가요?”
“이걸 바르면 기미와 주근깨가 사라지고 눈가의 자글자글한 주름이 펴져요. 뾰루지나 여드름도 급격하게 호전되구요.”
“그래요?”
“뿐만 아니라 손상된 피부의 재생 속도가 빨라요.”
이예원 이사는 직접 시연해 보이려는 듯 슈듀닥의 뚜껑을 열곤 손가락으로 살짝 찍는다. 그리곤 태정후 사장에게 시선을 준다.
“에구, 또……?”
“사장님은 훌륭한 마루타시잖아요. 호호호!”
이 이사가 웃자 할 수 없다는 듯 태 사장이 손을 내민다.
“회장님, 여기 보이는 이게 검버섯이라는 거예요. 이건… 어머, 사장님. 이거 바르지 마시라고 했죠? 저 없을 때 몰래 바른 거예요?”
“…응.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쳇! 사장님은 마루타라고 했잖아요. 근데 집에서 다 발라서 없애 버리면 어떻게 해요? 효과가 눈에 확 띄어서 좋은데.”
이예원 이사가 하얗게 눈을 흘긴다.
태 사장의 검버섯은 손님들이 왔을 때 슈듀닥의 놀라온 효능을 보여주는 실험 재료로 딱 좋았다.
하여 절대 슈듀닥을 바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런데 며칠 사이에 상당히 많이 사라지고 없다.
“그, 그게… 지난 주말에 마누라 친구들이 와서……. 알았네. 이제 안 그러겠네.”
제 잘못을 시인한 태 사장은 허탈한 웃음을 짓는다. 자기 손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이제 그러지 마세요. 보세요. 이제 얼마 안 남았잖아요. 사장님을 빼곤 본사에 검버섯 있는 사람 없다는 거 아시잖아요.”
“그래그래, 알았다고.”
태 사장은 다소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손등의 검버섯 시연을 보여주면 손님들은 두말 않고 슈듀닥을 샀다. 이렇게 하여 상당히 비싼 가격이고 아직 정식 발매 전이지만 일부에겐 슈듀닥의 존재가 전해지는 중이다.
하여 슈듀닥에 대한 전권을 가진 이예원 이사는 사람들 없을 때면 룰루랄라 하며 즐거워한다. 내놓기만 하면 날개 돋친 듯 팔릴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태 사장을 슬쩍 째려본 이 이사는 현수에게 시선을 돌린다. 그리곤 아주 상냥한 미소를 짓는다.
오늘의 자신이 있게 한 결정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회장님, 이 검버섯은요…….”
잠시 설명이 이어졌다. 그러면서 슈듀닥을 찍어 태 사장의 손등에 펴 바른다. 그리곤 꼼짝도 하지 말라 하곤 그간의 임상에 대한 이야길 한다.
예상한 대로 트롤의 혈액과 디오나니아의 수액이 섞인 이것의 효능은 끝내줬다. 많이 희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처 치유 효과까지 있었다.
“자! 이제 보세요.”
대략 10분쯤 지난 후 태 사장의 손등에 있던 검버섯은 확연히 바르지 않은 것과 달랐다.
색깔이 많이 옅어진 것이다.
“이렇게 하루에 한 번씩 세 번만 바르면 검버섯이 모두 사라져요.”
검버섯은 휴면 세포의 일종이다. 그런데 슈듀닥과 접촉이 되면 다시 활성화되어 정상 세포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의 원료는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고가정책을 써도 충분히 먹힐 것 같다. 대주주로서 아주 즐거운 일이다.
“가실 때 차에 넣어드릴게요. 사모님 드리세요.”
“하하, 네.”
이 이사는 향후 판매에 대한 이야길 한다. 그러면서 슬쩍 지현을 모델로 쓰면 어떻겠느냐고 묻는다.
“제 아내요? 글쎄요? 공무원 신분인데 그게 가능한가요? 겸직이 금지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수의 말처럼 공무원은 현직에 있는 동안 원칙적으로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없다. 자신의 직무와 관련된 일이라면 영리를 추구하지 않는 겸직도 불법이다.
본직의 업무상 독립성이나 공정성이 훼손되거나 사익을 추구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무원이라고 사소한 영리까지 금지된 것은 아니다. 기관장의 허락이 있을 경우 허용되는 영리가 있다.
이 이사는 이에 대한 사전 조사를 마쳤는지 환히 웃으며 말을 잇는다.
“사모님의 아버님께서 고검장이시잖아요. 부친께서 기관장이시니 허락 받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
현수가 그런가 하는 표정일 때 이 이사의 말이 이어진다.
“가급적 전속 모델이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하면 허락 받는 게 쉽지 않을 테니 6개월 단발이면 어떨까 싶어요.”
“6개월이요?”
이 이사는 현수의 반문에 가능성이 있다 판단했는지 바싹 다가앉는다. 물론 환히 웃는 낯이다.
“사모님은 아마추어지만 프로로 대접해 드릴게요.”
“그건 아내와…….”
그냥 거절하는 것보다는 아내와 상의해 보겠다고 하려는데 이 이사가 다시 입을 연다.
“6개월 단발이에요. 촬영은 한 번만 하시면 되구요. 사모님께는 좋은 추억이 될 수도 있을 거예요. 네?”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긍정적인 대답을 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요청할 것 같다. 하여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알겠습니다. 아내와 상의해 보겠습니다.”
“호호! 네. 아마 사모님께서도 하시겠다고 할 거예요. 워낙 예쁘셔서 나오기만 하면 우리 슈듀닥 판매율이 확 올라갈 거라 저는 믿어요.”
이예원 이사는 자신의 말에 동조해 달라는 표정으로 태 사장을 바라본다.
“그, 그럼요! 사모님이 나오기만 하면 대박날 겁니다. 그건 틀림없습니다. 하하!”
“에구!”
현수는 뭐라 할 말이 없기에 나지막한 탄성만 냈다.
“참! 아르센의 공주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아공간에 담겨 있는 것만 컨테이너로 1,200대 분량이다. 이 정도면 천연 향수를 만들고도 남을 것이다.
“아, 그거요? 그거 정말 좋더군요. 아무리 맡아도 향기가 질리지 않아요. 폐부가 시원해지는 느낌이거든요.”
태 사장의 말을 받은 건 현수가 아니라 이 이사이다.
“회장님, 원료 구해주신다고 했는데 진짜 가능한 거예요?”
“제가 왜 흰소리를 하겠습니까?”
“아! 그럼 그거 해요. 저흰 용기까지 다 구상해 놨어요. 잠시만요.”
하던 말을 끊고 재빨리 밖으로 나가는가 싶더니 금방 되돌아온다. 사장 비서실에 준비해 놓았던 모양이다.
“이거예요. 아르센의 공주를 담을 용기요.”
이 이사가 가져온 것은 에메랄드 빛 향수병이다.
아르센 대륙의 드워프가 깎은 것이라 착각할 정로도 유려한 디자인이다.
“괜찮군요.”
“그죠? 그죠? 제가 이걸 보고 딱이라고 생각했어요. 사장님도 이게 제일 낫다고 했구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저희가 향수병 공모를 했거든요. 그랬더니…….”
태을제약에선 포인세 잎사귀를 이용한 향수사업의 전망이 밝다고 판단했다.
바닐라 향과 페퍼민트 향의 오묘한 조화를 이룬 이것은 맡으면 맡을수록 심심이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사람들마다 호불호가 다르기에 사원들도 불러 모아 냄새를 맡도록 했다. 결과는 100% 긍정이었다.
답답한 도심에서 매연에 찌든 공기로 호흡하는 도시인이다. 그런데 냄새를 맡아보니 너무도 좋은 것이다.
하여 인터넷에 공모 공지를 띄웠다.
디자인이 채택되면 소정의 상금을 주고, 태을제약 또는 태을 코스메틱에 취업하는 조건이었다.
이실리프 그룹 덕에 청년 실업률이 대폭 하락한 상태지만 디자인 쪽은 별다른 영향이 없어 취업난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상당히 많은 디자인이 쇄도했다. 그것들 중 고르고 골라 뽑은 것이 눈앞에 있는 아름다운 향수병이다.
안에 담긴 향수를 다 쓰더라도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다.
“좋네요. 근데 나머지 디자인은 어땠나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 이사가 노트북을 펼친다.
“사실 참 아까운 디자인이 많았어요. 여기 이거 좀 보세요. 이거요.”
아르센의 공주가 담길 향수병과는 다른 디자인이다. 사파이어 빛 용기인데 밑은 사각이고 위로 올라가면서 조금씩 좁아지면서 삼각형을 이루는 약간은 뾰족한 느낌이다.
보는 순간 괜찮다는 느낌이 든다. 굳이 점수로 따지자면 채택된 것을 100으로 보았을 때 이것은 98쯤 된다. ―2점인 이유는 약간 밋밋하다는 느낌 때문이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현수가 한마디 했다.
“이것도 괜찮군요. 여기에 살짝 금띠를 둘러주면…….”
포토샵 프로그램으로 향수병의 3분의 2쯤 되는 곳에 금색을 입히자 그게 포인트가 되면서 디자인이 완벽해진다.